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오는 방에 들어가 바지를 찾아 입은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더 심해졌다. 어디선지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 내내 찬 해풍에 농락 당했을 게 뻔한 소나무들이 이제는 힘이 부친다는 듯이 마지막 쳐대고 있다. 준오네 집 바로 앞은 밭이었다. 그 밭 너머로 짙푸른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고 그 숲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바다였다. 파도소리는 밤이고 낮이고 들려왔다.

눈을 잔뜩 실은 하얀 바람이 준오의 얼굴을 한바탕 휘감고 지나갔다. 준오는 두꺼운 점퍼의 깃을 한껏 올려 세웠다.

"씨벌, 뭔놈의 바람이 이렇게 분당가이."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준오의 시선은 저만치 무리 지어 밭 위를 훑고 지나가는 눈보라를 좇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호응은 없었다. 이미 내린 지 며칠은 지난 눈들은 간밤의 추위에 움츠러들 대로 움츠러든 모양이었다. 더 이상 자신들의 몸 위를 훑고 지나가는 어디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를 눈보라에 동조하지 않았다. 눈보라는 이내 저 건너편 숲 바로 밑에 이르자 소나무 가지 사이로 잦아들고 말았다. 잠시 가지들이 흔들리는 게 보였을 뿐.

그리고 그곳에 아주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보였다. 거긴 마을과도 꽤 떨어진 곳이었다. 준오의 시선은 그 초가집에 붙박였다. 멀리서도 아주 낡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의 그 집 지붕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음에도 군데군데 패인 자국이 도드라졌다. 준오네를 향하고 등을 지고 있었고 바로 아래로 이제는 다 썩어 문드러진 지푸라기 울타리가 있었지만 그것도 형식적인 경계만을 표시해줄 뿐 이미 울타리의 기능을 상실한지는 오래돼 보였다.

준오네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그 집은 아주 조용했다. 사람 인기척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행인들이 봤으면 딱 흉가나 폐가 정도로 밖에 볼 수 없는.

그리고….

그리고….

그 폐가 안에는 지금 남순이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쌔근거리는 숨을 아주 조용히 몰아쉬며. 아니 어쩌면 지난밤 무언가 깊은 시름에 잠 못 들어 하다가 이른 아침 자리를 털고 일어난 준오의 그것처럼 허망해진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발을 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눈 위에 탱크의 궤도 자국 마냥 선명한 V자의 엇갈림이 찍혀졌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길이의 검은색 장화는 아버지가 바다를 갈 때 신는 것이었다. 미끄러운 바닥의 고무판에 몸을 의지하려고 하는 발가락들이 삐그덕, 삐그덕 하고 소리를 냈다. 시린 발에 땀이 나는 모양이다. 준오는 보폭을 좁히고 몇 발자국을 더 떼다가 이내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그리곤 그런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남순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지금 남순의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늘…싸락눈…찬 공기, 어쩌면 눈의 끝 부분에서 노란 계란 모양을 해서 움직이고 있는 도깨비불이 준오의 눈 안에 들어와 있는지도.

돌연 몸이 훽, 돌려졌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다시 마당으로 향했다. 철퍼덕, 철퍼덕. 그새 장화 안에 물이 찼는지 요란한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사실 며칠전 남순은 이미 준오네 집에 왔었다. 준오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준오의 전학을 준비하느라 서울에 올라갔던 어느 날. 한 6-7일 되었나보다. 찬바람이 온 세상을 적막에 빠트리게 하는 그런 날이었는데 집에는 누이와 여동생, 그리고 준오 만이 남아있었다. 남순은 부모가 없는 사흘동안을 거의 준오네서 눌러있다시피 했다. 물론 밤이 되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졸고 있는 동생 경훈을 깨워 돌아갔지만 그것도 이틀만 그랬을 뿐 마지막 사흘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에이, 꺽정스러운게 여기서 자고 가야 쓰것네"라며 아예 눌러 앉았다. 곁에 있던 경훈이 "아따 할매 걱정한당게…."라고 채근을 해댔지만 "괜찮아야!!"라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긴 평소의 모습을 봐도 그녀는 경훈 따위의 얘기를 들을 인물은 아니었다.

누이가 차린 저녁상에서 결코 그녀 집에서는 구경조차 못해봤을 흰쌀이 꽤 섞인 잡곡밥을 한 사발 뚝딱 해치운 그녀는 이미 집에 갈 생각 따윈 없어진 것 같았다. 늘 하는 대로, 누군가가 돌을 깨서 반들반들 윤기가 나게 갈아놓은 공기를 꺼내왔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소리만큼이나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놀이하기를 두시간여, 아주 큰, 그리고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시작은 물론 남순이었다. 그녀는 자기보다 세 살이나 많은 준오의 누이는 아랑곳없이 공기놀이가 따분해졌다는 핑계를 대며 엄청난 제안을 했다. 아까 낮에 보았는데 작은 방 아랫목에 이불로 겹겹이 쌓여있는 게 술 아니냐로 화두를 꺼낸 그녀는 급기야는 준오가 우려했던, 어쩌면 준오 보다 역시 세 살이 더 많은 누이가 더 우려했을 얘기를 하는 것으로까지 사태를 진척시키고 말았다. 물론 한번 마셔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진짜로 경험을 해봐서 알고 있는 것인지, 여러 가지 술에 관한 전력들을 늘어놓았다. 누구네 집 막걸리 심부름을 하다가 몇 모금 마셔봤는데 너무 달았다느니, 마시고 나면 온 몸이 하늘에 둥둥 뜨는 것 같다느니 하는 식의 얘기들이었는데 준오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다른 시골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몇 차례 어른들의 막걸리 심부름을 하다가 홀짝 홀짝 마셔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8홉들이 소주병 안의 푹 줄어든 막걸리 양 때문에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막걸리를 받아오는 도중 흘렸다고 하면 그 뿐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진다느니, 몸이 둥둥 뜨는 것 같다느니 하는 정도까진 의문이었다. 그저 다른 친구들로부터 얘기를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어쨌든 남순은 그 몸이 둥둥 뜨는 막걸리를 마시자는 것이었고 그녀가 얘기를 꺼낸 이상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가히 힘든 일임에 틀림없었다. 준오의 누이 역시 남순의 성격과 사태의 결과를 미리 짐작했음인지 처음의 강한 부정의 태도를 얼마 안가서 곧 바꿨다. 긍정은 바로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런디 어떡한디야, 막걸리를 퍼내면 표시가 날턴디"라는 말에서 결정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남순은 짐작했다는 듯 "걱정 붙들어 매, 쬐끔만 퍼마시고 물 채워놓으면 됭게" 라고 바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준오는 그저 두 여자가 하는 대화를 듣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서울에 있는 큰누이가 달포 전에 보내온 흑백 TV의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든가 뭔가가 나오는 서부영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 있는 판자촌. 그곳에 나타난 총잡이. 그리고 그를 유혹하는 술집여자들. 하지만 준오의 귀는 철저히 두 여자의 대화에 몰두해있었다.

"미쳤는가벼.."

경훈의 간섭이었다.

"아따 그 새끼. 쬐끄만게 뭘 안다고 나서길. 자꾸 그럼 너 혼자 집에 보내버린다잉."

경훈은 남순의 얘기에 목을 쏘옥 집어넣고 말았다. 그도 혼자서 집에 가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두 여자는 처음에는 아주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일단은 부엌으로 들어가 술을 퍼낼 바가지와 사발 몇 개를 준비했고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방으로 가더니 항아리 앞에 섰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주 정성스럽게 싸둔 이불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준오는 그들의 행동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마치 첫 정사를 앞둔 새신랑이 대사를 치르기 위해 하나씩 신부의 옷을 벗겨내기라도 하듯 신중했다.

"뭘 이렇게 꽁꽁 싸놨디야…"

남순의 목소리였다. 마음이 다급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해야제. 그렇지 않음 술이 잘 안익는디야"

누이의 대답과 함께 살포시 발효한 효모의 냄새가 준오의 코끝을 찔렀다. 이불을 다 걷어낸 모양이었다.

"준오야, 일루 와서 니가 좀 해봐라. 당체 무거워서 들 수가 없네이"

"뭘 말이여?"

"이 뚜껑 말이여. 도대체가 들리질 않어야이"

준오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역시 공범이 되는 순간이었으니. 하지만 호기심이 일었고 자신 역시 그 몸이 둥둥 뜨는 기분을 느껴보는 게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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