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누가, 몇 차례 작은 방을 들어갔는지, 그리고 역시 준오가 느꼈던 예감처럼 열어둔 뚜껑으로 인해 별 큰 방해도 없는 바가지에 몇 번이나 막걸리를 담아내 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해서 모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준오가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나 짜증어린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을 무렵 이미 방안의 불은 꺼져있었다. 그리고 채 몸을 일으키지 않고 누워있는 그의 곁에선 희미한 젖비린내가 은은한 코스모스 향 마냥 준오의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뭘까. 이 냄새의 주인은.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 정체는 드러났다. 바로 남순이었다. 어둠에 갇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시야가, 창호지 문 틈새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하얀 눈빛 덕분에 곁에 누워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는 남순을 포착해 낸 것이었다. 경훈과 누이는 저만치 떨어져 잠들어있었다. 누군가 몸을 뒤척이며 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경훈인가 보다, 고 생각했던 준오는 곧 자신의 짐작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누이였던 것이다. 술 탓일 게다.

남순이 몸을 뒤척였다. 입에서는 희미하게 무슨 소리인가가 흘러나왔다. 성숙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 도톰한 입술은 독한 술기운 때문인지 역시 자그마한 얼굴의 맨 아래쪽에서 살포시 열려있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반쯤 걸쳐있는 베갯머리를 아로새기고 그중 몇 가닥은 점 하나 없이 매끄럽게 내려간 목선을 조심스럽게 희롱하고 있다. 털실로 뜬 베이지색 니트의 앞부분에는 앙증맞은 크기의 검은 색 단추가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맨 위 단추 세 개는 풀어진 상태. 그리고 보니 방안은 아직도 간밤에 지펴놓은 부엌 아궁이의 불씨가 채 가시지 않은 덕인지 따뜻했다. 풀어진 니트 단추 사이로 그 옷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 보이는 은밀함이 조심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준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가 명절 때마다 꺼내 신는 버선 코 마냥 봉긋 솟아오른 그것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규칙적이지 않은 호흡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위에는 이름 모를 꽃 몇 송이가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준오는 언젠가 코스모스 꽃밭에서 보았던 남순의 하얀 살결을 생각해냈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단내가 났다. 준오는 조심스럽게 침을 다시 한번 삼켰다. 그리고 살그머니 손을 올려 남순의 눈앞에 가져갔다. 남순은 이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반쯤은 이불에 가려진 아랫배와 버선코 같이 생긴 가슴부분만 샐룩샐룩 움직이고 있을 뿐. 손을 흔들어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손은 조심스럽게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열려진 단추 앞에서 잠깐 멈추어진 손은 이내 큰 망설임 없이 조심스럽게 벌려진 틈새사이로 진입했다.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솜털의 느낌이 전해졌다. 그리고 손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감촉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이내 도톰한 두 개의 동산이 감지됐다. 오목하게 파인 계곡을 중심으로 아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준오의 시선은 계속해서 남순의 얼굴에 머무르고 있었다. 간혹 한번씩 누이와 경훈 쪽을 흘겨봤을 뿐. 남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준오의 손이 거의 동산을 다 올라갈 무렵 준오는 거세게 손을 빼고 자리에 덜컥 소리가 나도록 엎어져야 했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인가가 났던 것이다. 이른 봄 쫓기던 꿩이 쌓아놓은 보리다발 사이에 머리를 쳐박은 듯 맨바닥에 고개를 붙이고 옴짝달싹 않고 있던 준오는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빼꼼히 머리를 들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잠꼬대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씨벌…" 준오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다시 남순의 하얗고 살이 적당히 오른 육감적인 엉덩이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준오는 누운 채 남순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뱀이 옆 걸음질을 하듯 조금씩 조금씩 남순에게 다가갔다. 남순은 여전히 세상 모른 채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제 남순의 오똑한 코만큼이나 선명하게 솟아 보이는 젖가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손을 뻗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수월했다. 따뜻함이 녹녹히 배어 흐르는 젖가슴께로 손을 집어넣었다. 밭에서 따온 목화 솜이 채워진 캐시미론 이불을 만지듯 준오의 가슴 가득 아늑함이 사무쳤다. 준오는 이번엔 좀 더 과감히 손길을 옮겼다. 곧 무언가 조그맣고 딱딱한 콩알만한 것이 손끝에 감지됐다. 신천지를 발견한 듯 잠시 바르르 떠는 진동을 그 미묘한 물체에 전해주었던 손가락은 이내 다른 또 하나의 손가락과 어울려 조심스럽게 그것을 어루었다. 손목이 채 풀려지지 않은 네 번째 단추에 자꾸 걸렸다. 준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잠깐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손가락을 꺼내 그 방해물마저 제거해버렸다. 순간 남순이 뭔가를 느낀 듯 움찔하고 움직였다. 준오는 재빠르게 손을 거둬들였다. 남순이 이번엔 준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준오의 코앞에 남순의 얼굴이 와닿았다. 여리게 반복되는 숨결이 준오의 낯을 간질인다. 준오는 고개를 살짝 뒤로 빼냈다. 하지만 다음순간 남순의 결코 짧지 않은 한쪽 팔이 준오의 옆구리 위에 걸쳐졌다. 풀어놓은 단추 사이로 가슴이 흘러내릴 듯 걸쳐있다. 조금만 움직여도 쏟아져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 준오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등에는 식은땀이 배어났다. 분명 마음 속에서 시작됐을 둥둥하는 북소리가 머리를 거쳐 귀에까지 가 닿았다. 머리카락은 어두운 산길을 가다 허깨비라도 봤을 때 마냥 쭈뼛쭈뼛 서고 있었다. 준오는 고개를 돌리고 심호흡을 했다.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났다.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깊은 밤은 그렇게 더욱 깊어만 가고 있었다. 아침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준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얼굴은 이미 벌개져 있었다. 이후로 6년여의 세월동안 단 한번도 남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준오였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 준오가 늦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남순과 경훈은 이미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다행히 누이는 전혀 눈치를 못 챈 모양이었다. 단지 야, 너는 뭔 놈의 술을 그렇게 마셔쌌냐…너 크면 완전히 술꾼되겄더라이, 라는 말끝에 어디서 들었음인지 콩나물국을 끓여 내왔을 뿐이었다.

준오는 다시 남순의 집께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이제 잠시 후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햇님은 여전히 소나무 사이로 갈래갈래 분신을 내보내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잠시 눈을 감았던 준오의 눈가로 황량한 바람이 한 옴큼이나 쑤욱 들어왔다. 눈이 시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준오의 눈에서 물기가 반짝였다. 준오는 소매를 들어 눈가를 쓰윽, 문지르고는 헛기침을 크게 한번 토해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 위에는 장화 발자국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모양의 코스모스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준오는 그렇지 않아도 철퍼덕거리는 장화 소리를 아까보다 한결 요란스럽게 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시간여 뒤 준오는 무거운 가방 하나와 평소 밥상 덮개로 쓰이던 보자기까지 동원된 세 개의 짐 보따리를 끙끙거리며 들고 마을 한가운데 몇 백년 묵은 소나무가 여러 그루 늘어서 있는 산재를 지나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이미 시동을 걸고 뒤꽁무니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바투 김을 내뱉고 있던 버스는 준오와 아버지가 오르고, 따라온 어머니가 따라 올라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기를 몇 차례, 이내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조심조심 눈길을 출발했다. 덜퍼덕 덜퍼덕, 체인 돌아가는 소리가, 버스 한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폭 좁은 한길의 자갈 깨지는 소리와 함께 준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머니가 멀어지고 있었다. 준오는 끝내 소매 끝으로 얼굴을 훔치고 마는 어머니와 누이를 쳐다보며 마지막으로 손을 한번 흔들어줬고 그리고 창가 쪽에 앉아 덤덤한 표정으로 밖을 쳐다보는 아버지를 슬쩍 살피면서 자신도 눈가를 훔쳤다. 밖으로는 눈에 많이 익은 풍경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몇 채의 집들이 지나가자 넓은 들이 펼쳐졌다. 아까 보았던 눈바람이 그 위를 스치고 있었다. 저 멀리 숲이 보였고 거기 남순의 집도 있었다. 눈앞이 다시 흐릿해왔다. 준오는 새로 장만한 중학생용 검은 색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행여 멀미라도 할까 어머니가 입안에 넣어주었던 껌을 소리나게 씹어댔다. 입에선 담배연기 마냥 김이 피어올라 텅 빈 버스 안을 휘휘 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버스 엔진의 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싶었더니 어느새 남순의 집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풍경들이 나타났다. 준오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리고 교복의 안쪽 주머니 깊숙한 곳을 뒤적이더니 흘낏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고는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코스모스 잎파리였다. 지난해 초겨울 준오의 전학소식을 들은 남순이 손에 쥐어주었던…거기에는 둘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고 비닐 종이를 덧씌워 헝겊으로 싼 다음 인두로 지진 것이었다. 준오는 소중한 증표라도 되는 양 그 물건을 다시 안쪽 주머니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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