<문규현 신부의 편지> 아이티 그리고 강정마을과 4대강

이야기 하나: 아이티, 아마존, 아바타

아이티를 보고 듣고 계시지요. 중남미 카리브 연안의 작은 나라,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여 진흙으로 구운 과자로 아이들이 허기를 달래야 하는 그 나라 아이티는 지금 상상을 초월하는 강진 피해로 말 그대로 ‘생지옥’입니다. 거리는 시신들과 통곡소리 비명소리로 가득하고 유엔평화유지군 건물이 붕괴되면서 200여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주교좌성당도 지진을 피하지 못했고, 아이티 `국민의 아버지`로 존경받던 대주교님조차 선종하셨다 합니다. 나라 기능은 완전 마비되어 구호활동조차 대혼란을 겪고 있다 하니 안타까움은 더욱 큽니다.

아이티는 한 때 자원이 풍부한 카리브해의 부국이었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식민지배, 미국에 의한 20년간의 식민지배 등을 거치면서 그토록 왜소하고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 등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들은 아이티 국민들의 자생능력을 제거해버렸습니다. 예건데 아이티 풍토에 맞아 오래도록 키워온 토종돼지들 씨를 말리고선 미국산 돼지를 키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입돼지들이 풍토적응에 실패해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국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불쌍한 나라에 대한 선진국들의 구호책임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고 외신들은 전합니다.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MBC 다큐가 지난주부터 금요일 밤마다 방송 중입니다. 15일 방영된 ‘사라진 낙원’ 편에서는 원주민들이 서구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 부족 역사에는 전혀 없던 질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고 붕괴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외부인들이 들어와 행하는 대규모 벌목 등으로 인해 정글은 파괴되고 원주민들은 식량 구하는 일조차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자기가족 먹을 것도 힘겹게 구하는 형편이니 예전처럼 식량을 구해 이웃들을 불러 모으는 일도 적어졌습니다. 공동체가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아바타’ 때문에 난리라죠. 저도 모처럼 생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그 영화를 봤습니다. 지금처럼 영원히 써도 될 무한자원처럼 에너지를 펑펑 쓰다가 마침내 고갈되면 과연 인간 생존은 어찌될 것인가 하는 그 의문에 대한 상상력이 거기 있었습니다.





최후를 맞게 된 인간은 생존을 명분으로 행성 판도라를 침략 약탈하고 맙니다. 인간은 자신의 땅 지구 자체도 멸망시킨 주범이고, 판도라에겐 침략자요 약탈자입니다. 그리고 원주민 파괴자입니다.

아이티, 아마존, 아바타. 공교롭게도 모두 ‘아’로 시작됩니다. 이것들은 지금 우리 시대의 큰 화두, 성찰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의미들이 겹쳐지고, 울림과 아픔들도 서로 공명하는 듯합니다. 아이티 사람들에게, 아마존 원주민들에게, 아바타의 나비 족들에게 ‘외부인’들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들에게 하느님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웃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선 우리 인간들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희로애락과 함께 하셨습니다. 지배하지 않고 섬기셨으며, 가지지 않고 모두 나누셨습니다. 약자들에게 귀 기울이고 돌보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남들을 희생시켜 자기만의 풍요를 누리려는 태도, 탐욕과 이기심, 무관심과 나눔 없는 생활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이티, 아마존, 아바타의 고통과 눈물이 계속 흐르게 하는 죄인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바라고 누리려는 예수님의 구원과 은총은 가당치도 않겠지요. 배우자 관계는 아무리 한 쪽의 사랑이 깊고 지극정성이어도 다른 한 쪽이 거부하고 자기 길을 가면 필연코 깨지게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야기 둘: 제주 강정마을, 4대강 사업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마지막 미사봉헌과 장례를 치르고 모처럼 여러 신부님들이 쉬고 있겠다 싶지요?

그런데 지금 경기도 양평 수원교구에서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윤종일 신부님께서 2주 가까이 단식을 하고 계시고, 저 멀리 바다 건너 제주교구에서는 일방적으로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에 항의해 주민들과 함께 제주교구 신부님들도 연행되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석방되었지만 주민들이 경찰서에 유치되어 강우일 주교님께서 그분들 면회도 하셨답니다.

지난달 21일에 서울 병원에 검진 받으러 간 김에 양수리에 가서 윤종일 신부님을 보고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연과 우주, 해와 달, 물과 불을 한 핏줄로 여기셨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서로 자매형제이며 그들에 대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영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 영성을 따르며 ‘교회와 세상 안에서 효과적인 현존’이라는 사목방향을 지닌 프란치스칸으로서 윤종일 신부님에게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4대강 파괴 사업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엄동설한에 단식이란 얼마나 혹독한 것입니까. 더구나 단식하다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큰 수술을 받은 저 같은 본보기 선배신부도 보았으니 장기간 단식이란 또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4대강 개발로 죽어가는 생명의 소리와 함께 쇠약해진 윤종일 신부님을 보고 있자니, 멈추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계속 하라 하기도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곡기를 끊어서라도 탐욕과 죽음의 질주를 향해 저항코자 하는 그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겠고, 또 한편으론 장기단식이 자칫 큰 어려움을 가져올 수도 있음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천주교인들에겐 묵주가 있지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천주교인들에게 아주 소중한 필수품입니다. 불가에는 염주가 있지요. 아무튼 그것들은 둥글게 생겼고, 우리는 서로 묶여있는 알들을 천천히 빙글빙글 돌려가며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둥근 형태의 묵주는 일치와 공동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묵주는 영구한 건 아닙니다. 사용하다 끊어질 수 있습니다. 끊어지면 더 이상 묵주로서 자기 역할을 하기 힘듭니다.

묵주가 왜 언제 끊어질까요? 체인이나 고리 같은 것들이 왜 언제 끊어질까요? 그 많은 것들 중 딱 하나, 아주 약한 부분이 끊어질 때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붕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과연 그분이 꿈꾸는 공동체, 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들어 선포하십니다.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실감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뜻을 사도 바오로가 아주 잘 이해하며 공동체에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 안에서 약한 것들과 덜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 점잖지 못하고 모자라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특별히 더 돌보고 감싸야 한다고 말합니다.

묵주고리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라 할 이 존재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결국 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배제하고 방치한 채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니 구원의 섭리니 하는 것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존재들이 여전히 우리들에게 아픔을 호소하고 돌봐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지키기 위해 막무가내 지자체와 국방부를 힘겹게 상대하고 있는 강정마을 사람들, 인간 탐욕에 무자비하게 희생당하고 있는 자연, 가난한 사람들, 머무를 곳 없이 떠도는 사람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약한 사람들이 튼튼하고 강하게 되게 해달라고, 다른 지체의 호소와 고통이 우리 자신의 것임임에 눈 뜨고 마음 열게 해달라고, 묵상하며 말하고 선포합시다.

반복해서 듣고 말하고 선포하고 행동하면, 분명히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꿈, 사도 바오로의 소망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 여정에 초대받은 우리의 특권과 책임이 더욱 실감나고 의미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거룩한 계시가 되어 우리 삶 한 가운데서 생생하게 살아나고 성취될 것입니다. <이 글은 전북 인터넷 대안 언론 `참소리`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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