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관련 법안 줄줄이 ‘입법화’

재계에 경제민주화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오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를 담은 하도급법 개정안이 지난달 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됨에 따라 경제민주화 관련 국회입법화의 물꼬가 트였다. 지난해 총선과 대선 주요 화두로 부각된 경제민주화 법안이 현실로 다가오자 재계의 긴장감도 한층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언했던 ‘경제민주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아직 첫걸음일 뿐이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5억원 이상 상장사 임원의 개별 연봉 공개 등은 신호탄에 불과하다. 기업들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본격적인 경제민주화 법안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대기업의 일감몰아주기 규제와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 분리), 재벌 총수의 횡령 및 배임에 대한 형량 강화 법안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인 일감몰아주기 규제와 관련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6월 국회에 상정될 가능성이 크다.

정무위 계류 중인 개정안 가운데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30%를 넘는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면 명확한 증거가 없이도 총수가 관여한 것으로 보고 처벌하는 조항과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입증 책임을 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선 여야가 이견이 있는 상황이다.

‘최고 무기징역형’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이 보류된다고 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큰 이견을 보이지 않는 조항만으로도 재계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감을 몰아준 기업은 물론 일감을 받은 계열사에도 관련 매출의 최대 5%까지 과징금을 물리도록 하는 조항과 부당내부거래의 판단 범위 확대, 통행세(거래상 아무런 역할이 없는 특수관계인을 매개로 거래를 하는 행위) 관행 처벌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여야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전속고발권 폐지와 편의점 등 프랜차이즈 본부의 불공정 거래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가맹사업법 개정안, 국세청이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금융거래정보를 활용 수 있는 범위를 확대하는 FIU법 개정안 등도 6월 임시국회 처리가 유력하다.
현재 이 법안은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한 뒤 세부 내용에 대한 여야간 입장차로 전체회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지만, 기본 방향에 대해선 접점이 모아져 있다.

금산분리 법안 역시 6월 임시국회에서 논의가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여야는 6인협의체를 통해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지분 한도를 9%에서 4%로 축소하는 은행법 개정안과 ‘금융지주회사법 개정’ 처리에 합의했다. 또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강화하고 비금융 계열사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등 금산분리 법안도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은행과 저축은행에만 적용되는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보험사에도 적용하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주목을 받고 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금융위원회가 심사를 통해 대주주가 적격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해당 금융사의 대주주 의결권이 제한되고, 6개월 내에 지분을 팔아야 한다.

이 밖에도 횡령 및 배임에 대한 재벌 총수의 형량을 높이는 특가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개정안 가운데는 횡령, 배임액이 300억원 이상일 때 최고 무기징역형에 처하게 하는 등 처벌을 한층 강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같은 경제민주화 법안에 대한 변수로는 새누리당 일각의 신중론이 언급된다. 이 달 중순경에 있을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 결과에 따라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한 기류가 달라질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경제민주화 관련 법률안의 경우 일부 상임위원회에서 지나치게 과도한 부분은 완화를 했고, 해석상 문제의 소지 있는 것은 분명히 하는 절차를 밟았다"며 "그것이 충분하지 못하면 6월 심의로 넘겼다"고 말했다.

재벌 광고사들 ‘모두 비상장’

재계에 대한 실질적인 압박은 ‘광고’ 쪽에서 시작되는 분위기다.
한국 재벌은 외국 대기업과 달리 대부분 광고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광고를 대표적인 일감 몰아주기 분야로 지목할 정도로 재벌 계열 광고사는 모그룹의 도움을 받아 쉬운 영업활동을 해 왔다.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광고대행업협동조합 등의 자료에 따르면 성그룹 계열 제일기획은 그룹 계열사 매출 비중이 전체 매출의 66%에 이른다. 이 밖에 엘베스트(LG) 74%, 한컴(한화) 66%, 이노션(현대자동차) 48% 등으로 매출의 상당 부분이 계열사 물량이다.

재벌 계열이 아닌 일반 광고회사는 광고를 따내기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대기업 계열 광고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 대부분 수의계약으로 계열사 광고를 따온다. 적용되는 단가도 다르다.
재벌 계열사가 아닌 일반 독립 광고회사가 재벌 계열사 광고를 수주할 경우 일부 광고는 무료로 서비스해야 한다는 게 관계자의 말이다. 이른바 ‘통행세’ 관행도 있다. 별다른 역할이 없는 재벌 계열사나 관계자를 중간에 끼워넣어 그만큼 수수료 수입을 챙기게 하는 것이다.

국내 재벌 계열 광고사는 대주주 또는 계열사 지분이 전체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 이노션은 정몽구 회장 부자 등 총수 일가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롯데 계열의 대홍기획은 롯데쇼핑 등 계열사 지분이 90%에 이른다.

제일기획을 제외하면 재벌 계열 광고사들은 모두 비상장사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광고사 수입 대부분이 총수 일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구조인 셈이다.

지난해 공정위는 광고 분야 상위 4개 업체와 총수 지분이 높은 업체 등을 상대로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실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광고 업무의 특성상 정상 가격 산정이 일감 몰아주기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박 대통령의 구체적인 언급까지 나온 상태여서 공정위는 광고업계의 일감 몰아주기를 근절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현대차그룹은 광고 분야 내부거래 일감의 상당 부분을 중소기업에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해외사업’ 진출에 주력

이처럼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압박이 현실화되자 그룹들의 ‘해외로’ 움직임도 감지된다.
약속이나 한 듯 그룹 계열사들이 해외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그룹 내 계열사 간 거래비중을 낮춰 일감몰아주기를 한다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삼성 계열사들의 보안업무를 맡아 내부거래 비중이 높은 편인 삼성에스원은 해외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할 인력을 뽑기 위해 삼성 채용 홈페이지에 공고를 냈다.

해외 사업을 위해 전문 인력을 뽑는 것은 지난해 12월과 1월에 이어 세 번째다. 에스원은 해외 원전, 공항, 빌딩, 병원 등지의 보안업무를 맡기 위해 수주활동 중이다.

삼성에버랜드는 세계 최대 급식기업인 영국 컴파스를 벤치마킹해 해외 사업 확대를 추진 중이다. 중국을 시작으로 급식사업의 해외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중국의 위탁 급식시장 규모는 7조~8조원 규모로, 중국 경제가 발전할수록 관련 시장이 급성장할 것이란 분석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이노션은 그룹의 광고 의존도를 줄이는 대신 해외에서 현지법인을 중심으로 그룹 외 물량 확보에 나선다. 전 세계 16개국, 20개 법인을 앞세워 미국, 유럽, 호주, 인도 시장을 중심으로 해외 영업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세계 16위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도 전 세계 28개국 53개의 거점을 운영하면서 세계 시장 공략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광고회사 매키니 커뮤니케이션스, 중국의 브라보를 인수한 제일기획은 재규어, 에스티로더, 인텔, 아우디, 중국의 중신그룹, 중국이동통신 등 해외에서 60여 광고주를 영입하는 성과를 올렸다.

일감몰아주기 ‘단골’ 손님인 대기업 시스템통합(SI) 계열사들도 해외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해 총 1000억원을 들여 자체 물류 플랫폼인 ‘첼로(CELLO)’ 시스템을 개발한 삼성SDS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등지에서 현지 운송?보관 업체들과 연계한 종합 물류 서비스를 시작했다.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등의 해외행 물량뿐 아니라 두산이나 포스코 등 다른 그룹사에 첼로시스템을 공급하고 있다.

SK C&C는 2000년대 중반만 해도 50억원 정도였던 해외매출이 지난해 1200억원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불어닥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대기업들이 어떤 성적표를 받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김범석 기자 kim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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