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송경동 시인-1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송경동 시인(2019년 위클리서울과의 인터뷰 모습) ⓒ위클리서울

비정규노동자 2만여 명의 권리를
교섭 의제로 삼아 주었으면 했다 
처지가 같은 노동자들끼리 함께 살기를 모색하는 것
난 그게 온당한 노동자들의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꿈같은 소리 하지 말라 했다

송경동, ‘꿈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中
 

모든 시인은 참여시인이자 서정시인이다. 노동운동 최전선에서 서정시를 쓰는 송경동 시인이 6년여 만에 신작 ‘꿈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를 냈다. 일관되게 육체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의 고달픈 삶을 서술해왔고, 이번 시집도 그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약자, 노동자들과 늘 함께 해온 송 시인. 약자와 노동자들을 등한시 해온 과녁을 향해선 늘 정조준 중이다. 숨고르기를 하면서도 때론 통곡한다. 곡소리는 김수영의 투박하지만 화려한 수사에 박노해의 뜨거운 노동 감성이 이식되면서 탄생한 시들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촛불항쟁으로 탄생했으나 비정규직과 ‘불안 노동자들’을 더욱 옥죄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민주당이 정권을 내준 원인 중 하나가 이 지점에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여전히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대다수 서민들은 민주당을 향해 합법적으로 모든 것이 강탈당했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

“정책 방향이나 공약 보니 할 말이 없다.”

차기 정부에 대해서도 큰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송경동 시인. 그는 “저는 글을 통해 빛나는 전망이나 낙관적 부분에 대해선 잘 드러내지 않는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획득해가거나 발견해가야 한다는 부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낙관적인 글을 쓰진 않는다. 현실의 절박함과 긴장감, 꿈꾸기 어려운 것들에 대해서만 쓰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참여에 적극적인 송 시인이지만,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구분은 철폐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으로 나눠지는 현실 자체가 위정자들의 실패한 음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식들을 소설이나 시에서 다 걷어낼 수 없다는 얘기다. 여타 예술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예술은 현실과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

“서정 자체가 사물과의 관계와 만남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사상감정이다. 시적 수준은 서정의 깊이 차이에서 나눠질 뿐이다.”

‘순수/참여’라는 해묵은 논쟁은 우리 문단에서 알게 모르게 지속되고 있다. 순수든 참여든 노동현장의 문제를 시에 전부 담을 수 없다는 송 시인. 시론, 나아가 시로 쓸 수 없었던 우리사회 모순을 송경동 시인을 통해 짚어봤다.

 

 송경동 시인의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위클리서울/ 창비

- 신간을 냈다. 시집 ‘꿈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제목의 의미를 설명하자면.

▲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서 변해간다. 그런데 꿈 같은 소리가 이루어질 수 있겠냐, 하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의 정의나 야만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면, 쓰러지면서도 멈추지 않으면 그런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그런 희망을 품고 제목을 정했다. 시의 내용을 보면, 제목과 괴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제목을 나름 좀 파격적으로 정했기에. 제목과 내용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어쨌든 제 의도는 새로운 사회를 위해 싸우고 저항하고 모색하는 컨셉이었다. 나아가 우리 사회에 대한 반항이나 일종의 야유 같은 소리도 포함 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잠시 잠깐 꿈꾸는 이야기를 하다가 체제에 위축되어서 타락하는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고자 했다.

 

- 글쓰랴, 노동운동하랴, 어떤 때는 술마시랴, 여러모로 바쁘다. 시상이 언제 가장 잘 떠오르는가.

▲ 겸손해지거나 혼자 되었을 때 시상이 떠오른다. 실제 투쟁이나 저항의 현장에 있을 때는 그곳의 일들이 워낙 긴박해서 정신이 없다. 그 투쟁에 집중해야 하고 긴장해야 하는 순간이 많아서 시가 찾아올 틈이 없다. 그런 긴장된 순간들이 지난 후 일상으로 돌아와 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될 때 시라는 게 찾아온다. 기운이 좀 빠져 있거나 쓸쓸해져 있을 때 시라는 친구가 찾아와서 위로해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것 같다. 제가 시 쓰기를 워낙 게을리해서 시에겐 미안한데, 제가 지치거나 기운 빠져 있을 때 시라는 친구가 다시 한번 기운을 내게 해준다.

 

- 에밀리 디킨슨은 독서를 거의 하지 않고 시를 썼다고 한다. 모호한 질문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데 있어, 글 읽기가 우선인지 체험이 우선인지 묻고 싶다.

▲ 책을 거의 안 읽어도 시는 나올 수 있다. 어떤 삶을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시가 나올 수는 있다. 사람들 삶 자체가 책이기에 말이다. 할머니들 삶이 대하소설 같은 것이다. 책은 활자로 찍힌 것일 뿐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책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안에 지혜와 꿈과 열망들이 내포해 있다. 책이라는 건 지나간 역사다. 현재의 움직임과 차이가 있다. 책이라는 형식 등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배우게 되지만, 가장 많이 배우게 되는 건 시대를 살아온 사람과의 교류와 연대와 부딪힘을 통해서다. 무엇이 우선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에밀리 디킨슨도 수없이 많이 읽었을 것이다. 다만 읽기를 통해 얻은 관념적인 것들이거나 화석화 된 것들에 머물지 않고, 체험과 경험 속에서 더 많은 상상이나 어떤 것들을 얻었으리라 본다. 독서를 주로 하는 안정적인 공간이 아닌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던 바를 정리한 게 책이고 글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지나간 인류의 지혜를 배운다. 소중한 과정이다. 자신이 몰랐던 타인의 삶과 공동체의 모순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이다. 거기에도 분명히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저는 사실 생활 현장에 있다는 핑계로 책읽기를 게을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반성이 많다. 책에 대한 그리움도 많다. 좋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많이 읽어야 한다. 나아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꿈과 열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시를 쓰려면 책을 통해 도덕, 윤리, 혁명에 대해 고뇌해야 한다. 책 읽기 과정을 게을리 하면 안되는 것 같다. 학습과 실천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에밀리 디킨슨은 과연 독서를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신화적인 영역 같다.

 

- 보르헤스는 바깥을 나가지 않고 도서관 책을 통해 소설을 썼다는 얘기가 있다. 경험이 아닌 일종의 선험이라 할 수 있겠다. 선험적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나.

▲ 보르헤스 자체도 삶이 있었다. 경험적 삶은 있었다. 그 삶의 선택 속에서 주요한 이야기의 대상을 도서관 속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과 공유하지 않았겠는가. 보르헤스는 책에 얽힌 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역사와 대화했다. 거기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갔다. 우리도 주변에서 자신이 몰랐던 부분에 대해 경험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경우 자기만의 방식과 세계 속에서 진지하게 역사에 대해 탐구하고 해석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한 것 같다. 당연히 경험이 바탕이 된 책읽기였을 것이다. 자신이 경험했던 소중한 얘기를 책읽기를 통해 덧붙여준 게 그의 작품들이다. 보르헤스가 사회라는 공동체와 소통과 연대를 끊고 도서관 속에서만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낸 건 틀린 얘기 같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은 3세 때 다 배우게 된다는 말이 있다. 보르헤스 역시 성장 과정을 통해 충분한 현실과 인간과 가족 이웃, 사회라는 부분을 그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였고 경험한 게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탐구한 것이다. 디킨슨이나 보르헤스의 문학을 현실이라는 문제와 분리시켜선 안 된다. 그들이 접목했던 현실을 제거해버리면 그들을 그저 신화화 하는 것 같아 보인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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