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3회>-독일 베를린 2편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베를린대성당에서 바라본 시가지의 모습

지하철역에 닿은 뒤 24시간 동안 여러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6.30유로짜리 종일권을 끊었다. 제약 없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기 위해서였다.

처음 간 곳은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이다. 프리드리히 1세가 왕비 소피 샤를로 텐을 위해 지은 여름 별궁이다. 1695년에 첫 삽을 뜬 이래 백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증축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 되었다. 바로크 양식이다. 궁내부에서는 여러 종류의 중국 도자기, 왕관 등을 접할 수 있다.

운치 있는 궁전 바깥의 정원을 감상하는데 뼛속으로 찬기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오뉴월에 찬기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오리털 파카라도 가져올걸!’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다 보니 어느새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렇다고 베를린에서 예정된 짧은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

오락가락한 비 때문에 왠지 모르게 음습한 느낌이 물씬한 공원을 뚫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번화가인 쿠담 거리로 가서 카이저빌헬름교회를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역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기다랗게 자전거 도로가 설치돼 있었다. 곳곳이 그러했다. 시민들은 자동차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끊어짐 없이 이어진 자전거 전용 도로 위를 안전하게 내달렸다.

거리에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나온 큰 개들이 넘쳐났다. 엄청난 덩치 때문에 어쩔 때는 그들의 존재가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은 프리드리히 1세가 왕비 소피 샤를로 텐을 위해 지은 여름 별궁이다. 도자기, 왕관 등이 전시돼있다.

한참을 걷고 걸어 드디어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표를 끊고 서둘러 객차에 올랐다. 베를린 지하철의 풍경은 빈자리를 맡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눈치작전을 펴는 우리 내 객차 안과는 사뭇 달랐다. 목표물인 ‘빈자리’가 레이더망에 포착되면 LTE(엘티이)급 속도로 후다닥 내달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마는 익숙한 장면 말이다. 예전에는 가방을 던져 빈자리를 차지하고야 마는 낯 두꺼운 이들도 허다했는데…. 그런데 유럽에서는 빈자리를 놔두고 서서가는 이들이 참으로 많았다. 덕분에 필자는 여유롭게 좋은 자리에 앉아갈수가 있었다.

객차 안,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의 얼굴에 노곤한 삶의 빛이 역력했다. 그늘진 표정을 대변하듯 행색은 몹시 남루했다. 체취로 느껴지는 고된 일상에 왠지 모르게 가슴 한 편이 짠했다. “통일을 이룬 뒤에도 동독 지역 거주민 중 많은 이들이 여전히 고된 삶을 살고 있다”는 민박집 주인의 말이 스쳤다. 한반도가 처한 현실 때문에, 주인이 하는 말 하나 하나를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베를린 지하철에서 마주한 풍경과 훗날 들린 루마니아는 오래도록 이런 느낌이 각인되었다.

지하철을 벗어나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드디어 카이저빌헬름 교회를 찾았다. 교회는 빌헬름 1세의 영화를 기념하기 위해 1891년에 지은 신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인해 간신히 첨탑과 예배당 입구만이 남았을 뿐이다. 깨지고 까맣게 변한 꼭대기 부근의 모양 때문에 ‘썩은 치아’라고 불린다.

교회가 폭격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는 이유는 전쟁의 참혹함과 아픔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상흔을 통해 전쟁의 주범이란 과오를 떠올리며 다시는 같은 만행을 저지르지 말자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 제2차 세계대전에 앞서 유럽 교통의 요지 역할을 했던 포츠담 광장. 현재는 독특한 건축물이 들어선 최첨단 장소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전쟁 피해국의 트라우마를 부인할 수 없는 개인으로서 독일의 태도를 보며 마음 한편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전쟁 발발국으로서 한 나라는 인정과 반성을, 또 다른 나라는 부정과 뻔뻔함을. 두 나라가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하….’

해가 반짝 비치는가 싶더니 어느 새 또 다시 날씨가 쌀쌀해졌다. 살갗에 축축한 돌기가 피어오르는 어스름한 오후였다.

또 한 번 지하철을 잡아타고 포츠담 광장으로 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앞서 유럽 교통의 요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은 독특한 건축물이 들어선 최첨단 장소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세계 유명한 건축가들이 만든 독창적인 건물을 비집고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과 요란하게 움직이는 자동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외국 나오면 자연스레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광장 한 편에서 H자동차란 이름을 매달고 홍보 활동에 여념이 없는 우리나라 업체를 발견하고는 괜스레 반가움이 밀려왔다.

지는 해를 뒤로하고 한국식 저녁 식사가 기다리는 민박집으로 향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한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모두 그러한 것은 아니며 숙박료와 식사비가 따로 책정이 되는 경우도 많으니 예약할 때 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백화점과 쇼핑센터들이 들어선 알렉산더플라츠 역 광장. 젊은 이들로 항시 붐비는 곳이다.

숙소 문을 여니 익숙한 김치찌개와 감자조림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한 날씨 때문에 축 처진 세포들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느낌이었다. 쌀밥이란, 내게 그런 존재다. 흐흐

하, 그런데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젊은 주인의 음식 솜씨가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감자에서는 무맛이 나고 계란은 소금 맛뿐이었다. 김치는 ‘과연, 한국에 이런 음식이 있었던가’라는 생각이 들만큼 전통과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혁명적인 맛이었다. ‘덜덜덜’ 먹을수록 파격적인 맛에 점점 밥숟갈 뜨기가 겁이 났다. ‘내일은 꼭 밖에서 먹고 들어와야지!’

같은 방을 쓰는 20대 자매도 어느새 귀가해 저녁 식탁에 앉았다. 자매가 없는 필자로서는 어릴 적부터 항시 아웅다웅하는 자매들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 자매가 있는 친구들을 보면, 매일같이 투닥투닥 다투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커가면서는 서로 편이 될 일이나 힘이 되어줘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망설임 없이 앞장을 서곤 했다. 여지까지 여행을 함께 다닐 만큼 다정한 자매지간은 봤어도 형제는 못 보았다. 그런 면에서 함께 유럽 여행에 나선 20대의 자매들이 참으로 오붓해 보여 마냥 부러웠다.

서서히 하루해가 떨어져갔다. 어느 새 지하 암반수를 뚫을 기세로 바닥 깊은 곳까지 꺼지는 이색 침대에 몸을 말아 넣어야할 시간이 되었다. <베를린 3편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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