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이사



이사를 앞두고, 짐이 얼마나 나올까 가늠해 보고 있자니, 희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서랍마다 빼곡한 이 세간들을 어이 다 포장한단 말인가. 아버지 차가 동원된다 하더라도 당장 답이 안 나오는 이삿짐들. 일부는 아버지 차편으로 실어 보내고, 일부는 택배로 보내야할 텐데, 무게를 초과하지 않게 하면서 최대한 적은 수의 박스로 택배를 포장할 수 있으려면 머리를 꽤나 굴려야 한다. 택배로 보내기 힘든 부피거나, 파손우려가 있는 물건들은 불가피하게 아버지 차로 옮겨야 할 것이고, 그 외에 얼마나 더 실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책상 겸 식탁으로 사용하던 테이블과 간이의자들, 연결부위가 망가진 것을 싸게 사와 나사못으로 고쳐놓은 꽤 쓸 만한 화장대 같은 것들은, 정도 꽤 들고, 아직 새 것 같아서 속이 쓰리지만 아마 여기서 중고로 싸게 팔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무료로 넘겨주고 떠나야 할 것 같다. 이곳에 옵션으로 있던 의자는 내가 부숴먹었으니까, 나중에 전 남자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이 의자도 두고 가야하겠지. 이런 것들이 괜히 아쉬워지고 그런다.






자취 세간이 뭐 대단한 게 있겠는가. 죄 중고에 합판, 내구성이 의심될 만큼 초 저렴한 조립식 가구들. 내 테이블은 의자까지 3만원인가, 4만원인가 주고사서 지금 타이핑을 하는 이 순간에도 흔들흔들, 컵 안의 물이 튀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여야만 한다. 임시 티 팍팍 나는 자취 세간들이다.

딱히 추억이 서렸다거나 할 만큼 그다지 애정 어린 가구들도 아니건만, 막상 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없던 애정도 있었던 듯 아리송한 기분이 든다. 그래, 이 화장대가 참 깔끔하니 예쁜데 말이야. 접이식 간이의자는 어디 넣어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 가지고 갈까? 다시 곰곰 생각해보면, 그 ‘쓸모’를 찾기 전에 이 의자들의 수명이 다해버리고 말 것이란 걸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엉덩이도 아프구, 오래앉아 있긴 영 부적절한 의자의 쓸모가 있을지 의문이다. 아니 그 전에 포화상태의 짐에 저 커다란(아무리 접이식이라 해도)의자들이 포함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안 되겠지. 내일쯤 학생 커뮤니티에 간이의자와 테이블, 기타 이삿짐 탈락 세간들을 찍어 올려야겠다. 안녕. 다른 주인 만나서 잘살아.

제법 무성하게 자란 내 화분들은 어쩌나, 아버지 차에 화분들도 실을 공간이 있을까. 고향집에 두면 볕이 좋아 튼튼하게 자랄 텐데. 그중 가장 큰 애는 이 방에 처음 왔었을 때 내 손바닥보다 작았었다. 가느다란 줄기는 실처럼 휘청거렸고, 그때마다 거기 매달린 앙증맞은 이파리들은 낭창거리면서 맺힌 물방울을 떨궈냈었다. 그간 분갈이도 두 번이나 하고, 제법 ‘큰 화분’이 된 녀석은 지금 태어나서 처음 맞는 겨울에 얼떨떨한 상태다. 이 녀석만큼은 고속버스에 안고 타게 되더라도 꼭 데려가야지, 다짐하면서 녀석의 시름시름한 이파리를 바라본다. 이 녀석이 몸집을 예닐곱 배 불린 만큼이나, 나 역시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이 방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이 원룸을 얻은 게 벌써 2012년 일이다. 식기 하나 없이 썰렁했던 때가 있었는데, 짐으로 골머리를 썩을 만큼, 집도 식물도 무성해져버렸다. 썰렁하던 이 방에, 이불하나 덜렁 펴놓고 누워서 낯선 천장을 바라보던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 아니 1년하고도 반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 방을 계약할 때의 나는 3학년이었는데, 이제 졸업이 머지않은 2014년 전기 졸업예비자다. 대학생활을 마무리 하는 시점. 갑자기 생긴 틈의 여유를 도무지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이 미처 잡히기도 전에 이사가 정해졌다.

다이어리엔 2014년을 써야하는데 자꾸만 2013년으로 잘못 써버린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작년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새해는 밝았고, 새로운 곳으로 가야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 좋은 일이다. 성가시긴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한 행운이다.

이삿짐을 싸는 동안은, 내가 이사 갈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고, 그 곳이 어떤 곳인지도 알 수 없고, 그곳에서 내가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당장 그곳에서 혹시 간이의자의 쓰임이 있을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도, 모든 일의 마무리와 시작을 이사로 하게 되어 감사하다.

일부 버리고, 일부 남기고, 일부 가져가는 동안 나는 어떤 정리와 마무리를 완연하게 느끼게 된다. 새해 첫날로부터 몇 주가 흘렀다. 그간 나는 숱하게 2013년을 습관적으로 끄집어내었다. 다이어리의 덕지덕지 붙은 수정테이프로 증명되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작년의 습관. 새해는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은 오늘로, 딱히 어제와 다를 것도 없이 그렇게 다가왔고, 새해 첫 해를 보는 의식으로 머릿속에 새로운 시작을 주입해 보아도, 오랜 습관은 그렇게 쉬이 덧입혀지지 않는다.

이사는 훌륭한 리셋이 된다. 당장 내가 지닌 모든 것들을 안보이던 곳에서 보이는 곳으로 와르르 쏟아 놓고, 하나씩 분류를 해야 한다. 그 과정은 꽤 성가시고, 제법 고된 노동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바라보면, 내가 그간 어떻게 살았었는지, 그리고 새로운 시작 앞에 그 중에서도 무엇을 가져가야 할 것인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정리할 작년과, 내가 가져가야 할 작년. 그 귀찮은 작업을 몸으로, 머리로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면, 비로소 마무리를 의식 겉 층이 아니라 습관의 깊은 층까지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내 작은 방 하나에는, 정리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이 있다. 어떻게 품고 살았나 싶은 것들도 있고, 정리하는데 약간은 용기가 필요한 것들도 있다. 이것들을 다 버리고 나눠도 아마 내가 짊어지고 갈 것들은 어마어마하게 많겠지만, 그래도 몇 개의 박스에 내가 가진 모든 걸 쑤셔 넣고 텅 빈 집에 앉아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약간은 후련한 기분이 든다.

한 곳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히 이것저것 짐이 늘어난다. 그렇게 커다래진 몸집을 줄이는 것도, 굉장히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쥐고 있는 것은 쉬우나, 버리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될 만큼 큰 사람이 못 되니, 이것저것 잡다한 것으로 몸집이라도 부풀려 놓아야 안심이 된다.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가진 게 많다면, 가진 게 없는 것보다 넉넉하고, 또한 편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둔한 것도 사실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포맷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컴퓨터가 극도로 버벅 거리지 않는 이상은 포맷을 하지 않는다. 없어져버릴 즐겨찾기가 아깝고, 쓸데없이 저장해둔 이미지 파일이 아깝고, 과제하는 도중에 저장해둔 중간세이브 파일들(최종본 이전의 것들)이 아깝고 뭐 그렇다. 백업을 해두면 된다지만, 뭐랄까, 잘 생각해보면 그만큼 가치 있는 것들도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해서 늘 포맷을 미루다 보니, 요즘 내 컴퓨터는 또 부팅하는데 한참이 걸린다. 어쩜 이리 집이나, 컴퓨터나, 쓰는 사람이랑 똑같아져 가는 걸까.

나와 잡동사니 사이에는 욕심과 미련이라는 접착제로 엉겨 있다. 언젠간 쓰겠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겠지, 이걸 버리고 나면 언젠가 후회할지도 몰라. 몸집은 커다래졌는데, 딱히 기쁜 것도 아니요, 생각만큼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꺼내도 꺼내도 한참인 내 세간을 정리하면서, 아 정말 나의 집은 만사를 아무렇게나 폴더에 처박아놓은 내 컴퓨터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비움을 모르고 살았구나. 버림을 모르고 살았구나. 기름 낀 듯 일상이 굴러가지 않던 것도, 내 컴퓨터가 윈도우 바탕화면 한번 띄우는데 그렇게 윙윙대며 기를 써야하는 것도, 다 욕심이고 미련 때문이었겠지. 이렇게 싹 버리고, 포맷도 한번하고, 몸집 홀쭉하게 줄여서 새롭게 다시 시작해보련다. 묵은 살들을 정리한 것처럼 맑고 개운한 기분으로. 가뿐한 몸은 거동조차 싱그럽게 만들어 줄 것이다. 비우며 살아야겠다. 쥐고 있는 손 살며시 놓는 용기를 가져야겠다. 무엇이 더 나를 위한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하면서.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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