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1.

사랑은 ‘이성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나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아마도 확실한 이성애자일 것이다. 작년 말, 국립국어원이 사랑에 대한 정의를 ‘어떤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으로 수정했다. ‘이성’이 ‘상대’로 변함에 따라, 연인이나 애정, 애인, 연애 등의 단어의 정의에 포함되어 있던 ‘남녀’도 모두 ‘두 사람’으로 수정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이만큼 많이 변화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미디어에서도 동성애를 소재로 다루는 경우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조명한 경우도 있고 적게는 동성애 캐릭터가 꽤 비중 있는 조연급으로 얼굴을 비추기도 하는 등, 동성애 코드는 이제 우리들에게 크게 낯설지 않은 소재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여전히 동성애를 끔찍하게 혐오하는 포비아들은 존재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대중들은 나와 상관만 없다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까지는 마음을 연 듯하다.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면 비윤리적이거나 나쁘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와 비교한다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나 역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내 가족이, 내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라며 커밍아웃(Coming out.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하는 것)을 해온다면 그때도 ‘그럴 수 있겠거니’ 하고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의 내 표정이 어떨 것인지 잘 상상이 안 된다. 단 한사람도, 내게 그런 고백을 해온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아는 한 모두 이성애자거나, 이성애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성애자의 인구수가 전체인구의 약 7%라는 보고(물론 이 수치는 거의 추측성일 뿐 그다지 정확하지 못하다. 동성애자들은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로 성정체성을 드러내기를 꺼리므로 정확한 집계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에 따르면 적어도 100명당 7명꼴이라는 소린데 사실 그보다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인터넷 상의 동성애 커뮤니티의 회원 수만 해도 한 사이트만 몇 천(많게는 만 자리도 있다)씩 되는데, 이런 커뮤니티가 또 수십 개, 비공개 커뮤니티가 또 수십 개가 되니 중복 가입한 회원 수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학교 내 한 비공개 동성애 커뮤니티 회원이 몇 백. 호기심에 가입한 이성애자의 수를 넉넉하게 절반으로 잡는다 해도 세 자리수의 학생들이 동성애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얼굴 아는 동성애자가 하나도 없다는 건, 아직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사회의 인식이 많이 변했다지만, 아직 갈 길은 까마득하다. 예전처럼 ‘호모’라며 손가락질하며 경멸하는 시선이야 많이 줄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자와 동등하게 대접받는 시대가 오려면 아직 한참, 아주 한참 멀고멀었다. 그나마 예전에 비해 ‘동성애’ 자체가 많이 조명 받고, 양지로 나오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희망을 품어보는 수밖에. 한 포털에서는 예전부터 ‘동성애’를 다루는 작가들을 꾸준히 포털작가로 채용해오고 있다. 그들의 작품은 동성애자 자체를 다루거나,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다루거나,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룬다. 이 포털이 논란을 바라고 이런 주제를 다뤄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런 작품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으로 접근하여 조곤조곤 풀어내는 그들의 이야기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조금씩 불식시켜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인 것 같다. 동성애는 무거운 소재다. 동성애가 아직 무거운 소재라는 것이 슬플 수도 있는 일이지만, 농담처럼 시시덕거리며 등장하는 게이 소재나 드라마 속 동성애자 캐릭터 등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동성애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확실히 전에 비해 동성애가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진지하게 동성애에 대해 생각하는 자세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동성애는 나쁜 것인가. 나쁘지 않은데 장려되지 않는 것인가. 장려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닐 수 있는가. 

2.
얼마 전부터 조금 의아한 작품이 포털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그저 작품을 게시하는 보통의 누리꾼이 아니라 포털의 녹(?)을 먹는 작가의 작품이다. 딱히 ‘동성애 커플의 일상’을 다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표현력이 좋은 편도, 작품성이 뛰어난 편도 아닌지라 포털 정식 작가를 꿈꾸며 날고 기는 수많은 작가들이 하고 많은데도, 굳이 이 작품을 골랐던 까닭이 무엇인지 와 닿지 않았다. 동성애를 소재로 다루는 작품들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작품 이전에 벌써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포털이 동성애를 다루는 작품을 고를 때는 꽤 신중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완연하게 동성애를 옹호하는 작품을 고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작품이 있기 전까지는 사회의 시선을 그저 조명하면서, 이것이 틀리다 아니다 하는 목소리는 거의 내지 않는, 그러니까, ‘이들 역시 사람이고, 그런 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은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다’ 정도의 완곡한 주제표현이 대부분이었다. 계속 보고 있다 보면 이 작품이 ‘동성애’를 다루던 작품인 것을 잊게 만들 정도로 완곡한, 그런 작품들. 그러던 중 어떤 판단에서였는지, ‘우리들은 틀리지 않았다’는 동성애자 커플의 일상에 대한 작품이 포털에 정식으로 채용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동성애가 나쁜 게 아니다’ 주장해오는(그것도 심지어 ‘동성애자’ 당사자의 입에서 말이다) 작품 앞에서 일부는 역시나 작품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비난이 쏟아졌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의 표현력이 아직 아마추어스러운 부분이 없잖아 있었던 터라, 가뜩이나 색안경 끼고 꼬투리 잡으려 달려드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그다지 편견이 없는 독자들이 보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표현이 종종 등장했다. 한번은 자신의 어머니의 추억 속 친한 동성친구분과의 우정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랑인 것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내가 볼 때는 ‘정작 본인이 모른다 하더라도 동성에게 연애감정(호감)을 느끼고 있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단정지어왔기 때문에 이 감정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만, 어쨌거나 이성애자인 어머니의 추억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조금 이상한 표현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배제하고 이성애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감정을 단정 짓거나 할 때 불쾌감이 드는 것처럼, 이성애자인 사람들 간의 우정을 동성애자의 시각에 치우쳐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불쾌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많이 지적 받았다. 이성애자들에게 열린 시야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동성애자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이렇게 여러모로 부족함도 많고 논란도 많은 작품이었지만, 연재회수가 거듭되어가면서 일부 누리꾼들은 작품을 비난하거나 아예 외면하기도 하고, 또 일부 누리꾼들은 그 속에서 작품의 매력을 발견해냈다. 많은 이들이 떠나가긴 했지만, 고정적인 독자층이 생긴 것이다. 물론 다른 작품에 비해서 악성 댓글을 일삼는 독자도 그 고정층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약간은 거친 작품 속 그들의 일상에서, 사람들은 어떤 ‘공감’을 발견한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일상이 이성애자의 삶과 완전히 다른 것만은 아니라는 것. 예를 들면 동성애자 커플이 서로를 질투하는 이야기는, 사실 동성애자 커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커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우리와 비슷한 부분부터 그들의 삶에 공감하다보면, 차츰 우리는 모르는 그들의 삶의 부분 역시 느끼고, 그들의 눈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회의 시선을 간접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나는 사실 그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동성애 소재는 사실 미묘한 부분도, 오해받고 있는 부분도 많은 터라, (물론 나 역시 편견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더욱 이미 굳어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자연스럽고 거부감 없이 녹여낼 수 있는 표현력도 뛰어난 작가가 다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통해 전에 없던 거부감이 생겼다는 독자(그게 과연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의 댓글도 본 적이 있다. 최근 이 작품의 작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주제는 이 작품을 청소년의 접근이 자유로운 ‘전체이용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삶에 공감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조금씩 없애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아직 자신의 성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청소년들이 이런 작품을 접했을 때 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작가는, ‘동성애자가 이성애를 다루는 작품을 본다고 해서 이성애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어떤 작품의 영향을 받아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설사 어떤 청소년이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한들 그것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인데 문제될 것이 무엇인가’ 하는 태도를 보였다. 작가의 생각을 접한 나는, 솔직히, 서늘했다. 나는 어느 쪽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는 구경꾼에 불과하지만, 일단 ‘문제될 것이 없다’는 그 말은 당장 무책임하다고 생각되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겠지만 너무 날것 그 자체였다. 알고 있다. 동성애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은 아직 그렇지 않다. 나쁘지는 않지만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때문에 ‘나쁘지 않은’, 그렇지만 ‘힘든’ 길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건 스스로 신중하게 고민하고 선택한 결과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은 아직 무른 찰흙과 같아서, 아직 본인의 틀이라는 것이 없는 상태다. 작가 주장처럼, 동성애자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동성애자라는 설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동성애가 된다는 설도 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평등하게 대우해주지 않는데, 동성애자에 가치관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청소년들의 의식을 조금이라도 바꿔 놓는다면, 아무래도 작가 스스로도 조금 고민해야만 했을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어린 친구들의 접근 자체를 차단한다는 발상도 썩 동감하지는 못하겠다. 동성애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그것도 불가피하게, 마치 운명처럼) 그것을 쉬쉬하고 금기시하는 것은 옳은 대처가 아니다. 동성애는 나쁘지 않다. 설령 일부가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일부일 뿐, 그로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성소수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은 사회적 약자로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에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해가 되니 숨기라’는 발상은 이러한 과거가 아직도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4.
동성애를 다룬 콘텐츠라는 이유만으로 접근을 제한해야한다는 의견도, 그렇다고 그가 모든 연령에게 ‘적합하다’는 의견에도 동의하지 못하겠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민망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사실, 결론 같은 걸 도출해 낼 만큼 내 생각이,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저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와 ‘너희는 틀렸다’가 큰소리로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우리는 아직 나눠야할 이야기가 많다. 한쪽이 맞다고, 한쪽만의 시선으로 목소리만 높여서는, 해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눠야 한다. 서툴겠지만, 그래서 가끔 다툼도 있겠지만, 우리는 대화를 나눠야한다. 대화로 서로를 이해해야한다. 성소수자들도 당연하게 자신들의 인권을 누릴 수 있는 때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나쁜 일로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길 희망한다. 어린 친구들이 다양한 삶을 접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 그것이 ‘해’가 되는 일로 여겨지지 않도록.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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