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언론=가톨릭뉴스지금여기> 금경축 맞은 문정현 신부 이야기

사제로 산 지 50년. 지난 3월 24일 문정현 신부는 사제 서품 50주년을 맞았다.

전주교구 중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금경축 미사에서 문 신부는, 곁에 남은 단 한 명의 친구 신부에게, 그리고 지난 50년을 함께 견디고 살아 준 전주교구에게 또 이날을 있게 한 모든 스승들과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 "평화를 빕니다." 문정현 신부의 인사가 강정마을에 울린다. ⓒ정현진 기자

 

미사를 마친 그 다음 날 문 신부는 제주도 강정의 집으로 돌아와 부활절을 지냈다. 인터뷰를 청하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1층 한 편에 자리 잡은 문 신부의 서각 작업실을 찾았다. 늘 그랬듯 인터뷰를 청하면 응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고백하자면 계획대로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했다.

당황하는 기자에게 문 신부는, “이제는 삶을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더 이상 언론이든 어디서든 나를 드러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동안 내가 있었던 곳…매향리, 평택 대추리, 부안…이런 곳에 한번 가보고 싶어.”

전주교구에서 금경축이라고 알리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서품 50주년을 맞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사 통보를 받고서야 “그렇구나…” 했지만, 그날부터 지난 50년의 시간이 불쑥 불쑥 그 앞에 나타났다.

“아 참, 힘들었어. 잠도 오지 않고.” 납치, 연행, 온갖 사고와 위협, 노숙 농성, 순례 등을 겪으며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같은 삶을 산 그가 누군가에는 빛, 용기, 희망, 고마움이 될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는 고통의 기억이기도 하다. 미국 메리놀 신학대에서 2년 유학한 기간을 빼면, 문정현 신부는 늘 길 위에 있었다.

그런 기억으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워, 요즘 ‘욥기’를 읽는다고 했다. 구약의 욥은 ‘고난’의 대명사와 같다. 의인의 고난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보이고자 하셨다지만, “위로가 되셨냐”는 질문에, 문 신부는 “안 되더라”고 답했다.

힘들다고 토로하면서도 그는, 지난 세월을 보냈던 평택 대추리, 매향리 같은 곳에 다시 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꺼낸 말은,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알고 보니 우리 형제들 집을 다 다녀가셨더라”는 이야기였다. 살 같은 자식들을 떠나기 전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라는, 그 현장에서 만났던 모든 이들이 마치 자식과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원 없이 살았지. 강정에서 살던 대로 살겠지. 하지만 이제 나를 드러내는 일은 없을 거야.”

부활절을 맞아 강정을 찾은 사람들을 만나느라, 예정에 없던 일정을 소화하는 문 신부에게 간신히 한 마디 물었다. 그에게 교회란 무엇이냐고. 50년간 교회 속에서 교회로 살았던 그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2011년 초 250여 일간 명동성당에서 서각을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회를 위한 기도였다. 교회 안에서 살고, 기도하고, 길을 나섰다가도 교회로 돌아오는 문 신부도, 교회를 생각하면 뼈아픈 부분이 많다.

그는 “지금의 제도교회는 예수시대의 유대교와 같다”고 했다. 교구와 본당이라는 구역, 지역으로 갇혀 있는 구조에서는 세상 속에서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이를테면, 교회가 시대를 읽고 반영하는 데 순발력이 떨어진다는 점도 짚었다.

 

 

▲ 문 신부가 미사 도중 경찰이 사람들을 들어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매일 겪는 일이지만 적응도, 용납도 어렵다. ⓒ정현진 기자

 

“때마다 교서와 지침이 나오지만, 말에 불과해. 그것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그것이 개인적이고 구조적으로 신앙과 엮이지 않기 때문이지.”

그런 면에서 문 신부는, 교구와 본당을 초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정, 용산, 밀양, 쌍용차 등 아우성 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들리는 자리에서 많은 수도자, 평신도, 사제들이 연대하고 있지만, 제도교회는 이를 받쳐 주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제도교회에 성명서 발표 외에 현장에 발 담그는 참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묻는 문 신부는, “교회는 결국 복음, 복음을 사는 것이다. 교회는 그런 면에서 진전되고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매일, 공사장 정문 앞에서 봉헌되는 미사에서 문 신부는 평화의 노래로 미사를 열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몫을 맡는다. 생각지 못한 엠마오 순례객들로 가득한 정문 앞에서 문 신부는 기력을 다해 “평화를 빕니다”라고 여러 번 외쳤다.

문정현 신부가 비는 평화는,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 두꺼비와 맹꽁이, 도롱뇽이 서식지를 잃지 않는 것, 장애인도 가고 싶은 곳에 자유롭게 가는 것, 이 땅을 일궈 온 농민들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것,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것,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 배고픔과 서러움이 없는, 쫓겨나지 않고 군림하지 않는 세상”이다.

가장 나중에 “원 없이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문 신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갈 뿐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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