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발 ‘돈맥경화’ 경보음

[위클리서울=정상훈 기자] 강원도에서 시작된 경제위기 바람이 산불 번지듯 확산되고 있다. 갑자기 터져나온 이번 악재는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에서 시작됐다. 이로 인해 금융시장 전반에 '돈맥경화' 현상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한국은행도 적극 대응하기 시작했다. 자금사정이 비교적 넉넉한 은행과 증권사를 대상으로 자금을 우회적으로 바짝 지원해 시장의 꽉 막힌 돈줄을 뚫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최근 비통화정책방향 회의를 개최하고 단기금융시장과 채권시장을 안정화하기 위한 조치를 시행하기로 의결했다. 윤석열 정부도 전방위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에서 시작된 이번 사태를 점검해봤다.

 

레고랜드 호텔 ⓒ위클리서울/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

때 아닌 ‘자금줄’ 논란에 시장이 휘청하고 있다.

강원도의 느닷없는 레고랜드 프로젝트파이낸싱 자산유동화기업어음 보증 이행 거부 이후 시장이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자 고물가를 잡기 위해 통화 긴축에 여념이 없던 한은마저 자금 지원에 나섰다.

최근 한은은 대출 적격담보증권과 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 공개시장운영 환매조건부채권(RP) 매매 대상증권을 오는 11월 1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3개월 간 한시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한은이 국내 은행과 증권사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줄 때 담보로 잡는 증권을 국채, 통안증권, 정부보증채 등 국공채로 한정했으나, 이번에 은행채는 물론 한전채를 포함한 9개 기관 공공기관채도 담보로 잡을 수 있도록 대상을 확대했다.

위기 발생 시 은행들이 빨리 내다팔 고유동성 자산을 보유하도록 규제한 당국의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을 맞추기 위해 최근 시중은행들이 대거 은행채를 발행해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는 바람에 기업과 비은행권 채권 발행이 한층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갈팡질팡 ‘강원도’

투자자들이 돈 떼일리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강원도가 돌연 지급 보증을 거부한 이후 부도 위험이 극히 낮다고 여겨져온 공공기관채마저 기피하는 채권시장 불안을 잠재우려는 의도도 분석된다. 특히나 한전채는 전체 신용채권의 36.7%를 차지할 정도로 발행이 급증한 데다, 초우량물(AAA)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외면을 받으며 최근 유찰됐다.

이와 함께 한은은 금융기관들이 서로 돈을 주고받은 뒤 차액을 결제할 때 담보로 맡겨야 하는 증권 비율을 내년 5월 이전까지 현행 70%로 유지해 자금줄을 풀어주기로 했다. 계획대로라면 내년 2월부터는 이 비율을 80%로 늘려야 하지만 이를 3개월 유예했다.

한시적으로 총 6조원 규모의 RP 매입도 실시하기로 했다. 증권사, 증권금융 등 한은의 RP 매매 대상기관을 상대로 내년 1월31일까지 6조원 규모의 RP 매입을 단행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돈풀기 우려를 의식한 듯 시장 상황을 봐서 필요 시에만, 단기물 위주로 RP 매입을 실시하겠다고 단서를 붙였다.

한은은 한편 “이번 RP 매입을 통해 시장에 공급된 유동성은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다시 흡수되기 때문에 추가 유동성 공급 효과가 거의 없다"고 선을 그었다. RP 매입과 더불어 다른 한쪽으로는 RP 매각 등을 실시해 시중에 일방적으로 돈이 풀리는 상황만큼은 막겠다는 설명이다.

한은은 당분간 시장 상황을 살펴본 뒤 후속 대책을 논의할 방침이다. 이번 사태 이후 금융시장에서는 '무제한' RP 매입과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기구(SPV)를 활용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은행·증권사가 필요한 대로 사실상 한도 없이 돈을 꿔주고, 한술 더 떠 회사채와 기업어음마저 한은에 직접 사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한은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전 세계적으로 통화 긴축이 급물살을 타는 와중에 대한민국 중앙은행이 막대한 돈풀기를 한다는 인식이 전 세계에 확산될 경우 영국과 같은 '금융 대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영국의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전 세계 경제 상황에 역행해 지난달 약 72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다가 파운드화 가치 폭락, 영국 국채 금리 폭등의 역풍을 맞고 자진 사임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최근 기획재정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무제한 RP 매입' 조치가 동원될 수 있다는 우려에 "그런 상황으로 번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며 "SPV 재가동은 추후에 필요하면 논의할 수 있으나 지금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은행의 움직임에 비상이 걸린 것은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로 단기자금시장 흐름이 꽉 막히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한은이 시장 안정화 조치에 나선 것은 코로나19 위기가 터졌던 2020년 3월 이후 약 2년 반 만이다.

특히 6조 원 한도의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은 27일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이 공개되기 전까지 시장에 알려지지 않았던 조치다. 레고랜드 사태가 없었다면 이번 금통위에 오르지도 않았을 안건이지만 사태가 시급한 만큼 유동성 공급 부담에도 불가피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다.
 

김진태 강원지사는 레고랜드 사태로 촉발된 자금경색과 관련해 보증채무를 이행하겠다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위클리서울/ 김현수 객원기자

‘불가피한 선택’

한은은 거시경제 여건이 코로나19 당시와 다른 만큼 이번 조치가 유동성 공급이 아닌 유동성 조절 또는 원활한 자금 순환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번 RP 매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장에 미칠 영향과 함께 통화정책과의 상충 가능성,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의 긴축 강화 등 여러 변수를 놓고 입체적으로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한은이 이번에 전격 실시하기로 한 RP 매입은 6조 원 규모로 3개월 한시적 조치다. 금융기관들이 RP 매매 대상 증권을 가져오면 한은이 준거금리보다 10-20bp(1bp는 0.01%포인트) 높은 금리로 이를 매입해 단기자금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이번 정책이 시행되면 증권사는 보유 중인 담보를 한은에 맡기고 단기자금을 빌려 쓸 수 있다.

문제는 한은의 RP 매매 대상기관으로 RP 매입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증권사(은행도 포함되지만 이용할 가능성이 낮다) 중에서도 메리츠증권, 미래에셋증권, 삼성증권, 신한투자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 한국증권금융 등 대형 증권사만 해당된다.

이번 조치는 대형 증권사가 중소형 증권사와 경쟁하며 시중에서 자금조달 경쟁을 하지 말고 한은에서 RP 매입을 통해 단기 유동성을 확보하라는 취지인 셈이다. 한은이 직접 거래할 수 없는 중소형 증권사가 시중에서 원활히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간접적 조치인 셈이다. 적용 금리는 특혜가 되지 않으면서도 대형 증권사를 유인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이번 시장 안정화 조치를 발표하면서 이례적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해 강조했다. 이번 RP 매입이 기존의 긴축적 통화정책 기조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은은 “현 통화정책 기조와 배치되는 것은 아님”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유동성 추가 공급이라기 보다는 유동성 조절 차원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은의 RP 매입은 유동성 공급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조절이라고 수차례 강조한 것은 추후 공개시장조작을 통해 유동성을 다시 흡수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RP 매입을 통해 시장에 자금이 풀리면 금리가 떨어지게 되는데 이를 다시 적정 금리로 맞추는 과정에서 통화안정계정 등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자금을 흡수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극심한 시장 불안을 겪은 영국 사례와는 다르다는 입장을 분명히 내비치고 있다. 영란은행은 최근 긴축 기조를 보이던 중 갑작스러운 시장 불안에 긴급히 국채를 매입했다. 한은이 RP 규모를 크게 늘렸다면 긴축적 통화정책을 포기한다는 오해가 생겨 물가나 환율이 더 오른다고 보고 외국인 자금 이탈이나 원화 가치 급락이 나타날 수 있다. 이를 의식한 이창용 한은 총재는 “해외에서 이 정책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은이 저신용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을 위한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 재가동이나 금융안정특별대출과 같은 전면적인 유동성 공급 대책에 선을 긋는 것도 같은 이유다. 매입 한도를 6조 원으로 제한한 것 역시 코로나19 당시 도입해 ‘한국판 양적완화’로도 불렸던 무제한 RP 매입과 차이를 둔 것이다. 무제한 RP 매입은 고정금리 모집으로 입찰해 응찰금액 전액을 낙찰했지만, 이번엔 복수금리로 경쟁입찰해 예정된 금액 안에서만 낙찰한다.

하지만 한은의 발걸음이 급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미 연준이 4연속 자이언트스텝(금리 0.75%포인트 인상)에 나서고 강도 높은 긴축을 예고한다면 한은 역시 2연속 빅스텝(금리 0.50%포인트 인상)이 불가피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금시장 경색이 지속되는 데다 통화정책 경로마저 막혀 있다면 제대로 된 대응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연말 연초가 다가오면서 시장 불안이 확대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점도 한은이 RP 매입에 나선 배경이으로 보인다. 연말 또는 분기 말이 되면 주로 자금을 공급하는 가계나 기업이 재무제표상 부채비율 감축 등 이유로 자금을 이동해 변동성이 커진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단기금융시장 불안 심화 현상이 연말 연초 단기자금 경색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한 대비 차원으로 내년 1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실시하겠지만 연장 여부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김진태 강원지사는 레고랜드 사태로 촉발된 자금경색과 관련해 보증채무를 이행하겠다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그는 “처음부터 보증채무를 이행하겠다고 밝히고,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설득하는 과정에 의외의 사태가 생긴 것"이라고며 ”가을에 늘 해오던 2차 추경을 취임 후에 하지 않고 아껴놓은 게 있다.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서 12월 15일까지 갚겠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의 대응으로 통해 시장의 ‘돈맥경화’ 현상이 해결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5대 금융지주(신한·KB·우리·하나·NH)도 이날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이 주재한 시장안정 점검회의를 통해 은행채 발행 축소, 단기자금시장 유동성 공급, 채권·증권시장안정펀드 재조성 사업 참여 등을 약속했다. 강원도에서 시작된 찬 바람이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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