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 영화 ‘부당거래’의 유명한 대사다.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은, 언중유골이 느껴지는 한마디. 맞다. 호의가 거듭되다보면 그 호의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호의를 베푸는 쪽에서는, 이런 상황이 꽤나 속이 쓰린데도, 받는 ‘저쪽’은 ‘이쪽’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는 게 더욱 문제다. 아마, 누구나 이쪽 상황도, 저쪽 상황도 다 한번쯤은 겪어봤으리라 생각한다.

만약 본인이 ‘저쪽’의 사람들로 인해 늘 마음앓이 하는 ‘이쪽’의 피해자로서, 자신만큼은 결코 ‘저쪽’같은 부류가 아니라 자신한다 하더라도, 자신과 얽혀있는 수많은 관계의 책장을 뒤적이다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얼룩을 발견하는 것처럼 한쪽 구석에서 ‘저쪽’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쯤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정말 결백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을 아니 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의 호의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온전히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듯, 인간관계란 호의와 호의로 단단히 얽힌 신용관계와 같다. 하지만 호의에 의존하지 않는 것과,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늘’ 감사할 수만 있다면야, 그렇다면야 ‘저쪽’이 되는 일 없이 사는 것도 ‘가능’하긴 하다.

다른 사람의 호의에 늘 감사하며 산다는 게, 말이야 쉽지, 사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흔히들 하는, 혹은 들어봤을 ‘부모로서 당연히’, ‘선생님으로서 당연히’, ‘친구로서 당연히’, ‘남자친구로서 당연히’, 하는 소리~‘라서 당연하다’는 많은 일들이, 정말로 당연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쪽의 호의. 그걸 정말로 저쪽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순간, 그 관계의 부담은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버린다. 때때로 그 부담을 짊어져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떠올려보는 것으로 나는 그 호의에 대해 ‘늘 감사하고 있다’며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 신입생 때, 슬프게도 이제는 꽤 까마득한 일이다. 여하튼 내가 신입생일 때는 여느 신입생과 마찬가지로 공부하기를 멀리하고 언제나 놀기를 좋아했었다. 대학생활은 지금껏 누려보지 못한 자유와, 온갖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 넘쳤다. 출석부에 펑크 내지 않는 정도, 겨우겨우 최소한의 성실함을 유지하며 온갖 재미있는 것들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결국 시험기간이 도래했다.

5지선다 객관식만이 시험의 전부인줄로만 알았던 나에게, 시험용 답안지의 그 희고 광활한 모습은 공포로 다가왔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한 상태로 시험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선배들이 답안은 이렇게 이렇게 작성하면 된다 설명해주시긴 했지만 생전 처음 치러보는 대학시험이 말만으로 쉽게 와 닿을 리 없잖은가. 대체 무엇을 외워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어 카오스 상태로 그저 미친 듯한 분량의 시험범위를 그저 읽을 뿐이던 그 때, 꽤 친하게 지내던 동기 여자애 하나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같은 신입생이면서도 나와 같이 길을 헤매는 신입생들에게 ‘예상답안.hwp’파일을 메일로 거침없이 송부해주면서, 너무도 믿음직스럽게 “이것만 외우면 된다”하였으니 목자의 인도를 받은 어린양처럼 우리는 그저 감격하여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과 수석입학이라는 찬란한 타이틀과, 애써 정리한 예상답안을 우리에게 아까움 없이 나누어주는 그 모습에 감격하여, 나는 그녀에게 ‘메시아’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녀 덕분에 벼락치기임에도 불구하고 첫 시험은 그럭저럭 치를 수 있었다.  
그렇게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2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총 4차례에 걸친 시험 때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애써 정리한 파일을 아까워하지 않고 나누어주었는데, 어째선지 처음에는 그녀의 은혜에 매우 감사하던 우리들도, 점점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생각하게 되었다.

2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는, 그녀와 같은 수업을 듣는 한 남자애가, ‘시험이 곧 인데 언제 보내 줄거냐. 빨리 보내 달라’며 그녀를 독촉하기까지 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이들은 스스로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조금 있으면 그녀가 대신 해줄 것을 애써 하려 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랬다. ‘진짜 고맙다’며 밥을 사거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듯 당당하게 그녀에게 정리한 파일을 요구하는 친구들을 마음속으로 비난하면서, 나는 저애들과는 달라, 나는 적어도 고마움을 알잖아? 하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사실 그 ‘고맙다’는 것도 아쉬운 사람의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내가 3학년이 되고 난 뒤, 직접 그녀와 같은 입장이 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진정으로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정말 그 애의 호의를 당연한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면, 그 애와 겹치는 수업은 ‘당연한 듯’ 스스로 정리하지 않고 그녀가 메일을 보내줄 때까지 기다릴 리 없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내가 은연중에 그녀의 호의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큰 증거 중에 하나는, 1학년 2학기의 성적표가, ‘내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녀 덕분에 이 정도라도 받을 수 있었다, 가 아니라. 온전히 내가 열심히 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파일을 받을 때 잠깐, 고맙다며 밥을 사거나 하는 것으로, 내 ‘권리’에 대한 ‘의무’를 다 한 것이라 은연중에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학기 기말고사부터는, 더 이상 파일을 나눠주지 않았다. 자신이 베푸는 호의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권리라는 듯 당당하게 요구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너무 괴로웠던 모양이다. 그녀만 믿고 있던 아이들은 부랴부랴 정리를 해야 했지만, 아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했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은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정리한 파일을 ‘치사하게’ 보내주지 않는다고 툴툴거렸다. 그녀의 예상답안 공급이 중단된 이후로, 친구들은 예상답안을 스스로 만들거나, 혹은 시험에 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사실 이게 당연한 거다. 스스로 만든 예상답안이 없으면 시험에 망하는 게 당연한 건데, 지금껏 그녀의 호의 덕분에 그런 상황을 모면해 왔던 것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호의를 ‘그 정도’로 평가하지 않았고, 그래서 제대로 감사하지 않았다. 그 호의가 거둬지고 나서야 그 고마움을 깨닫는 모습이 어리석고 한심했다.

그녀가 호의를 베풀기를 중단하는 바람에 모두들 할 일이 더 많아졌지만 (물론 이쪽이 당연한 거다) 나는 내 한심함을 돌아보며, 그녀가 지금이라도 그런 식의 호의를 그만두길 참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도움이 없어도 시험기간은 계속해서 다가왔다. 나는 시험에 망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답안을 정리하는 편을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 나 역시 내가 정리한 파일을 친한 친구 몇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한명이 뻔뻔하게도 자신의 권리인양 나에게 마감기한을 정하고 독촉하기 시작했다. 내가 답안지를 나눠준 친구는 기껏해야 두세 명인지라, 그 한명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고 해서, 괘씸하긴 해도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제야 그녀가 그 당시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을지 알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호의에 정말 제대로 감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려면, 내가 그 사람의 호의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막연하게 ‘고맙다’ 하고 말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 그 호의에 감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베푸는 호의가 없었다면, 나는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면 쉽다.

사람은 잃기 전에는 그 가치를 잘 모르는 어리석은 생물이다. 친구가 내게 베푸는 호의가 없었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부모님의, 선생님의, 친구의, 애인의 호의가 없었다면? 그들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베풀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본다면, 감히 내가 그 호의에 대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떠올리는 ‘감사’는 막연하게 ‘고맙다’고 생각하거나,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지 않을까. 호의가 계속된다고 그것을 권리로 여기지 말자. 호의가 계속되면, 더욱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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