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두 개의 이야기

이야기 하나: 받아쓰기


또박또박 힘주어 눌러 쓴 [영희는 꼿바테 안자 있습니다.] 위로 그려진 빨간 빗금, 그리고 그 같은 빗금들이 하나도 아닌 수개가 오글조글 모여 있는 받아쓰기 노트. 난 받아쓰기를 참 싫어하는 아이었다. 시험을 치는 날이면 늘 엄마에게 사인을 받아와야 하는 그 노트는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린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었다. 지금은, 꽃이 ‘꼿’인지 ‘꼳’인지, ‘안자’야 하는 건지 앉아야 하는 건지는 고민할 만한 일도 아니지만. 가장 끝까지 속을 썩였던 ‘되’와 ‘돼’의 구분을 중학교 때 완벽하게 마스터하면서, 더 이상 맞춤법 따위가 내 인생에 빗금을 칠 일은 없으리라, 그리 여겼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받아쓰기’도 ‘쓰기 영역’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의존 명사는 띄어 쓴다, 문장 부호는 이런 것들이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등등…. 워낙 영어를 못했던 나는, 상대적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머리 아픈 쓰기 영역일지언정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더 좋았다.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사실 쓰기 영역만큼은 내신보다 수능이 더 쉽다. 수능에서는 어렵거나 세부적인 문법을 묻지 않는다. 그냥 ‘시키는 대로’ 풀면 되는 경우가 많아 듣기 영역이나 쓰기 영역은 그저 워밍업 정도하는 수준이다. 쓰기 영역은 패턴화 되어있기 때문에 문제만 많이 풀어보면, 아 이렇게 푸는 거구나 싶다. 다만 내신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생활 국어’라는 녀석 때문에 골치 좀 아파야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신은 역시 내신일 뿐이라 다른 예체능 과목 잠깐 공부하는 것처럼 반짝 외워 시험만 치르면 그만이었다. 그 기억이 하루 밖에 견디질 못하고 증발해 버리는 하루살이 같은 것이라도, 그가 딱히 아쉽다거나 하진 않았다. 벼락치기 하며 알게 된 ‘테니스 코트의 가로 세로 길이’, ‘바느질의 종류’, ‘프로타주와 데칼코마니’ 같은 지식처럼 기억하지 못한대도 하나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언어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내신도 수능 점수도.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다. 언어 영역, 외국어 영역이라는 말 보다 우리말과 영어(혹은 토익)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해졌다. 언어 영역과 외국어 영역일 때처럼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미 구사하고 있는 ‘우리말’과 내가 돈 들이고 공들여 배워야 하는 ‘영어’, 따져 보자면 그 비중은 대략 ‘우리말<영어’ 이 정도?
대학을 오고 나서는 한 번도 우리말을 배우는 것, 쓰는 것을 두고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대학 동기 중 한명은 맞춤법을 심하게 틀리는 ‘지병’이 있다-본인은 ‘난독증’과 같이, 병이라고 주장한다-. 물어보면 알긴 하는데 유독 글만 쓰면 줄줄 틀려 버리곤 한다. 그 아이야 항상 ‘한글’을 쓸 때마다 고민이겠지만 말이다, 그건 일반적인 대학생의 경우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 과외를 하고 있는 과목도 언어. 고등학교 때부터 내신도 수능 점수도 모두 좋았었기 때문에, 고3을 가르치고 있음에도 그렇게 무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말은, 내 속을 거의 썩이지 않는 그런 존재감 미약한 녀석이었다.
모 포털사이트에서 ‘우리말 시험’이 유행하고 있다. 나도 호기심에 한번 해 봤다. 제한시한 같은 것도 없고 문제 수도 몇 되지 않는데 이거 이거, 생각보다 꽤 까다로운 것이 아닌가. 만점은 100점이며 문제 하나당 5점이다. 주관식과 객관식으로 출제가 되는데, 주관식은 띄어쓰기 문제이고, 객관식은 주로 표준어를 찾는 문제이다. 결과가 나오고 나면 자신의 점수와 전체 백분율도 알려준다.(http://hahong.org/korean/) 몇 분 지나지 않아, 나는  답을 다 체크했고 알쏭달쏭하긴 했지만 왠지 모를 자신감으로 결과보기를 클릭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내 점수는 60점이었다. 허걱! 충격에 빠져서 잠시 마우스를 잡은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난 나름 언어 좀 했다는 사람인데, 아니 그보다 내가 이런 점수를 받으면 나한테 지금 배우고 있는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지만 더 놀라운 것은, 60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점수보다 (점수는 80점부터 ‘점수’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누가 내게 그랬다) 내가 상위 21%라는 백분율이었다.
60점이 상위 21%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백분율 52%, 그러니까 딱 중간정도가 45점을 맞았다. 이거 이 정도면 심각한 것 아닌가. 우리말시험 성적 60점(결과는 자동으로 본인 페이지에 게시된다)이라는 글 밑에 “오∼님은 잘 치신 편”이나 “우와” 같은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면서 왠지 모를 안도감과 함께, 조금은 씁쓸한 느낌이 밀려왔다. Friend를 Priend로 쓰면 비웃음을 당하는데, 어째서 한국인이 한국어 시험을 쳐서 60점을 맞았다는 것이 ‘우와’같은 소리나 들을 짓이란 말인가.
요즘 인터넷을 보면, 그야말로 가관이다. ‘오빠 빨리 낳으세요ㅜㅜ’부터, ‘낮 뜨거운 일’까지. 인터넷 용어들이 범람하던 것이 올바른 언어사용에 악영향을 끼치긴 한 모양이다. ‘여기다 댓글 써도 대여?’가 ‘인터넷 용어니까’하고 용납되면서, 오빠가 애를 낳거나 낮이 덥다 못해 뜨거운 일까지 용납되게 되어버린 것일까.
60점이라는 점수가 와 닿지 않는다면, 혹은 나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는 중이라면, 한번쯤 시험을 쳐보길 권장한다. “열길물속은알아도한길사람속은모른다”의 띄어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또 촛점, 우레, 오뚜기, 장농, 노랑색 중 표준어인 것은? 자신의 우리말 실력을 얼마나 과신하고 있었는지 알게 해줄 소중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둘: ‘문학을 위한 변명’


‘문학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읽었다. 읽고 싶어서 읽은 책은 아니다. 학점교류로 듣고 있는 사이버수업의 교수님께서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써오라고 과제를 내주셨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입이 비죽비죽 한 댓발이다. 혹시 교수님 자기 책 홍보하려고 이런 과제 내신 거 아니야? 반드시 올해 나온 것을 읽으라고 (2010)하고 따로 표기해놓은 것까지 애초 동심을 잃은 내 눈에 의문이 그렁그렁했다. 이왕 살 거면 개정판으로 사라 이건가? 개정판은 꽤 큰 규모의 우리 학교 중앙도서관에도 없었다. 도서검색 결과에 잡히는 건 2002년에 출판된 문학을 위한 변명 한권. 도서신청을 해서 그걸 기다렸다가 읽고 서평을 쓰기엔 과제 시한에 못 맞출 것 같고, 그렇다고 개정판을 사기엔 왠지 분한 맘이 들어 그냥 도서관에 있던 2002년판을 대출해왔다.



책은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 촌스러운 책 표지하며, 꽤 오래된 책임에도 손을 별로 안 탄 듯한 모습까지. 누가 펼쳐보거나 한 일 없이 도서관 책꽂이에서 노랗게 빛만 바랜 책. 딱 그 짝이었다. 척 봐도 유명한 책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안 그래도 맘에 안 드는 책이 더욱 꼴미워 보였다. 제목조차 어쩜 이리 고리타분한지! 이렇게 읽는 책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대충대충 읽어 내려갔다. ‘문학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 표제와는 달리 1/3정도만이 표제와 어울리는 내용일 뿐, 뒷부분은 실수로 함께 묶여 편집된 것 마냥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었다. 하긴, 내용도 치밀한 텍스트를 졸린 눈으로 훑어냈으니, 내용이 어떠니 따질 자격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꼬투리라도 잡고 싶어서 이글이글한 내 두 눈엔 이 책이 꼭 쓸모없고, 잘못 써진 것처럼 보였다. 성질이 치밀었다. 이걸 내가 왜 꾸역꾸역 읽고 있어야 하나. 한 번도 제대로 수업을 들은 적 없어, 당장 얼굴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없는 교수님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왜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 무고한 학생들을 이용하느냔 말이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교수님이 이 책의 글쓴이일 것이라고, 추호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사이버강의는 ‘출석’만 제때하고, 과제만 기한 내에 올리고, 시험 치기 전에 동영상을 전부 플레이해서 강의 시간을 다 채워 진도율을 100%로 만들어 놓고, 그리고 시험만 잘 치면 된다. 이것이 실강의와 다를 게 무엇인가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위의 내용은 바꿔 말하면 과제와 시험만 잘 치면 수업을 단 1분도 듣지 않는대도 상관없다는 뜻이 된다. 이 수업까지 사이버강의는 세 번째지만, 지난 2번의 수업에서 나는 A+를 받았었다. 하지만 두 수업 모두 ‘출석’만 열심히 했지 동영상은 ‘음소거’를 해놓고 딴 짓을 하는 등, 최악의 수업태도를 고수했었다. 하지만 시험기간에 반짝 공부해서 시험을 치고, 과제에 공을 좀 들였더니 최악의 학생인 내게 최고의 학점이 선사되었다. 함께 수업을 들은 낯모를 학우들 중 최선을 다해 수업에 임한 사람이 있다면 꽤나 미안할 일이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데. 이번에도 역시, 난 수업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교수님이 누구신지, 성함이 무언지, 심지어는 내가 듣는 수업의 정확한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나갔다.
그렇게 중간고사를 대체해 나온 과제가 바로 이것, ‘문학을 위한 변명’을 읽는 이유이다. 꾸역꾸역 읽던 책도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달리고 있었다. 책표지를 탁 덮으며, 어휴 하고 인상을 푹 썼다. 난 책도 사지 않았지만 이용당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 탓이었다. 이렇게 쓸데없는 책을 아까운 시간을 투자해 읽다니. 실제로 정말 이 책이 쓸데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잇에잇 인상써가며 읽은 나에게 어떠한 ‘효용’을 보여줄 만큼 이 책이 자애롭진 못한 것은 확실했다. 책 읽는 속도가 조금 더 느렸다면 나는 분명 중간쯤 읽다가 때려치우고 서평에 소설을 쓸 궁리를 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서평을 쓰기에 앞서 ‘형식’을 보기 위해 사이버강의 홈페이지에 다시 들렀다. 출석율은 100퍼센트이지만, 진도율은 두 자리 수가 채 안되었다.(출석만 하고 아직 동영상을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말고사 끝나기 전까지만 100%를 채워 놓으면 되니 아직 걱정 없다. 140여명이 듣는 강의에 나 같은 사람이 과연 몇일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꽤 될 것이다. 공지사항을 클릭해 형식을 확인했다. 분량 : A4 5장 내외. 서체 : 바탕(바탕체), 글자크기 : 10포인트, 행간 : 160%. 여백 : `한글` 프로그램에 설정된 그대로, 쪽번호 매기기. 그렇게 형식을 확인 한 후, 홈페이지를 끄려고 X로 이동하던 마우스 커서가 책 제목 옆에 나란한 이름 석 자에 움찔 멈추었다. 어라? 이병주 에세이 ‘문학을 위한 변명’. 내가 읽은 책의 저자와 이름이 달랐다. 황급히 교수님의 성함을 확인하였다. 그와도 달랐다. 교수님이 쓴 책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이 책은, 제목만 같을 뿐이었다. 나는 다른 책을 읽은 것이었다.
그제야 왜 2010년 책을 읽으라고 강조해 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2010년이라는 것은 개정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었다. 끔찍했다. 과제 제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내가 듣지 않았던 수업 중에, 교수님께서 친절하게 주의를 주셨는지도 모른다. 벌 받는 건가. 아득한 느낌에 광대뼈가 알알할 지경이었다. 정신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서둘러 서점으로 뛰어갔다. 심지어 집 앞 작은 서점에서는 그 책이 없다고 해서 학교 정문 앞까지 가야했다. 9000원을 주고 그 책을 사면서 숨을 고른다. 이 정도 두께면 한 시간이면 읽을 수 있다. 서평을 쓰는 데 4시간. 도합 다섯 시간이면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다. 아니, 그냥 인터넷에서 대충 다운로드 받아버릴까? 다시금 머리를 쳐드는 검은 마음. 아니, 아니다. 머리를 흔들어 그 흑심을 털어낸다. 쉬운 길만 찾다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 이것은 어떤 학점을 받는 가를 떠나서 배움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이것을 가벼이 여겼다가 이런 일이 발생한 것 아닌가.
지름길인줄 알았던 길이 외려 ‘정도’보다 둘러가는 길일 수도 있다. 지금은, 최대한 성실하게, 다섯 시간 동안 서평을 써야겠다. 다섯 시간. 결국 시간을 못 맞춘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후에, 1강부터 찬찬히 다시 들어야겠다. 반 학기동안 듣지 않은 수업이 까마득하게 밀려있지만. 별 수 있나. 모두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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