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어떤 꿈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는 간밤의 꿈 이야기다. 누구도 남의 시답잖은 꿈 따위를 신경 쓰려 하지 않는단 걸 알기에, 사실은 이 글이 꿈이라는 것을 먼저 쓰고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구운몽이 성진의 꿈 얘기임을 미리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듯 크게 흥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혹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심각해질까 싶어서, 독자들의 흥미가 떨어지는 것을 각오하고, 이렇듯 이야기가 꿈임을 먼저 밝힌다. 하지만 단순한 개꿈 치고 디테일한 구석도 있고, 기묘하게 의미심장하기도 하여 읽기에 크게 지루하지 않을 거라며, 조심스럽게 시작해 보려한다. 속는 셈치고 계속 읽어보는 것도 시간 보내기엔 나쁘지 않을 것이다.

6월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원전이니 온난화니 지진이니 하며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일부 있었다. 여름이라기에도 지나치게 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 무렵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과 친구들과 졸업을 기념하여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여행지가 어디인지 뭘 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내가 당시 맘에 두고 있던 남자애와 친분을 쌓을 마지막 기회에 집중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조금 문제아 기질이 있는 친구였다. 크게 미움 받을 만큼은 아니지만 만사에 의욕 없는 모습이 그리 성실해 보이진 못한 정도였다. 그 애는 취업을 비롯한 모든 성가신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등바등 학점과 취업과 그런 것들에 매달리고 있는 우리들을 그저 뚱하게 쳐다보는 것이 그 애의 인상이었다. 어째서 그런 아이를 좋아한 건진 모르겠지만, 마치 어쩔 수 없는 듯 나는 그 애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지에서도 그 애는 역시 그닥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들뜬 친구들이 모두 우우 나가고 나서, 나는 혼자 남은 그 애에게 용기내 말을 걸었다. 들뜬 공기는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말을 거는 것은 뜬금없게도 너무나 무거웠다. 그 애는 내가 추근거리는 걸 애써 무르는 게 더 귀찮다는 듯, 내 질문에 적당히 대답했다. 둘 밖에 없고 해서인지, 그러다 꽤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저 적당한 대답이나 뱉어내던 그 친구의 입에서 드디어 자신의 기억과 경험과 생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다. 대화가 이어지다가, 그 애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 애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였다. 자세한 설명도 없이, 오로지 그것이 다였지만, 나는 혼자서 말기의 불치병이나 난치병들을 훑으며 지금까지 그 애가  매사에 심드렁했던 이유를 문제아 기질로 정의했던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뭐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지는 않다 말하는 그 애 표정이 무덤덤하여 마음이 아팠다.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짐짓 밝음을 가장하여 그 애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럼 더더욱 재미있게 보내야 한다고.

기억은 잘 안 나도, 남은 여행 내내 많이 웃으며 보냈던 것은 확실하다. 뭔가 시답잖은 것에 함께 웃고 그랬다. 원래부터 아주 절친했던 사이처럼 여행 내내 붙어 다니며 재잘거렸다. 그 아이를 아는 사람들이 죄다 의아해할 만큼, 십대의 계집아이들처럼 떠들고 웃고 하였다. 아마 착각이 아니라면 그 애도 내가 좋아졌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시일이 조금 흘렀다. 밖은 나날이 더워졌다. 뉴스에선 무더위로 인한 안 좋은 소식들이 줄줄이 들려왔다. 급격하게 더워지는 날씨로 임시휴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커튼을 닫고 건물 속에만 머물렀다. 그런 중에 그 아이가 날 보러 우리 집에 잠깐 방문했다. 뜻밖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기쁘기도 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어색하게 내 방으로 안내했다. 둘만 앉은 방이 커다랗게 느껴졌다. 그다지 잘생기지 못한 얼굴조차 똑바로 보지 못하고 쓸데없는 안부 같은 걸 묻고 그랬다. 오랜만이다. 밖에 덥지 않았어? 뭐 그러다가 소재가 동이 났다. 침묵이 어색해서 얼굴을 쳐다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친구가 더위 때문인지 붉은 뺨으로 나를 마주봤다. 에어컨 바람 아래서 더위 모르고 화끈 거리는 내 뺨도 저리 붉다면 어쩔까 싶어, 나는 차라리 나도 밖에서 이제 들어오는 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위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게 말이다.

내 뺨이 붉든 파랗든 그 친구는 그저 내 눈을 보고 있다가, 뜬금없이 또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내일 죽어.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이의 혈색은 건강해 보였다. 이 더위 속을 혼자 걸어온 아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하루 이틀이 힘들 수는 있지만, 내일 죽는다는 것은 또 뭔가. 죽는 날이 확정되어 있는 병도 있나. 하지만 내가 그 애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그 말을 의심하거나 하진 않았다. 어째서 내일 죽는다는 것인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 애가, 갑자기 다가와 앉으며 내 손을 마주잡고 말을 시작했다. 몇 년 전 꿈에, 한 사내가 나타나 오늘 날짜, 오후 8시를 보여주며 이것이 네가 죽는 시간이다 했다고 한다. 너무 이른 나이에 죽는 것이 억울하다 말하자, 그 사내가 그렇다면 좋았었던 과거의 하루나, 죽기 직전의 하루, 혹은 죽은 후의 하루를 더 살게 해주겠다 하였다. 이렇다 할 추억이 없었으므로, 주저 없이 생을 하루 더 늘리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 사내의 안색이 급히 어두워지면서 좋은 선택이 아니라 하며 재고를 권유했다. 그 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내는 모르는 게 나았을 거라고 말했다. 이어, 너는 아무도 남지 않은 이곳에서 혼자 하루를 살게 될 것이다 말했다. 사내 앞에 떠있는 날짜는 하루가 미뤄졌다.

그 애는 그 꿈 얘길 마치며, 꿈 따위를 신경 쓴다고 뭐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믿을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번에도, 그 애를 좋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애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좋아하는 것 이상의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의 꿈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납득이 되었다. 나 역시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 친구의 말에서 그러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애가 죽는다는 날이 내일. 꿈대로라면, 오늘이 이곳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는 날이다. 정확히는 오늘 오후 8시. 나도 그럼 죽는 건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저 아련한 상실감을 더듬는 와중에 그래도 모두 한날 한시에 죽는다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이어 문득 멸망 후에 혼자 하루를 살아야 할 이 애가 안타까워졌다. 본인도, 죽는 것보다 그것이 더 두렵다고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나도 그애도 제법 솔직해졌다. 나는 누군가 내 죽음을 기억해 줄 수 있어서, 그리고 그게 너라서 행복하다 말했다. 그 애는 초조한 얼굴 가운데서 실낱같이 웃었다.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까. 엄마가 간식을 들고 들어오시다 우리가 손을 잡고 있는 걸 보셨다. 어머니가 눈을 흘기며 힐끗 웃으신다. 어머 얘가? 이런 표정이다. 호호 웃으시며 방문을 닫아주시는 어머니 종아리에 화상 자국이 붉다. 같은 것이 내 팔과 맞은 편 아이의 얼굴 목덜미에도 있다. 너무 뜨거운 날들이 남긴 것이다. 요즘엔 누구나 이것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이를 남겨 두고 방을 나왔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티비에서 우라늄이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앞의 어머니를 꼭 안았다.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곧, 동생이 두터운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빛을 보며 말한다. 8시인데 왜 해가 안 지지?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꾼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종말론도 믿지 않고, 종교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내 꿈이 절대로 개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2012년 지구 종말설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마야인들의 초능력적인 예지가 맞는다고 한들, 지금 현재의 우리들의 일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 역시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던 적이 한번도 없어서인가 일어나서도 뭔가 무섭거나 찝찝하다기보다는 그저 너무 긴 꿈을 꿨네, 하는 정도의 멍한 기분이었다.

이렇듯 긴 꿈을 꾸면 어딘가에 기록해두곤 하는데, 기록하다보니 갑작스레 뭔가 내가 지금까지 환경에 대해 무심하긴 했었구나 실감했다. 사실 이런 깨달음은 내 꿈 내용과는 핀트가 약간 어긋난 것도 같지만, 허풍 같은 종말론 보다는 아무래도 내겐 그쪽이 더 현실성 있는 문제인지라 말이다.

어쨌거나 뭔가 미래 인류의 종말에 인류가 책임이 있다면, 그것이 인간들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 때문이란 건 거의 확실한 일이지 않겠는가. 지속 불가능한 개발, 파괴, 그리고 반성의 부재. 나도 남극의 눈물이니, 온난화니, 방사능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아주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막상 꿈에서나마 그 비극의 끝을 간접 경험해본 후에야 그것들을 사실 나와 상관없는 어떤 것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끝에는 더 이상은 좋아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가족도, 내 자신의 내일도 모두 끝나버린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극의 눈물을 보면서 고작 펭귄 귀여운데 불쌍해 같은 안일한 감상이나 남기고 말이다.

아, 정말 경각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는 그 말을 나 자신이 아닌 모호한 ‘인류’에 돌렸던 것도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인간들이 문제야, 하면서 정작 내가 그 인간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어리석음. 글쎄 단지 꿈일 뿐인 이야기를 가지고 너무 진지하게 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필자의 꿈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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