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꿈 그리고 현실



초등학생일 때, 나는 방학숙제를 하나라도 덜 해가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꼬맹이였다. 그런 주제에 미리 미리 해두는 성격도 못 되어서 개학을 삼사일 앞두면 온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가족 신문에 곤충 채집, EBS 교육방송 시청, 밀린 일기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손재주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는 거다. EBS교육방송 같은 건 본 셈치고, 문제집 한권 풀기 따위나 선생님께서 방학식 때 나눠주신 테스트지, 가족신문에 실을 시시콜콜한 기사 따위는 친구들에게 맡기고 나는 대신 그네들의 그림그리기나 만들기 숙제를 대신 해주곤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삼일을 보내고 나면―초등학생에겐 터무니없이 적은 수면시간으로 인해 개학식 땐 늘 녹초였다― 보상심리라고 해야 하나, 숙제검사를 고대하며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체크된 방학 숙제리스트를 마치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책상 위에 꺼내놓고 눈을 반짝, 숙제검사 언제 해요 하고 눈빛으로 말하는 꼬마.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꽤 꼴미운 학생이었던 것 같다. 방학숙제 제출 기한이 하루 이틀 연장되곤 하면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니, 숙제를 미처 덜한 친구들 눈엔 내가 어찌 보였을지 어렵게 머리 굴려보지 않아도 빤하다. 과학 상상화 그리기, 라는 숙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께서 뒤에서부터 걷어와, 하고 말씀하셨을 때, 난 우리 반의 대다수 친구들이 왠지 풀이 죽은 표정으로 빈손만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며 으쓱한 기분이 되었다. 드문드문 숙제를 해온 친구들의 책상 위 그림들을 대충 훑어봐도 그중에 내 것이 가장 나았다. 더불어 내가 그려준 품앗이 친구들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아이들 눈에도 자신의 책상 위 그림이 꽤 그럴싸해 보인 모양이지. 숙제를 거둬가고 몇 장 되지 않는 과제물을 검사하시던 선생님은 나를 포함한 4명을 교단 위로 불러내셨다. 내가 대신 그려준 품앗이 패밀리 3명, 그리고 또 한명. 은근히 칭찬을 기대하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께서 꺼낸 말은 의외로, 가벼운 꾸지람이었다. 누가 봐도 한 사람이 그린 게 뻔해 보이는 `미래의 우주 생활` `미래의 해저 생활` `미래의 천상 생활` 시리즈를 나란히 놓으며 숙제는 대신해 주는 게 아니다, 눈을 찡긋 하셨다. 워낙 숙젤 안 해온 아이들이 많았던 터라 가볍게 넘어갔다. 내 관심은 자연스럽게 함께 나온 한명에게 쏠렸다. 그 아이에게 선생님께서는 그림의 설명을 요구하셨다. 아이의 그림실력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다지 좋지 못한 편이었고, 때문에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하신 것이다.
아이는, 굽은 어깨와 고갤 푹 숙인, 소극적으로 보이던 인상과는 달리,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그림의 설명을 시작했다. 한 장의 그림에 무슨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았던지 실제로 아이의 그림은 8절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깨알 같았다. 대다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중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림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차고 있었던 손목시계. 아이의 설명이 약간 터무니없는 느낌이긴 했지만, 당시 그게 그렇게 그럴싸해 보였다. 시계만 차고 있으면 그것으로 전화도 할 수 있고, 지갑대신 그걸로 계산도 할 수 있고 그것으로 병원 예약도 할 수 있으며 학교에서는 그 시계를 인식시키면 출석체크도 된다나! 그런 게 진짜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연 미래에는 그런 번쩍번쩍한 손목시계쯤은 당연한 듯 사용해줘야 `미래답다`, 하고 생각하면서 그런 미래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좋겠다, 하며 어린 나는 묘하게 들떴다. 역시 어린아이라 신용카드 개념은 어려웠던지 손목시계는 ‘충전식’이었지만 열 살 남짓한 꼬마가 생각해 낸 것 치곤 정말 반짝반짝한 아이디어 아닌가. 인공 아가미가 달린 바닷속 사람, 산소가 나오는 헤드기어를 착용한 우주인―당시 나는 우주의 압력 문제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인공 날개로 날아다니는 하늘 사람 시리즈랑은 비교도 되지 않는 디테일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아이의 예지력은 그야말로 감탄 할만하다. 카드 하나로 신용거래, 계좌 입출금, 교통카드와 할인카드, 멤버십까지 다 되는 근래의 신용카드 서비스만 해도 그렇고, 더 나아가 요즘엔 핸드폰에 이런 신용카드 서비스를 탑재할 수 있으니,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미래사회`인 셈이다. 손목시계와 핸드폰이라는 작은 차이만 있을 뿐 거의 점쟁이에 가까운 예지력이다. 그러나 아이가 이것을 발표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돈은 누가 주냐, 손목시곈 비쌀 텐데 누가 사주냐, 그럼 학교에 남이 대신 출석해주면 되겠네. 아이다운 억지스러운 태클이 몇 차례 터져 나오더니 이내 곧 바보 같다느니 하는 인신공격으로 변했다. 그 아이의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만큼 반 내에서의 인지도 역시 별로였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아이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 굉장한 괴짜가 한명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 다들 `이상한 애` 하며 은근히 따돌렸던 남자아이. 아마 그 아이가 바로 그 아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영상 통화니 사이버 애완동물 로봇 청소기 같은, 미래 언젠가, 그러니까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나올 때나 등장할거라 예상했던 많은 것들이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100년 뒤, 라고 가정했었는데, 아직 2011년에 불과하니 굉장히 빠른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빠른 발전을 가능케 하는 `인력`, 내지 `동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과학의 발달? 기술의 발달 글쎄 그것도 `발전의 일환`이기 때문에, `빠른 발전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라고 칭하기엔 부족하다. 나는 이 동력의 근원이 괴짜들의 엉뚱함이라고 단언한다. 이건 비단 내 비루한 추측만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시 되고 있는 이야기다. 전구만을 생각하던 에디슨이 그러했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만을 생각했던 스티브 잡스가 그러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괴짜였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는 엄연한 `진실`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그 1%, 아니 1%조차 되지 않는 천재 괴짜들만이 세상을 굴려 간다는 이야기일까. 많은 사람들의 오해 중 하나가 `범인` 들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해가는 메커니즘을 살펴보면 `범인`들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들이 많이 `원하는 쪽`에 발전의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들의 `니즈`를 철저히 외면한 천재의 `엉뚱함`은, 쓸모가 없기 일쑤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가능한 이야기` 들에는 열광하지 않는다. 누구도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만에 왕복할 수 있다는 것에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지는 이미 꽤 오랜 일이라 더 이상 신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다. 서울에 사는 아무개를 부산 사는 김 모 씨가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고 1시간 전쯤 전화를 하는 일. 미처 찌개가 다 되기도 전에 아무개 씨가 웃으며 현관문을 노크하는 일. 사람들은 이런 `판타지`에 열광한다. 이런 것들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 더 신비롭고 흥미로우며 사람을 묘하게 들뜨게 하는 매력이 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들은 발전이 된다. 범인(凡人)과, 1%의 괴짜의 차이는, 이 `판타지`를 현실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냐, 없냐 하는 차이일 뿐이다. 범인들은 에이 말도 안돼, 하며,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하고, 괴짜는 생각하고 연구하고 인내하고 노력해서 결국은 현실화한다는 것. 그렇지만 발전의 방향성에 그러한 범인들이 기여하는 지분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다수―99%―의 범인들의 기여가 줄곧 무시당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단지 눈에 띄지 않는 간접적 기여이기 때문일까. 한명의 영웅의 후광에 가린 들러리 같은 존재라서? 그 역시 주요 이유 중 하나겠지만, 한 가지 더, 바로 범인들이 1%의 괴짜들에게 시련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다. 주변의 반대나 비난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했을까. 그런 것 생각할 시간에 돈이나 벌어오라, 그런 허무맹랑한 꿈이나 좇고 언제 철들래? 하는 비난들. 때로는 `이상하다`는 이유로 손가락질 받고 그의 아이디어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마우스를 개발했던 더글러스 엔젤바트는 처음 그의 아이디어에 대한 비웃음을 참고 견뎌야 했다. 처음 그가 마우스에 대한 개념을 학계에 발표했을 때, 그 반응은 냉담 그 자체였다. 만약 컴퓨터가 이용자의 모든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생산성이 높아지겠느냐는 그의 생각에, 학계는 그런 `바보 같고`, `쓸모없는` 기계를 누가 쓰겠냐며 반박했다. 그의 획기적인 생각을 그간 존재했던 학계의 권위나 관성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처럼 `이상한` 생각으로 평가절하 해버린 것이다. 만약 엔젤바트가 이러한 비난에 굴해 연구를 포기했다면 아직까지도 간단한 조작만으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아니라, 복잡한 명령어를 직접 입력해야만 하는 어려운 컴퓨터를 사용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컴퓨터는 소수층만 이용가능 한 특권처럼 남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판타지`가 `현실화`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도 그와 같은 것을 정말로 현실화 하려는 사람에게는 `안 돼`와 같은 부정적인 말로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안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전 세계를 강타한 J.K.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 그 소설은 마법 판타지 물로, 현실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지만, 누군가, "나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을 현실화 시키고 말겠어!" 하고 결심한다면, 역시나 철딱서니 없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마법은 판타지, 즉 허구라고! 꿈 깨 이 사람아! 뭐,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실현 불가능`한, `허무맹랑`하기만 한 생각일까? 글쎄, 해리포터 소설 속엔 사진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나온다. 사진 속 인물이 주인공에게 말도 걸고 말이다! 이 놀라운 마법은, 더욱 놀랍게도 `스마트 폰`이라는 마법지팡이를 통하면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사진 옆 QR코드라는 바코드만 찍으면 사진은 더 이상 멈춰있는 순간의 포착이 아니다. 당신의 폰에서 사진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또 당신에게 말을 걸어온다! 마법이라기에 기대했는데, 싱거운 소리를 한다고? 어떻게 QR코드와 마법이 같을 수 있냐고? 다를 건 무언가! QR코드가 만약 `아직 불가능한` 일의 범주에 있었다면, 판타지 소설처럼 사진 속 사람이 말을 걸어오게 만들겠단 사람을, 비웃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정말로 불가능한 건, 아무것도 없다.
서울과 나의 고향은 버스로 2시간, 왕복 4시간이 소요된다. 얼마 전까진 고속도로가 개통되지 않아 훨씬 더 걸렸었다고 하지만―그땐 차라리 기차가 더 빨랐었다―, 2시간 만에 서울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 신선한 놀라움이 아니게 된 지금, 버스에서 꾸벅꾸벅 헤드뱅잉을 하고 있는 2시간이 못 견디게 지루하다. 한 한 시간 남짓 자고 일어났는데 아직도 갈 길이 절반이나 남았다는 사실이 나를 좌절케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만화영화 ‘도라에몽’에 나오는  `어디든지 문`―문을 닫았다 열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문―마찬가지로 4군데 정도 장소를 지정해 둘 수 있어 다이얼을 돌리고 문을 열면 해당 장소로 통한다― 따위가 있었다면 좋겠다, 하는 공상을 하곤 한다. 아는 사람이 들으면 아직 철이 안 들었네,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웃음 당했던 마우스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IT생활의 필수품이 되었고 QR코드는 판타지 세상을 박차고 나왔으며, `이상한 학우`의 `바보 같은 방학 숙제` 역시 지금 버젓이 `가능한 일`로 현실화 되었다. 당신이 에디슨이 아니라고, 엔젤바트가 아니라고, 당신이 빠른 발전의 단순 수용자라는 생각을 버려라. 당신은 `그렇다면 좋겠네` 하는 생각만으로 충분히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엉뚱한 생각을 함부로 비웃지 말자. 누군가의 엉뚱한 생각을 응원해 주고 또 진심으로 관심 있게 지켜봐주는 것이야 말로 사회발전을 위한 큰 기여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상상하고 또한 연구하고, 그 연구를 응원하는 우리는 모두, 발전의 주역인 것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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