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예의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말이 있다. 가까운 사이에 예의를 지킨다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그 ‘예의’라는 개념 자체가 꽤 까다롭다. 예의를 지키려는 태도가 오히려 가까운 사이에서 거리감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종종 겪곤 한다. 그렇다고 막역한 사이라 무심히 넘겼다가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런 상처는 회복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예의라는 것이 꽤나 애매한 탓에 많은 관계들이 오늘도 문제에 빠지고 있다. 예의는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예의인걸까.

예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예의의 바탕이, 근간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예의라는 것이 어째서 생기게 되었는가를 떠올려보면 조금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초에 예의라는 게 없던 세상을 상상해본다. 원시시대도 좋고, 차마 인간이라 부르기 힘들 털북숭이를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예의 비슷한 것도 없는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을 이기적이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의외로 꽤 불편했을 거다. 나 좋자고 하는 행동들이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야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도 누군가에겐 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만 것이다.

이기적인 행동이 결국 내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예의라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이기적인 생각은 결국엔 나에게도 독이 된다는 것,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를 위하는 길이다. 뭐 이 이야기엔 어떠한 근거도 없지만, 어찌되었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예의의 바탕이 된다는 걸 알아내기엔 유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예의의 바탕이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명쾌한 사실이다. 그렇게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 허무할 정도. 하지만, 사실 오늘날의 예의의 대부분은 남을 생각하는 마음보다는, 의례적인 일이거나 질서를 위한 것인 것 같다. 물론, 의례와 질서를 위한 어떤 사회적 약속도 예의의 큰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무엇이 본질인가에 대해서는 딱히 논의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친절하긴 하지만 사실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아마 진짜 예의보다는 배려 없는 예의가 많아지기 때문이 아닐까. 예의가 제대로 된 예의가 되려면, 일단 배려가 바탕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형식과 사회적 약속이 세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예의의 시작은 배려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기본적으로 상냥하고, 가진 걸 베풀면서,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사양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을 보면 예의가 바르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예의의 꽃은 ‘사양’이라고 본다. 인사치레로 ‘아, 뭘 이런 걸 다…’ 하는 것도 충분히 좋은 문화이긴 한데, 내가 말하는 사양이란 건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진정 내 욕심과 이기보다 타인을 생각하는 것이 사양이다.

진심으로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익보다 타인을 생각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신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보다 좋은 것을 취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단순히 ‘배려’라고 말하기엔 한 단계 차원이 높은 느낌이다.

남을 생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것에 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사양이 된다. 내가 사양을 예의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런 이유다. 배려와 예의도 이러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의는 배려의 수많은 자식 중 하나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예의의 본질은 어떤 사회적 형식과 약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마음과, 더 나아가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마음에 있다고 본다. 사회 문화적인 형식은 그 다음의 부차적 일이다. 한마디로 정의 내려 보면, 예의란 자신을 진심으로 낮추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남보다 내가 높지 않으려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행동이 예의로 나타나는 거다. 

예의의 정의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 그런데 예의의 정도라는 건 사람마다, 관계마다, 문화마다, 각기 다르다. 바람직한 예의의 정도라는 것도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자신을 한 없이 낮추는 사람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니까. 그렇지만 역시 한 문장으로 정의내리긴 어렵다. 정말 그 적정함이라는 건 사람마다 관계마다 문화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차이는 일단 제쳐두고,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예의의 정도는 관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친구를 대하는 것과 부모님을 대하는 것, 스승을 대하는 것. 같을 수가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각기 그 기준이 다르다. 나는 부모님께 존댓말을 쓰지만, 어떤 집에선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가족 간에 그런 `예의`를 거부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리다 하고 볼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그냥, 예의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바람직한 정도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게 맞겠다. 다만 문제는 관계 내에서 각 구성원간의 예의의 기준치가 같지 않을 때 발생한다. 한 가족이 존댓말에 대한 의견이 동일하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는 존댓말을 쓰는 것이 옳다보고, 자식은 존댓말을 쓰면서 거리감을 느낀다면 그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누구든 친한 친구가 나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빈정 상해본적 한 번 정도는 있을 것이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나를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대부분 그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기도 어정쩡한 것이, 친구가 악의를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친구는 친해서 그런 것 같은데, 난 기분이 상해버린다. 이렇듯 내 친구는 친구 사이에 이 정도의 예의만 지키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보다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필시 난항을 겪게 될 것이다. 예의는 `나를 낮추는 것`이라 하였다. 한쪽은 무척 낮추는데 반해 한쪽은 그렇지 않다면? 한쪽은 상대방의 무례함에, 다른 한쪽은 상대방이 사사건건 트집 잡는 일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양쪽의 균형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려`가 본질이라고 본다면 예의는 단순히 형식이나 사회적 약속만이 아니다. 배려는 타인에게 상냥하고 사양하고 베푸는 그런 모든 것들인데, 관계 속에서 예의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곧 그 모든 부담들을 한쪽이 ‘더’ 짊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관계’에 대한 예의의 기준이 다른 사람들은, 그 관계를 형성하기도, 지속하기도 힘들게 되는 것 같다.

그런 갈등의 예시는 주변에 아주 많다. 이웃끼리 지켜야 하는 예의의 기준이 다른 경우도 있고, 고부갈등도 그렇고, 친구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에는(비단 오늘날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양한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선택적으로 혹은 불가피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갈등을 빚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살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차분하게 본질로 돌아가 생각해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 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직한 예의의 정도라는 건 절대적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예의에 대한 기준과 정도가 달라 발생하는 문제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예의’에 대해 단순하게 정의 내려 보았지만, 사실 예의라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가치들이 맞물린 것이다. 최대한 가지를 쳐내다 보면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핵심적인 굵은 가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지만, 실제의 예의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회적 약속과, 문화, 역사적인 신념과 가치, 개인의 성장배경, 사상, 그 외 상상보다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복잡한 요소를 고려했을 때 비슷한 기준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게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직한 예의의 정도라는 것이 절대적일 수 없는 것도 예의라는 것이 단순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전반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통용되는 정도는 있을지 몰라도, 어떤 관계 내에서 어떠한 정도가 반드시 옳다는 절대치는 존재 할 수 없다. 이러한 예의의 정도에 대한 관계 구성원간의 의견 충돌과 갈등이 발생하게 되면, 이 복잡한 실타래를 푸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양쪽의 의견이 모두 틀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를 뿐이다.

때문에 서로의 기준이 옳다고 기 싸움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관계를 그르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본질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어쨌거나, 우리는 남을 생각해야한다. 가능하면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한다. 타인의 기분을 생각하고, 타인이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 생각하고, 타인이 배려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예의는 절대적으로 바람직한 정도 같은 건 없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보다 나를 낮추려는 사람이 둘 있다면, 서로 계속 배려하고 양보한 끝에 어떤 정도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지켜져야 할 예의의 정도가 형성되는 것은 두 사람의 몫이고, 상대방을 생각한다는 예의의 기본은 서로가 다른 예의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 때 굉장히 큰 역할을 해낸다. 관계내의 갈등은 배려와 나를 낮추는 예의의 본질을 통해 합의와 절충, 이해의 단계를 거친다. 비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어려움을 함께 이겨낸 관계는 전보다 더욱 굳건해 질 수 있을 것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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