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애완동물 그리고 화분





이사를 하고 내내 집에만 붙어있었다. 수업시간에도 얼굴 아는 이 없는 것도 아니다만, 어쩐지 거의 혼자 듣게 되었다. 이게 고학번의 마인드라는 것일까. 딱히 누구에게 아는 체 하며 다가가 앉으려다가도 누군가와 무리를 짓고 몰려다니는 것보다 혼자 다니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그만두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은 아니다. 사람이 많이 있으면 많이 있는 대로 친밀하게 지내며 겉돌진 않지만, 곁에 사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닥 부족함 없이 혼자서도 뭐든 잘 해내곤 한다. 혼자 밥 먹는 것도, 혼자 전시회에 가는 것도, 혼자 과제를 하는 것도, 혼자 영화를 보는 것도, 어느 것도 내겐 어려운 것이 아닌 일이다.

이번 학기는 그냥 간결하게 지내고 싶었다.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건 이번 학기에 내가 바라는 부분이 아니었다. 난 그저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가능하면 잘 치러낸 뒤 성적을 받고 이번 학기를 마무리 하고 싶은 단순한 소망이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알아오던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도 죄 의욕이 없었다.

다행하게도 딱히 무리 없이 혼자 듣는 수업은, 그렇게 버거운 느낌은 아니었다. 아는 얼굴이 왜 혼자 앉니 물어오긴 했지만, 그냥 혼자 앉는 게 편하네, 하고 인사하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혼자 하는 과제도 할 만하고, 시험기간은 오히려 모든 게 내 위주라 아무것도 신경 쓸 것도 없이 편하기까지 하다. 어디까지 했니, 뭐를 얼마나 해야 하니 불안감 조성하는 사람도 없어 공부도 더 잘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괜찮다 한들, 나도 모르게 조금은 적적한 구석이 있었는가 보다. 집에만 있는 게 편한 만큼, 도서관이나 카페보다 더 심심한 느낌은 없잖아 있다. 뭘 하고 있어도 심심함이 가시지 않는 느낌. 사실 그 느낌도 그럭저럭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화산 대 폭발처럼, 어느 순간 집 안에 어떤 생명체가 하나쯤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어떤 애완동물이 좋을지 궁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좋다 저게 더 낫다 저울질 해대면서도, 사실은 내가 결국 애완동물 같은 건 키울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게 불쌍한 내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뿐이었다.

나는 동물 털에 약간의 기관지 알레르기가 있다. 아주 심한 정도는 아니다. 그냥 왜 청소 안한 수챗구멍에 머리카락 같은 게 얽혀 배수를 막는 것처럼, 목구멍이 그런 수챗구멍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심한 때는 목이 갑갑해 잠이 들기 힘들다.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비슷한 알레르기가 있으시다. 게다가 집에 동물 좋아라 하는 가족이 하나도 없고, 나는 앞날이 흐릿한 것이 도무지 한 생명의 책임을 짊어질만한 상황이 못 된다. 막말로 내년에 월세방을 빼기라도 한다면, 가족들이 다 싫어하는 애완동물은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게다가, 난 내 용돈도 근근한 처지다. 그저 키운다면 고양이가 좋겠다느니, 그러고 보면 나는 파충류도 좋아하는데, 뭐 이런 시시껄렁한 공상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늑한 우리 집이 어딘가 썰렁한 느낌이 드는 것만 같았다. 정말 뭔가 생명체를 들이고 싶은 기분이 간절해졌다. 고양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지만, 수명이 너무 길어 내가 감당하긴 힘들었다. 햄스터나 토끼 같은 건 냄새가 너무 심했다. 애완동물 뒤치다꺼리 하고 있을 생각하니 또 그건 싫었다. 전선을 씹는다든지, 이불에 실례를 해놓는 걸 생각만 해도 뒤통수가 쭈뼛했다. 결국은 아무것도 키우지 못하겠지. 종국에 가서는 이런 공상을 펼쳐놓는 것도 지겨워 그만 두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즈음이었다.



길을 가는데 화분을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허브화분들. 아 생명체라는 게 비단 동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지 참. 그런 생각을 하고나니 마치 애완동물을 고르는 신중한 눈빛으로 파르라니 돋은 잎사귀들을 골라냈다. 그길로 화분을 여섯 개 구입했다. 통도 크지. 식물이란 식물은 죄 말려 죽이는 여자가, 겁도 없이 죄 없는 생명을 여섯이나 들여 버린 게다.

이 야들야들한 초록 잎사귀들은 도무지 식물이라는 걸 온전히 키워본 적 없는 내 손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 맡기고도 아무것도 모르고 하늘하늘 거리고 있었다. 화분을 앞에 놓고, 대체 얘들한테 물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추운 날씨에 약하지나 않을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황망하게 앉아 있는 차에, 과거 키웠던 강낭콩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아니 어쩌면 저학년 때였을 지도 모르겠다. 플라스틱 샬레에 강낭콩 싹을 틔워서 화분에 옮겨 심어 기른 적이 있었다. 아마 어머니께서 알게 모르게 계속 관리해 주셨겠지만, 콩 하나가 내손에 의해 이렇게 잎도 내고 꽃도 핀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그랬었다.

그 작은 화분에서 수확한 강낭콩은 내 밥그릇 안에 콩밥이 되었다. 평소 콩밥을 좋아하지 않았건만, 그날만은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그 이후로 콩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화분은 해충으로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키웠던 식물 중에 가장 오랫동안 키웠던 식물이다.

강낭콩은 아주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진 않았지만, 절대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끊지 않고 살펴보아야 했다. 물을 주고, 볕 좋은 곳으로 화분을 옮기고 하는 것은 단 5분이면 되는 일이었기에, 오히려 잊기가 더 쉬웠다. 고작 손바닥만 한 흙으로 이 녀석의 세계를 한정시켜 놓은 것도, 햇빛이니 물이니 내가 주지 않으면 살 수도 없게 만들어 놓은 것도, 실은 내 곁에 두려는 욕심이 아니었던가. 욕심을 부렸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애완동물. 애완이라는 단어는 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긴다는 뜻이다. 사랑과 관심을 쏟아주는 일이 서로에게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생명을 자신의 욕심으로 가까이 두고, 그들이 자율적인 생명을 자신에 의하지 아니하면 안 되도록 한정하는 것이 어찌 가벼운 일이겠는가.

단지 예뻐서 고민 없이 들이는 애완동물들. 그리고 그만큼 고민 없이 버려지곤 한다. 아이의 장난감으로, 액세서리처럼, 잠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책임감 없이 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단순히 친구로 지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일이다.

내가 들인 생명들은 오로지 내 손에 의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내게 소속된다고 하는 편이 더 알맞다. 그들의 삶이나 죽음이 내 책임 하에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라는 게, 다른 죽음을 책임질 수 있을 만한 그릇일 수 있을까. 나는 거의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나 자신을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사람이다. 내 선택에 의한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은 아주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지만, 완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잘 해내는 사람이 드물다. 대개는 그 무게에 휩쓸려간다. 여기에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다른 생명의 책임이 어깨에 더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다고 본다. 그 무게를 실제보다 작게 계산하여 그 부분만 짊어지거나, 오히려 외면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때문에 생명을 책임지게 되었다면, 죽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그걸 제대로 책임질 그릇이 되지 못하니까. 그 전에 생명을 내 책임 하에 두는 일 자체에 대한 것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가볍지 않은 일인 만큼, 엄격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져 보아야한다. 내가 정말 내 욕심으로 다른 생명을 곁에 두어야만 하는 상황인가. 혹 그러하다면 나는 이 생명을 책임의식을 가지고 잘 돌볼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 생명이 죽는다면,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건, 식물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집에 초록색이 들어오니까 확실히 생명감이 느껴진다. 우리 집에는 창으로 직사광선이 들지 않아 오전에 화분을 내놨다가, 해지기 전에 다시 들여 놓는다. 내가 얘네를 얼마나 잘, 그리고 오래 키워낼 수 있을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돌봐주려고 한다. 제 생명을 나한테 기대고 있는 것들이니까. 내 욕심으로. 물 안 들고 볕 안 드는 집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들이니까. 얘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무게에 비하면, 사실 물을 주고 볕 쪼이는 이런 것들은 얼마나 가볍기 그지없는 책임인가. 겨우 이런 것을 받고도, 내게 그 이상의 것을 주는 것에 감사한다. 부디 아프지 말고 잘 자랐으면 좋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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