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명품과 우울증






판매대에는 점점 새롭고 비싼 것들이 넘쳐나고 이에 비례하여 쓰레기장엔 쓸 만한 게 넘쳐난다. ‘아깝다’는 감각이 둔해져 가는 것일까. 무언가를 산다는 것이 그만큼 쉽기에, 또한 버리는 것도 쉬운 것일까. 버려진 물건들 중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아무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나 역시 아무리 멀쩡한 물건이 버려져 있어도, 그것을 줍진 않는다. 그럴 정도로 아깝진 않다. 나라고 해서 ‘아까운’ 감각이 둔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학교 사람들과 카페로 공부를 하러갔다. 커피숍에서 6천∼7천원 하는 메뉴판 앞에 “비싸다”고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무리 중 나 밖에 없었다. 내가 가격 가지고 투덜거렸더니 옆의 친구가 팔꿈치로 툭 친다. 부끄러운가? 하긴 부끄러울 수도 있다. 이 카페 안에 모든 사람들은 저 가격이 합당하거나, 혹은 그만한 가격을 내는 것이 크게 껄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테고, 여기서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나는 그 돈이 아깝다 드러내는 일이다.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비싼 건 비싼 거다. 나한테는 커피 한잔에 6천 몇 백 원은 아까운 돈이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6천원이 본인에게 적지 않은 사람이 꽤 될 것이다. 나만 입 밖으로 꺼냈을 뿐, 그네들도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단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을 뿐이다. 궁상맞아 보일까봐. 자신이 커피 값에 벌벌거리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말이다.

밥값, 그에 맞먹는 커피 값 아까워해선 안 되고, 최신 유행 패션, 기기를 구매하는 데도 망설이지 않아야 한다. 궁상으로 보일까봐. 고작 고무장화, 로고 박힌 머리띠에 한 달의 알바를 맞바꿀 만큼의 대담함. 우리 또래에게는 이것이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머리띠와 장화, 그 이용가치를 훨씬 상회하는 가격에도 그것을 소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헤어스타일이나, 비오는 날의 편의를 위한 가치라기엔 너무 지나치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용법 자체의 가치를 뛰어넘는 다른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는 전반적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각기 다른 세대가, 각기 다른 위치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하며 맞물려 있는 사회. 아직 이 톱니바퀴들은 다소 삐걱거리긴 해도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지만, 어딘가 모를 음습한 느낌이 마치 머지않은 불행을 예고하는 듯, 그런 불길함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마치 병자의 발작적인 마른 기침소리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분명히 지금의 사회는, 건강함과는 거리가 있다. 내 또래들은 사회초년생으로, 혹은 준비생으로 이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축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들에게도 어떠한 ‘우울증’이 기저에 깔려있음을 느낀다. 비싼 백이나, 비싼 신발, 또한 비용이 상당한 수많은 ‘필수 스펙’들. 모두들 무리하고 있다.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서 너나 할 것 없이 그것을 숨기고 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실로 ‘무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저 쉬쉬하는 것뿐이다. 혹은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한다. 다들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하나의 평가의 기준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나만 없는 것은 안 된다. 궁상맞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궁상맞아 보이는 것에 그렇게 민감했던가.

사실 이러한 세태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맞다. 소비는 그 소비하는 대상의 기본적인 용법에 더해, 사회적 가치가 따라붙는다. 비싼 시계나 양복, 차가 성공의 이미지를 풍기는 것처럼, 어떤 대상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내가 가진 무언가를 사회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때문에 사업가가 너무 후줄근한 차림새로 구식 차를 몰고 다닌다면, 자신의 사업마저 저평가 되어 사업을 확장시키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소비의 다른 사회적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의, 그것도 우리 세대들 사이의 소비문화는 아무래도 병적인 부분이 있다. 사치나 허영, 그런 것으로 정의내리기에는 다들 너무나 무리하고 있다. 힘들어한다는 소리다. 그만둘 수 있다면 그만두고 싶어 하는 듯 아등바등 거기 매달리고 있다.

나는 내 또래의 친구들을 볼 때면, 마치 사춘기의 소년소녀들을 보는 느낌이다. 당신이 어떤 세대이든, 메이커 신발이나 가방을 사달라고 떼를 써본 학창시절의 기억은 다들, 한번쯤 있을 거다.  내 또래들에게는 ‘노스페이스’, 좀 더 옛날(그러니까 영화 ‘써니’에서 등장하듯)에는 ‘나이키’, 더 오래 전에는…글쎄 잘 모르겠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정도는 거기까지다.

어쨌거나, 내가 잘 모르는 옛날에도,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전에도 어린 시절 부모님께, ‘이거 싫어! ###로 사줘’ 하고 떼쓴 기억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분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는 사회성이 성립되는 시기로, ‘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유년시절과 달리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신경 쓰기 시작할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종 어른들이 그때의 철없음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없는 형편에 자식이 바라는 것도 사주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말이다. 사춘기가 지나면, ‘남들에게 내가 어떤 식으로 보여지는가’하는 부분, 그러니까 사회적 자아와, 자기 자신이 성립한 자신의 자아가 균형이 잡힌다. 철이 드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듯 균형이 불안하던 시절의 철없던 행동을 반성도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 세대들은, 아직 사춘기를 졸업하지 못한 듯 이상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점점 심해지기만 할 뿐,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자아는, 오로지 사회 속에서만 인정되는 듯 남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에만 집착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확인을 소비로만 표현하려는 사춘기적 행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명품을 두르면 자신이 명품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은 실패한 인생이다.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자신이 성립한 자아의 비중은 줄어들고, 그만큼 사회적 자아의 비중만이 늘어난다. 이런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있어야, 관계 속에서도 ‘내’가 있는 법이다. 사회적 자아도 중요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에 대한 확립 없이 사회적 평가에만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험으로 몰고 갈 뿐이다.

아직 우리는 사춘기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키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애들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고 있는 어린아이. 나이키 신발이 없으면 나는 ‘친구’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인지, 생각해보지 못한, 그런 어린아이 말이다.

그 어린 아이가 어른의 껍데기를 쓰고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힘에 겨울지 생각해 보라. 나는 강해보이고 싶어서 커다랗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십대 소년을 떠올린다. 팔 다리가 갑옷 안에 온전히 차지도 못하는, 작은 소년. 한걸음 한걸음이 고되고, 또 위험하다. 역설적으로, 그런 행색은 소년을 더욱 약해 보이게 만든다. 아마 소년이 정말 강해보이고 싶었다면 제대로 먹고 운동해서 튼튼해지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않고, 오히려 더 두껍고 무거운 갑옷으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 해결책이라 잘못 믿고 있다. 나중에는 그 무게에 스스로 질식해버릴지 모른다.

자신의 존재확인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구하려는 사람들은 ‘소비’를 수단으로 선택한다. 사실 그밖에 방법이 없다. 내면은 타인의 시선이 닿는 부분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이 닿는 부분이다. 안에서 밖으로 끌어내는 법을 모른다. 아니 그 이전에 안을 채우는 법 자체를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소비문화에 찌들어간다.

안이 빈 우리들이 겉껍데기만 치덕치덕 소비한 물건들로 발라내고 있을 때, 우리는 더 많은 부족함을 느낀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소비한다. 소비하고 소비하고 소비한다. 그것이 세태가 되어버려,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다들 무리한다. 무리해서라도 소비를 한다.

우리들은, 저마다 감당하기 힘든 갑옷을 두르고 있다. 전전긍긍하며 갑옷에 짓눌린 삶을 살아간다. 절그럭절그럭. 내 또래의 젊은이들, 그리고 비슷한 세대의 젊은 부모들. 젊은 부모들의 잘못된 가치관은 그대로 아이들에게 대물림 된다.

요즘에는 유치원에서도 명품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몇 백만원짜리 유명 해외브랜드 원피스를 입은 유치원생은 ‘요즘에는 다들 명품 입어요’ 하고 인터뷰를 하고, 기자는 이 유치원생을 보며 명품 유행의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음을 우려한다.

무거운 갑옷이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다. 사춘기를 졸업하지 못한 어른들, 부모들, 때문에 사춘기가 오기도 전에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들. 나는 가상의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갑옷만큼 무겁게 지상에 내리깔려 사회 전체를 불길하게 메우는 기분이다.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우울증은 아마 이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닐까. 절그럭 절그럭. 무거운 우리들의 초상.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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