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4회-독일 베를린 3편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슈프레 강의 유람선을 타면 베를린대성당과 박물관 섬 등을 볼 수 있다.


우중충했던 전날보다 날씨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다. 가지고 온 옷들을 주섬주섬 껴입고 베를린에서 유명한 베를린대성당으로 향했다.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베를린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엄청난 폭격을 받아 여러 부분이 소실되었다. 거멓게 그을린 외관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증명하는 듯하다. 검은 벽면은 옥색 빛의 돔 지붕과 묘한 조화로움을 이루며 견고하고 고고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5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성당 내부 또한 아름답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뤄진 천정과 벽면을 수놓은 그림들이 우아하고 화려한 자태를 고고히 드러낸다. 성당 안에는 또 여러 관들이 자리해있다. 호엔촐레른가 사람들의 관이다.

성당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고 기도도 한 뒤에 돔 꼭대기로 향했다. 꼭대기에 올라 베를린 전경을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그곳까지는 270개의 계단을 밟아야만 한다.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걸으며 드디어 돔 꼭대기에 올랐다. 탁 트인 베를린 시내를 들여다보자니 묵은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베를린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느낌이었다. 빛바랜 오랜 건축물과 그 뒤로 펼쳐진 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안 어울릴듯하면서도 묘한 조화로움을 이뤘다. 시공을 초월한 고전미가 흐르는 동네다.

꼭대기에 오르니 사람들은 작은 점처럼 보였다. 베를린을 거닐면서 느꼈던 것은 미남들이 참으로 많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몹시 높은 곳에 오르니 이목구비 확인이 전혀 안되었다. ㅎㅎ


# 베를린 구 박물관은 1829년 지은 박물관이다. 박물관 섬에 있는 5개의 박물관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이다.


성당 앞에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루스트 정원이다. 넓은 벤치에 걸터앉아 음악을 들으며 잠시 사색에 빠졌다. 아직은 여행에 적응되지 않은 탓일까. 공허한 외로움이 다시금 스멀스멀 찾아왔다. 낱낱이 떨어져 있던 헛헛한 공기들이 필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휘감는 느낌이었다.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빠른 템포의 댄스곡을 틀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 광경이 이상했나. 지나가던 청년 둘이 필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히죽 거리는 것 아닌가. 기분 나쁜 히죽거림을 지적하듯 눈을 한 번 부릅떴더니 청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조용히 갈 길을 재촉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변 산책에 나섰다. 강을 끼고 들어선 노천 식당에는 식사를 즐기는 이들로 분주했다. 여러 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에 필자는 시간을 아끼려 M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때웠다. 빅맥세트를 시켰는데 그 크기에 깜짝 놀랐다. 세트 가격이 비싼 이유가 있었다. 큰 햄버거에 많은 양의 감자튀김까지. 먹다 지쳐 남은 감자를 곱게 싸들고 나왔더랬다.

강가에는 유람선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휴식을 즐기는 이들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괜스레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한쪽에서는 어떤 이들이 베를린에 들어선 것을 기념하며 도장을 찍으라고 호객했다. 여권에 찍는 도장을 흉내 낸 것인데 돈을 내고 찍는 것이었다.


#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받아 여러 부분이 소실된 베를린대성당. 검게 그을린 외관이 옥색의 돔과 묘한 조화를 이뤄 아름다움을 뽐낸다.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박물관 섬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슈프레 강에 위치한 섬 북쪽이다. 유명한 박물관들이 여러 개 자리 잡고 있어 아예 박물관 섬이라고 부른다. 지난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섬에서도 유명한 페르가몬 박물관으로 향했다. 볼거리가 많다고 알려진 것만큼 입장료도 비쌌다. 자그마치 12유로였다.
페르가몬 박물관은 1910년에 첫 삽을 뜬 이래 약 20년의 세월을 이어가며 건축되었다.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신들의 흉상과 전신상 등이다. 제우스의 재단도 눈에 띈다. 이는 헬레니즘 건축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제단에 올라가면 고대의 아크로폴리스를 느낄 수 있다.

전시품 중에는 현지에서 출토된 고대 그리스로마와 이슬람 유물 등도 방대하다. 바빌로니아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세운 ‘이슈타르 문’ 등도 유명하다. 박물관은 볼거리가 워낙 많아 꼼꼼히 둘러보자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정도다.

박물관을 빠져나와 100번 버스를 탔다. 버스가 베를린의 유명한 지역을 두루 걸치기 때문에 그야말로 ‘버스 관광 투어’가 가능하다는 귀띔을 전해들은 터였다.

버스에 앉아 차창 밖으로 펼쳐진 베를린 시내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베를린대성당 돔 꼭대기에서 들여다본 것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묘한 느낌이 반복되었다. 과거를 스쳤다가도 어느새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심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늙지 않으며 광속으로 억겁의 세월을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꽤 흥미로웠다.


# 페르가몬 박물관 안의 제우스 제단. 1910년부터 20여 년 간 지은 박물관은 박물관 섬 안에 자리하고 있다.


# 페르가몬 박물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벽면을 가득 메운 신들의 조각상을 마주한다.

넋 놓고 있다 보니 어느새 종점. 다소 외진 곳이었다. 일순간 해가 살짝 기울더니 서서히 어두움이 찾아왔다. ‘어두움’, 외지인이라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물어물어 버스를 바꾸어 타며 도심으로 접어들었다. 몇 번 오가며 익숙해진 역 알렉산더플라츠에 닿으니 불안함이 일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낮이건 밤이건 이 일대는 젊은이들이 차고 넘쳤다. 이들은 담소를 나누며 손에 든 맥주를 마셨다. 필자 역시 몹시 먹고 싶었으나, 그 놈의 역류성식도염 때문에! 유럽 가면 꼭 하고자 했던 것이 유명한 맥주를 모두 마셔보는 것이었는데 참으로 아쉬웠다.

100번 버스에서 내린 지 근 두 시간 만에 비로소 숙소에 도착했다. 비록 이틀 있었지만 꽤 익숙해진 동네에 들어서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면서 퍼뜩 드는 생각하나. ‘저녁은 먹어야겠고, 숙소 밥은 먹기 싫고!’ 게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먹고 치웠을 것 같아 새삼 밥을 차려 먹기가 미안하기도 했다. 살짝 고민한 끝에 슈퍼마켓에 들러 빵 등 요깃거리를 집어 들었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발품을 팔았더니 피로가 급속히 몰려왔다. 내일 아침이면 체코 프라하로 떠나야 한다. 드디어 국경을 넘는 것이다. 체코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몰려오는 기대감을 마음속에 하나 둘 포개며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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