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두가지 이야기

이야기 하나: 언니 그리고 아기

경칩이 지났다. 봄이다. 잠깐 따뜻한가 하더니 다시 들이닥친 추위. 100년만이라는 눈 폭탄 일도 그렇고 지금 봄을 노래하기엔 여러 가지로 조금 무리다. 밖과 안의 온도 차이 때문인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 뿌옇다.
풀어 늘어뜨린 나뭇가지가 뾰족뾰족 하늘을 찔렀다. 그를 날실삼아 씨실로 얽혀든 검은 전선줄 몇 개. 뒤로 보이는 회색의 건물 벽이나, 누렇게 숨죽인 잔디들. 색이 바랜 듯한 겨울 풍경에, 봄다운 색은 간혹 지나가는 차들의 채도뿐이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다운된다. 봄은 언제일까. 까마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머지않았음을 안다. 시간은 참 쉽게 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곧 밤이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또 일요일이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문자 돌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월도 다 가고 있다. 입김 뿌옇게 숨 쉬는 겨울도 금세 여름이 돼버릴게다. 바란다고 빨리 오는 것은 아니지만 또 천천히 가줄 만큼 친절하지도 못한 것이 시간이다.
영어 공부하기가 싫었다. 몇 년을 손을 놨던가. 분명 알았었던 단어들이 낯선 얼굴을 하고 내가 누구게 하고 물어온다. 어 나 너 알아, 그런데 뭐더라. 짜증난다. 다시 고갤 들어 창밖을 본다. 온통 회색이다. 내 눈동자도 회색으로 물드는 느낌이다.
띠롱, 문자메시지가 왔다. 이미지 파일이 첨부되어 있다. 발신인, 사촌언니. 결혼한 지 1년이 좀 넘었던가, 아니 더 되었던가. 내 머리 길 적에 결혼식에 갔었으니 거의 2년 정도 되었으리라.
잘 생긴 형부랑 알콩달콩 산다며 연락도 없던 언니가 근래에는 시도 때도 없이 문자다. 안 봐도 뻔하다. 심드렁하게 이미지를 로딩한다. 역시나. 꺄륵, 소리가 들릴 것 같이 해맑은 아기 사진이다. 몇 장의 사진들 밑으로 ‘예쁘지?’ 팔불출 같으니라고. 어 예쁘네, 간단하게 답장한다. 예쁘다고 호들갑떠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하루가 멀다 하고 예쁘냐고 물어오니 나도 이젠 별로 할 말이 없다. 언니 역시 답장을 바라고 문자하는 것은 아닌 눈치다. 그냥 다만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났을 뿐.
얼마 전에 본 언니는, 전에 없이 철이 든 모습이었다.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덜렁대고 천방지축인 언니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표내지 않았지만 굉장히 놀랐다.




내가 기억하는 언니를 떠올려 보자면, 컴퓨터 앞 의자에 무릎을 껴안고 쪼그려 앉아서 뭔가 굉장히 쓸데없어 보이는 것에 집중하던 모습, 마우스 딸깍딸깍한 소리와, 언니 안경에 반사되던 파란 모니터 불빛, 어쩌다가 이모가 잔소리라도 하면 클릭하는 손은 분주히 둔 채로 다만 입으로만 “아 왜! 아 몰라!” 해서, 등짝을 한 대 짝하고 맞고 뭐 그런 모습들이 생각난다. 철딱서니 없는 언니. 역시 철딱서니 없는 내 눈에도 언니는 철딱서니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그랬던 언니의 얼굴은, 마치 아가야 나는 온전히 너만을 위해 살고 있단다 하는듯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안긴 아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마리아상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니와 성모상이라니 하며 스스로 어이없어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때의 이상한 기분이 현재까지 옮아와 뭔가 어딘지 모를 곳이 간지러운 기분이다.
까만 나뭇가지와, 또 까만 전선이 바람에 흔들흔들 한다. 아무렇게나 쭉 찢어 펼친 단어장이 책상에 널브러져 있고, 공부하기 싫은 계집애 하나는 의자를 기우뚱 젖혀 의자다리 두 개만을 땅에 걸친 채로 영양가 없이 창밖이나 보면서 시간 아까운줄 모르고 사촌언니 생각이나 하고 있다. 철없이.
이런 계집애도 엄마가 되면 저런 표정을 짓게 될까. 눈을 감는다. 창밖의 풍경이 눈꺼풀 밑으로 사라진다. 곁으로 얼핏 보이던 책상도 함께 사라진다. 주홍빛 어룽히 비치는 눈꺼풀 밑으로 내 심장 소리를 세고 앉아 있다. 내 안에 심장이 두 개 뛰게 될 때가 오겠지. 나는 천천히 어른이 되어서 결국 누가 봐도 어른일 때에 결혼을 하고, 또 어른으로 내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물, 스물하나, 스물 둘, 스물 셋. 어른이라고 불렸을 때부터 나는 너무 조금씩 자랐다. 너무 조금이라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축하드립니다, 엄마가 되셨어요”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될 때가 온다면, 확신하건대, 그때의 날 어른이라고 부르긴 무리일 것이다. 지금 당장 그 말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없는 계집애가 갑자기 엄마가 되어버리는 기분일 게다. 내 뛰는 심장 밑으로 납작한 배를 쓰다듬는다. 내 아기? 기분이 이상하다.




결혼이나 후에 생길 가족 같은 것은 지금 내게 너무 아득해서 상상조차 잘 되지 않는데, 내 뱃속에 아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어째선지 그렇게 머지않게 느껴져 오히려 빨리 왔으면 싶을 정도였다. 내 배를 쓰다듬으면서 아가야, 아가야, 할 날이 빨리. 배에 손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눈을 뜨니 화하고 밝다. 감기 전과 다를 것이 없지만 같지 않은 세상이 있다. 나중에 내 아이가 숨 쉴 세상. 하늘빛부터가 다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었나, 이런 구절이 있다.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바로 이세계이기 때문이다.’
어째선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있지도 않은 아가를 속으로 부르면 세상은 얼마나 포근한지. 아가야, 아가야. 처녀애가 입에 담긴 조금 그런 말인가. 픽 웃음이 난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니 아직 존재 자체가 없는 아기 생각에 이렇게 뿌듯한 나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팔불출이 될 것인가. 그 애를 만나면 난 이 아이를 위해 살려고 태어났구나 하는 맘이 될 것 같다.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별 같은 아이로 키울 거다. 그래서 내가 먼저 별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네가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의심이나 후회 같은 건 담지 않도록, 온통 감사함과 기도만을 느끼면서 자랄 수 있도록. 몸도 정갈히 해야 한다. 짜증도 접어두어야 하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술, 담배 생각해서도 안 된다. 안될 것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데, 참 기껍다. 울 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언제나 태교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열심히 살자. 시리도록 푸른 하늘. 창밖으로 겨울 향 가득한 풍경이,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마저 참 기꺼운 날이다.

이야기 둘: 지하철 풍경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은, 꼭 내 발로 걷는 것이 아니더라도 꽤나 피곤한 일이다.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거나 혹은 지하철을 탄다거나 하는 것도 생각보다 체력, 정신력 소모가 심하다. 특히, 자리에 앉지 못해 지하철 손잡이에 지친 몸을 매달고 있어야 할 때는, 그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날도 그저 그런, 친구와의 약속 시간을 퇴근 시간에 잡은 멍청함으로 몸이 고생하고 있던 단지 그런 날이었다.
홍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직 한참 남았다. 사람들은 꾸역꾸역 들어온다. 그날은 컨디션이 영 별로였다. 간밤에 너무 늦게 잠을 잔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전날 이것저것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놓던 그다지 친하지 않은 선배를 원망했다.
잠깐 나오라던 술자리는 그 선배로 인하여 지루하게 길어졌고 결국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신입생 때는 이런 자리에 용케도 오래 붙어 있었었구나, 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 선배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자기자랑이 대부분이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동기 녀석도 그냥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연신 언제 끝나려나 하는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묘하게도, 이 지하철 안에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내 앞의 남자가 다음 역에서 내릴 듯 갑자기 분주하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야! 드디어 앉겠구나. 무표정하던 내 얼굴에도 숨길 수 없이 반짝 희망이 스쳤다.
열차가 멈추고, 남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나는 그가 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준다. 그리고 빈자리를 향해 발을 떼려는 순간, 어디선가 아주머니 한분의 핸드백이 날아온다. 아이고 자리가 났네. 대번에 아주머니의 몸이 시야를 가린다. 놀라우리만큼 민첩한 동작이었다. 마무리 표정까지 완벽하다. 양 옆의 사람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흘낏 본다.
나는 약간 허탈해졌다. 꼼짝없이 서서 가게 생겼다. 이것이 아줌마 파워인가. 나 같은 계집애의 내공으로는 어떻게 대볼 것도 아니란 것을 절감하면서, 흔들리는 바닥에 집중하여 무게 중심을 유지하는 데에만 기를 쓸 밖에 도리가 없었다. 잠깐 반짝 했던 희망이 사라져버렸지만, 나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다. 금방 평정을 찾았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다시금 무표정하다. 습관적으로 머리 모양과 얼굴을 체크하고 시선을 조금 옮긴다. 내 옆으로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 그 뒤로 사람들이 등을 보이고 서있고 그 사이로 앉은 사람이 몇몇 비친다. 몇은 졸고, 몇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몇은 내 표정과 흡사한 표정으로 그저 앉아 있거나 서있다. 피곤하고 지루한 표정들. 퇴근시간의 지하철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하철은 덜컹덜컹 이 무표정들을 싣고 달려간다. 제각각 다른 목적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마치 가족처럼 하나같은 표정들이다. 고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활력이 있지도 않은 공간, 그런데 그때, 무표정들에 파문을 일으킬 일이 일어났다.
“젊은 사람이 말이야!”
내 귀에 들어온 것은 여기서 부터였다. 단순한 소음으로 치부하여 흘려듣고 있다가, 갑자기 남자 쪽에서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면서 그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목소리의 근원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표정했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조금 술렁술렁한 기미가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지금 임신 중이라.”



소란은 노약자석 쪽에서 나는 것이었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성분과, 아줌마라고 부르기엔 아가씨 태를 못 벗은 여성 한 분. 대충 들어보니 젊은 여자가 노약자석에 떡하고 앉아 있으니 할아버지께서 꽤나 역정이 나셨던가보다. 여성분은 사과를 하긴 했지만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임신 초기라 티가 잘 나지 않을 뿐이지 분명 노약자석은 임산부를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도? 배도 안 불렀구먼 뭐시 무겁다고 거기 앉아있어?”
그 광경을 힐끔거리는 얼굴들에 흥미어린 표정이 고인다. 나 역시 마찬가지. 어떻게 될까. 꽤나 당차보이는 언니인데, 뭐라 받아치거나 하지 않을까?
“…앉으세요.”
임신을 했다는 자신에게 호통을 치는 아저씨.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직감한 여자 분은 한숨을 작게 한번 쉬더니 주섬주섬 일어선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흥미로움이 빠르게 기화된다.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바로 했다. 그때, “이 아저씨가, 아니 배 안 부르면 임신 아니오?”
사람들의 고개가 내 쪽으로 획 향한다. 순간 당황한다. 내가 아니다.
“이래서 남자들은, 임신 초기가 더 힘든 거유. 새댁 앉아 있어.”
내 앞의 그 민첩한 아주머니다.
“몸 힘든 새댁 괴롭히지 말고 여기 와서 내 자리에 앉으슈. 으이구, 정말.”
일어난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굳은 여자분, 순간 당황하여 할 말을 잃은 아저씨, 아 뭐해 앉지 않고! 재촉해대는 아주머니, 그리고 벙찐 표정으로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번갈아 보는 사람들.
아주머니는 직접 노약자석으로 걸어가 아저씨를 끌어다 자기 자리에 손수 앉혀놓고는, 그 여자 분에게 다시 돌아가 이것저것 자상하게 물어본다.
“아이고 새댁, 몇 개월이야?” “새댁 닮았으면 참말 예쁘겠구먼.” “여기저기 아프고 그러지이? 원래 그런 거야.”
아저씨는 너무 당황하여 이렇다 대꾸도 못하고 앉아만 있다. 사람들이 다시 술렁술렁. 자기에게 와서 박히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듯 다음 역에서 내려버리셨다. 아주머니와 여자 분의 대화로 지하철 안에 조금, 활기가 돈다. 사람들도 전에 없이 생기 도는 얼굴로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이것이 바로 아줌마의 파워인가! 결국 목적지까지 한 번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서 갔지만은, 그 날 만큼은 꽤 유쾌한 기분으로 출구를 나설 수 있었다. 내가 찜해 둔 자리에 핸드백 휙휙 던지시는 아주머니지만, 그런 아주머니기에 속 시원히 할 말 다 하실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대한민국 아줌마들, 파이팅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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