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경제 이야기





단언하건데, 나는 경제를 잘 모른다. 내가 경제 분야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경제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지금 보다 더 어렸던 학생 때였다. 고등학교 2학기의 끝을 앞 둔, 2학년은 채 못 되고 1학년은 이미 다 갔던, 그 때쯤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2학년이지만, 1학년에서 채 못 벗어난 때쯤일지도 모르겠다. ‘경제란 어쩜 이렇게 경이로운가!’ 하고 깨닫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단지, 그것은 내 공교롭게도 잘 맞아 떨어진 그날의 특별한 찍기운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수능 때 치를 사회과목을 아직 다 선택하지 않았던 당시에, 나는 어떤 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해야할지 고민이 꽤 많았다. 보통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수업하는 과목 중에서 4과목의 사회과목을 선택했다. 근현대사, 국사, 사회문화, 윤리, 한국지리가 그것이었는데, 사실 선택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그래도 5과목이나 되니 가장 못하는 한 과목을 빼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국사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 학교 문과생들은 거의 90%가 넘는 인원이 근현대사, 사회문화, 윤리, 한국지리를 선택했다. 선택한 4과목 중에도 2~3과목 정도만 반영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생들도 어차피 고등학교를 때려치우지 않고 계속 다닌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내신 공부 외의 다른 과목을 선택하는 비효율적인 짓을 하진 않았다. 나도,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수리도 언어도, 외국어도 해야 할 공부들이 끝도 없이 쌓이고 쌓였는데,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새로운 과목을 공부할 시간에 단어라도 한자 더 외우는 게 맞았다. 아무리 내가 역사에 소질이 없는 학생이었어도 말이다.

그 생각은 매우 굳건했다. 얼마간 미친 듯이 국사만 파재낀 후에 본 시험에서 4등급을 받기 전까진 말이다. 매일 매일 교과서를 몇 번씩 읽었는지 모른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요약 노트는, 안보고도 그림까지 똑같이 그려낼 수 있을 정도였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악에 받쳐 공부했다. 그런데 4등급이라니. 갈 길이 까마득했다. 어쩌면 계속 역사 과목들을 공부하는 게 새로운 과목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비효율적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회과목을 언외수처럼 공부해야만 한다는,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싶은 의심이 들었달까. 다음 모의고사에 서 내가 근현대사 대신 다른 과목들에 눈이 갔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르겠다. 대충 추측해서 객관식 문제를 풀었는데, 그때 나는 성심성의껏 풀었던 근현대사 점수보다 훨씬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영광스러운 찍기신의 은혜가 나타난 것이 바로 ‘경제’과목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어쩌면  경제에 소질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학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단순히 성적을 내기 쉬워 보이기 때문이라면 조금 슬프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그러한 경우가 더 많은 곳에서 살고 있는 덕분에 그땐 그것이 전혀 슬프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혹시 모른다며 그때부터 슬쩍슬쩍 독학하던 경제 과목은, 생각보다 꽤나 재미있었다. 어쩌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던 역사 과목 대신이라고 생각해서 더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우 숫자 조금, 혹은 말을 조금 꼬아놓아 틀려버린 문제를 보면서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2학년이 끝나면서 내신과목에서 더 이상 역사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게 되자 -1년 동안 끈질기게 공부했던 근현대사도, 결국은 내 편이 되지 않았다- 나는 쿨하게 근현대사와 이별하고 관심을 가지고 집적거렸던 세컨드, 경제에게 완전히 돌아서는 길을 택했다.

3학년 때는 확신을 가지고 내가 선택한 경제에게 최선을 다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는 경제를 혼자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다. 경제 과목은, 나에게 특별했다.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점수를 쉬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라는, 조금 불순한 이유였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내가 흥미를 느끼고, 그 흥미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해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공부하게 되는 과정을 밟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보통 많은 학생들이 경험해보지 못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스스로 몰두하는 학문은 자신의 매력을 보여주길 꺼리지 않는다. 탐구에도 욕구가 있다는 것이 위인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나 ‘시험 과목’으로서 경제에 흥미를 느끼고 공부했던지라 시험이 끝나고 나니 그에 대한 관심도 급격하게 사그라졌다. 고등학교 수준의 경제는, 사실 공부할 때는 참 공부할게 많기도 하고, 문제를 풀어도 죄 맞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귀여운 수준이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후에 대학에 진학해서 경제 관련 과목을 공부하는 친구의 전언에 의하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과목인지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경제는 결국 숫자고, 수는 결국 수학이라는 것이다. 수학이란 악마가 인문의 영역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는 것이 결국 경제라고. 그러고 보면 그러했다. 내가 배운 것은 최대한 인문적인 것, 그러니까 ‘경제란 무엇인가’, 그리고 ‘경제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따위의 개론적인 부분과 가장 기본적인 경제의 원리들이었다.

이쯤 배우고 나면, ‘더’ 배우고 싶은 것이 보통일 텐데. 그 학문에 실망하거나, 혹은 질려버리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나는 왜 그런 과정은 겪지 못한 채로 경제에 대한 공부를 그만 두게 된 것일까? 경제가 내가 제일 증오하는 수학과 한 패였다니, 하는 깨달음이라도 있었어야지 내가 경제 공부를 그만둔 개연성이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어째서, 스스로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단언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심지어 내가 경제 분야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나는, 경제 과목을 스스로 선택하여 공부하면서 그렇지 못했던 다른 과목과는 분명히 다른 ‘애착’을 느꼈다.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하는 것’ 만 스스로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작이 ‘스스로’인 것도 포함되어 있는 말이었다는 것도. 스스로 공부하는 것은 몰입과 갈구를 낳는다. 나의 친구들을 비롯해서 지금도 공부하고 있는 한국의 수많은 후배들과 후배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아주 어린 친구들까지, 순수한 호기심으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되었을까. TV에선 초등학교 4학년이 성적이 떨어지면 남은 공부 끝이라는 듯 요란한 CF까지 하고 있는데 말이다. 대학생은 취업을 위해, 고등학생은 대입을 위해, 중학생은 고등학교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초등학생은 중학교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배우고 또 배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나마도 이해하지 못할 어린 나이라면, 억지로 부모의 손에 끌려서 의자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 어쩌면 후에 시작했더라면 그 미묘한 매력에 운명처럼 이끌릴지도 모르는 아이가,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가 윽박지르는 통에 수학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으로 성장해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야 말로, 정말 슬픈 일이다. 시켜서 하는 공부가 재미있다는 아이는 손에 꼽을 테니까. 아니 꼽히기나 할까?

하지만 이런 것들을 실감하게 해준 ‘나의 경제’도 오래가진 못했다. 그것도 결국엔 ‘성적’을 위한 선택이었으니까. 한계가 있다. 만약 내가 어째서 비싸기만 하고 그다지 쓸모없는 것들-예컨대 반짝이는 돌 같은-이 어떻게 비싼 값을 유지할 수 있는지 따위가 궁금해서, 그런 궁금증들로 인해서 경제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난 지금쯤 경제의 재미에 푹 파묻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내 경제에 대한 탐구열을 가로막는 수학에 대한 공부로도 가지를 쳤을지 모르고. 학문이라는 건 마치 네트워크와 같아, 완전히 독립된 학문은 없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작은 관심이 ‘학문’에 다가가는 내 자세를 완전히 바꾸고, 나는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 있…오, 너무 나갔나. 어쨌거나, 자신의 아이가 앞으로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그리고 기약 없는 학사, 석사까지 포함해서 십 수 년을 보내야할 ‘학교’에서 뒤처지길 원하지 않는 사람은 당장 당신의 지나치게 어린 아이에게 당장 책상으로 가서 두 자리 수의 셈에 대해 펜을 들고 공부하라고 시켜야겠지만, 자신의 아이가 그 십 수 년을 경이와 즐거움 속에서 행복하게 배움을 즐기길 원하는 사람은, 아이와 함께 궁금함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손가락으로 셀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세야하는 것일까. 그 전에 숫자는 왜 세야 하는 것일까. 수는 무엇일까. 두 자리 수를 셈하는 것을 연습하는 건 그 이후에 있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이딴 걸 왜 배워야 해요, 하는 의문도 없을 테고. 초기 학자들이 그러했듯이, 경이로 가득차서 수학을 탐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의 것들은 죄다 추측이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정말로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성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문과, 누군가의 연구와, 누군가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태어난 누군가가 미리 그것을 평생에 걸쳐, 혹은 세기를 거쳐, 이루어 놓은 것에 감사하면서, 그 결과물을 습득 하면 되는 것이다. 삼대가 이어가고 있는 전통 있는 음식점의 메인요리를 주문한 5분 뒤에 바로 맛볼 수 있음에 감사하듯이.

순수한 학문을 하기엔 너무 척박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성적이 매겨지거나, 자격증이 주어지거나,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면 시간 낭비라고 취급될 정도로 사막 같은 시대다. 하지만 어차피 인생의 대부분을 공부로 보내야만 한다면,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게 아닐까. 특히 어린 친구들의 교육은, 그런 식이 되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이 끊임없이 “왜요?” 라는 질문을 해대서 피곤해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을 본 적이 있다. 나 역시 “왜 달이 우릴 따라와요?” 같은 질문을 하는 소녀였었고. 그것이 바로 교육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천재로 키우고 싶다면,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손꼽으며 암기시키는 대신, 그 호기심을 키워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재 교육이 아닐는지. 공부는 언제나, 스스로 하는 것이다. 물음표를 던지는 것. 나는 어쩌면 십여년동안 시험지 속 동그라미 혹은 엑스를 겪으면서 그 능력이 많이 퇴화해 버린 모양이다. 때문에, 나는 아직도, 경제를 잘 모른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다. 내가 다시 경제를 공부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격증이나 성적 따위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이길 희망해본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