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한 독서실의 풍경을 보고



학생은 공부를 한다. 공부를 그냥 해서는 안 된다. 잘 해야 한다. 공부를 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릴 때는 그랬다. 저학년 때는 지금 안하면 고학년 때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초등학교 성적이 곧 중학교 성적으로 이어진다고 그래서, 중학교 때는 중학교 공부가 안되면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성적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이제 시작이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진짜’ 대입전선에 뛰어들기 직전이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바로 내가 고3이니까, 그렇게 항상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라는 그 말에 떠밀리 듯 계속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더 심하단다. 유치원도 예비순번이 있고, 대입을 위한 고입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고입에 성공하기 위해 중학교 입시까지 치열해지고 있단다.

지방, 그것도 ‘촌’이 붙는 작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내게는, 사실 이런 교육열이 꽤 생경하다. 아무리 지방의 외진 곳이라 한들 영화 속의 동막골도 아니고 전국의 교육열이 아주 빗겨가기야 했겠는가. 우리 동네의 내 또래 애들도 어릴 때부터 학원 수개와 학습지에 시달리느라, 종일 흙 놀이 하는 완전히 천진한 촌아이들로 자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고무줄놀이니 말뚝 박기니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던 어릴 적 추억이 가장 많은 것을 보면,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교육열에 들들 볶인 불쌍한 옥수수 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때의 서울 애들만큼 여러 가지를 다방면으로 익히느라 피를 말린 것도 아니고, 배우는 내용들도 최신 유행에 비하면 확실히 한 두 템포씩 느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내 유년시절이 수험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얼마나 팍팍한 사람일 것인가. 들들 볶이는 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아마 지금도 대기업 취직 못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아는 불쌍한 팝콘이 되었겠지 싶다.

인터넷에 한 독서실의 풍경이 올라왔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대단히 끔찍했다. 독서실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청춘들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뭐랄까, 청춘도 청춘 나름이지. 독서실에 무지막지한 책을 쌓아놓고, 아니 쌓아놓다 못해 아주 책꽂이를 가져다 놓고 그걸 가벽 삼아 독서실 책상에 스스로 갇혀 있는 사진 속 뒤통수들이, 고시생도 아니요, 고3 수험생도 아니요, 아니 하다못해 중학생도 아니요, 다름 아닌 초등학생이란다, 초등학생!

화장실은 어떻게 가는 거지 싶을 정도로, 옴짝 달싹할 수도 없게 책꽂이들로 온통 막혀있는 독서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제히 머리를 파묻고 있는 어린 소녀들의 귀여운 포니테일. 이게 얼마나 이상한 장면인가! 어린 어깨와 목덜미 위로 깡총한 포니테일은 눈깔사탕 같은 분홍색 방울 끈으로 묶여있다. 뭔가 방울 위에 공주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로 봐선, 딱 초등학생 취향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런 애들이 수염 덥수룩한 고시생이나 보여줄 만한 포스를 풍기며 딱 책상에 파묻혀 있는 걸 보니 어째 소름이 오소소한다.

그중 한 아이에게 인터뷰를 한 내용이 독서실 사진 아래에 이어졌다. 정말 어리게 생긴 여자애가, 아니 실제로 어린 여자애겠지. 초등학생이니까. 아무리 많이 잡아도 열셋이다. 으, 나는 그 나이 때 만화 세일러문 주제가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는데. 어쨌든 그런 어린애가,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거예요?”하는 질문에 (질문도 굉장히 순하게 물어본다. 어린이 인터뷰하는 특유의 톤으로. 김철수 어린이는 엄마가 좋아요 아빠가 좋아요? 하는 딱 그 톤이다.)  “좋은 대학 가려면 어쩔 수 없어요” 하고 대답한다. 고3도 아니고, 초등학생이 할 대답인가? 설상가상 “좋은 대학을 왜 가야해요?” 하는 물음에 “그래야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좋은 직업이 있어야 돈을 많이 벌죠” 약간의 웃음기마저 보이면서 막힘없이 대답한다.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 인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 말일까? 마치 다 큰 숙녀의 표정을 지으며 인위적으로 웃으며 노래하는 북한 소녀를 보는 것처럼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아이들의 생각은, 어른들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지 않다. 원래 그게 정상이다. 어른들처럼 생각하는 아이라는 건, 뭔가 비정상인 일이다. 아이들의 생각은 어른들을 당황시켜야 정상이다. 어른들에게 당연한 것이, 어린이에겐 어느 하나 당연한 것이 없고, 어른들에겐 쓸모없는 것이, 어린이에겐 굉장한 의미로 여겨질 수도 있다.

어린이라면 어느 정도 허무맹랑하고, 천진하게 용감한, 그런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장래희망이 대통령, 우주비행사, 하다못해 인어공주나 의미도 알 수 없는 ‘공룡’ 같은 거래도 (실제로 저학년때 내 짝이 ‘공룡’을 장래희망으로 적어냈다가 선생님께서 다른 걸 적어오라해서 뒷자리 남자애 것을 커닝해서 냈다) ‘생계가 걱정 없는 직업’ 같은 걸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정상이란 소리다.

나는 어릴 때 내가 의사든 뭐든 다 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요즘 애들은 그 나이에 취업을 걱정하고 있다니 참 어이가 없다. 아이들은 가만히 나둬도 꿈꾸는 존재들인데, 아이들이 꿈을 꾸지 못한다니. 동심이 없는 아이들. 이것은 필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소름이 끼쳐야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아야만 한다.

북한 어린이들이 선보이는 무대들을 보고 있으면 웃고 있는 아이들의 잘 연습된 모습들이 슬프거나 거북하게 다가왔던 적 한번쯤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소녀가 미스코리아처럼 웃으면서 고개와 손을 까딱까딱 간드러지는 기교로 노래를 부르면,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아이는 절대로 저렇게 노래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훈련’시켜야만, 아이는 노래의 아이다움을 버리고, 어른처럼 노래한다. 아이는 아이다운 것이 아이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보는 우리에게도 좋다.

예닐곱 살 먹은 어린애가 어른 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하면, 그 애의 남은 평생(거의 자신의 수명 전체와 맞먹는 시간이라 남은 평생이란 말이 어색하다)동안 아이답게 웃을 수 있을 기회는 영원히 없어진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아이에게 그것을 강요했다는 것이 바로 그 거북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다. 그것은 일종의 학대다.

아이들의 동심, 어린이다운 그 마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산타가 있다고 믿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기꺼이 진짜 산타가 되어주는 것처럼,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려 노력해야 아이들은 충분히 어린이답게, 어린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서,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다. 아이가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해야만 아이는 제대로 된 자아를 확립할 수 있고, 그래야만 삶의 무게 중심을 똑바로 잡는 어른이 될 수 있다.

행복하고 보람된 삶의 주인이 되려면, 어린 시절에는 어린이답게 지내야만 한다. 어른들은 그런 어린이들을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 하물며 자신의 자식이다. 내 아이가 불행한 삶을 살길 원하는 부모는 하나도 없을 거다. 내 아이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은 다 똑같다. 아이가 안정된 직장을 얻고 모자람 없는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삶을 일찍부터 준비하게끔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책상에 가두고, 어째서 네가 여기 있어야만 하는지, 왜 공부를 해야만 하는지 설명해줬을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들이 다 이렇게 하는데 내 자식만 방치하면 내 아이의 삶을 망쳐 버릴까봐. 경쟁에서 도태된 불행한 삶을 살게 될까봐.

하지만 그것은 단언컨대 ‘학대’다. 내 아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학대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기의 어린이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빼앗고, 어른의 잣대를 강요하는 것이다. 학대를 받으면서, 그에 적응하며 자란 아이는 결코 행복한 삶을 스스로 찾는 어른으로 자랄 수 없다. 항상 이유 없는 목표만 있는 삶을 산다. 아이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세뇌되면서 자란다. 좋은 대학에 가면 뭐가 좋은지, 좋은 직업을 얻으면 뭐가 좋은지, 돈을 많이 벌면, 명예를 얻으면 뭐가 좋은지, 이 꼬리를 무는 질문의 끝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다. 허무한 목표를 좇다가 죽는 그런 삶이다.

그렇게 결국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도 끝내 행복할 수 없는 삶과, 스스로 결정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또 거기서 행복과 존재이유를 찾는 삶 중 어떤 삶을 살길 바라는가? 정말 내 아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아이의 자아를 죽이는 학대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 독서실에 가둬져 햇빛도 물도 없이 시들어가는 새싹들이, 스스로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웃으면서 ‘그래야 좋은데 취직하지요’라고 말하는 잔혹한 일이, 이제는 정말 그만 일어나야 한다.

경쟁심과 욕심만 있는 세상으로 아이들을 내몰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짜 현실에는 경쟁과 끝없는 욕심으로 뒤덮여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런 현실에서 굳건하게 중심을 잡기위해선 어릴 때부터 경쟁을 조기교육 시키는 게 답이 아니다. 우선 냉혹한 현실에서도 행복을 찾고 무너지지 않는 자아를 지킬 만큼 튼튼한 사람으로 키우는 게 우선이다. 햇빛도 쨍쨍 많이 받고 물도 영양도 듬뿍 먹고 자란 새싹은, 키만 키우려고 멀대 같이 노랗게 자랐던 그 어떤 새싹들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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