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바운드' 리뷰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만나면 늘 영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운 존재들이다. 그중 두 명이 동거를 시작했다. 동아시아 영화를 전공한 L과 영미팝이 흘러나오면 머리를 흔들어대는 M의 조합이다. 그 집엔 문화예술이 가득할 터였다. 재미있는 소식에 일곱 명이 주전부리를 싸 들고 모였다. 나는 연인과 이른 저녁을 먹고 가장 늦게 참석했다. 신발이 가득한 현관을 지나니 공간에 비해 큰 식탁과 여러 개의 간이 의자들이 반겨주었다. 이런 시간을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준비한 것 같았다.

 

영화 ‘리바운드' 스틸컷 ⓒ위클리서울/ 네이버영화

12월 30일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예년처럼 우리끼리의 연말 정산을 시작했다. 돌아가며 한 명씩 질문을 하고 모두가 답변했다. 올해 가장 많이 들은 음악, 완전히 꽂혀버린 취미, 극장에서 본 최고의 영화 같은 주제였다.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들은 서로의 답변을 흥미롭게 들으면서도 한탄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그걸 못 봤을까. 올해 한 게 없네. 매년 반복하는 이야기였다. 직장인이 된 N은 극장에 가는 횟수가 확 줄었다고 했다. 그 탓에 아직도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졌다.

“꼭 보라니까! 이렇게 재밌는 걸 왜 이제야 보게 냅뒀냐고 원망하지 마.”

“원망은 하겠지.”

“뭐야, 일 년 내내 얘기해도 안 들었잖아!”

“그러니까 각오는 되어있어. 나를 원망할 각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꼭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는 잔소리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농구화가 바닥과 부딪히면서 나는 끽끽 소리, 바람에 나풀거리는 농구복 같은 디테일은 큰 화면과 좋은 사운드로 체험해야 한단다. 그때 누군가 재개봉 소식을 전하며 새해 첫 영화로 예매할 것을 권유했다. 지겹다는 표정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N이 물었다.

“아니, 재밌는 건 알겠는데. 새해 첫 영화로 볼 만큼의 의미가 있어?”

“보면 너무 힘이 나서, 출근할 때마다 그 음악을 듣게 될 거야.”

“열심히 살고 싶어질 거야.”

다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녀도 이제야 솔깃해진 듯했다.

 

영화 ‘리바운드' 스틸컷 ⓒ위클리서울/ 네이버영화
영화 ‘리바운드' 포스터 ⓒ위클리서울/ 네이버영화

농구 영화가 뭐길래

우리를 북돋우며 힘을 전하고, 열심히 살고 싶도록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영화. 여기에 꽂혀 작년부터 농구 영화 리뷰를 연재 중이다. 여전히 실제 농구는 잘 알지 못한다. 기본적인 룰도 모르고, 경기나 관련 소식을 찾아보지도 않는다. 그저 작은 코트 위에서 땀흘리며 쉼 없이 뛰고, 몸을 부딪치고, 그러다 팔을 길게 뻗어 공을 던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정확히는, 그런 순간을 극적으로 편집해 보여주는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작년엔 농구 소재의 영화가 세 편이나 극장에 걸렸다. 처음은 23년 1월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였다. 큰 기대 없이 보았다가 흥분에 사로잡혔다. 경기장에서 이긴 팬들이 눈물을 흘리고 서로를 감싸 안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뭐랄까, 생각만 해도 즐겁고 신이 나고 들떴다. 좋다는 말로만 설명하는 게 답답했다. 강렬한 여운 속에서 두 편에 걸친 리뷰 글을 썼다. 다음은 4월에 개봉한 벤 애플렉의 <에어>였다. 농구라는 소재를 빌렸을 뿐, 실상은 운동화를 만드는 직장인들의 분투기였다. 농구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우리 일상이야말로 스포츠라는 또 다른 지평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세 번째 글을 썼다.

마지막으로, 농구 영화 3부작의 마지막 주자이자, 리뷰 4회차의 주인공이 바로 <리바운드>다. 장항준 감독이 연출하고 <에어>와 같은 날에 개봉했으며, 지금은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

“감동 실화”

“2012년 전국고교농구대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빛났다”

영화 포스터엔 환하게 미소 지은 7명의 청년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들이 있었다. 오로지 이목을 끌기 위한 요란한 미사여구는 아니었다. 어딘가 아름다운 구석이 있었다. 작품을 좋아하거나 훌륭하게 평가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런 구석이 발견되는 영화가 있다. 내게는 <리바운드>가 그러했다. 첫인상의 호감을 그대로 지켜주고 싶은 영화였다.

어느새 응원하고 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언더독의 성장스토리다. 영화는 낡은 창고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인 양현(안재홍)은 커튼을 젖히고 햇살 속에서 사진의 먼지를 닦아낸다. 사진 속 그는 농구 명문이었던 부산중앙고등학교의 에이스 선수였다. 무려 전국대회 MVP 출신이다. 다만 졸업 후 프로에서 별다른 활약 없이 은퇴했고, 지금은 학교로 돌아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중이다. 암울한 상황과 달리 따스한 햇살과 그의 손길이 닿는 모습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영화 <러브레터>의 도서관 장면이 떠오른다. 무겁지 않은, 어딘가 홀연히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공기 속에서 양현은 훌쩍인다. 슬픔보다는 그리움에 가깝다.

그는 화려한 학창 시절을 보낸 뒤 사회에서 실패했다. 중앙고는 농구부 해체를 목전에 두고 있다. 과거의 영광을 등지고 돌아오는 그의 심정을 잠깐 떠올려보았다. 나라면 이웃 주민들과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방 밖으로 나서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모교의 비보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이런 섣부른 걱정과 달리,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다. 그러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은퇴하는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경기를 뛰고 맛있는 밥을 먹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을 것 같다. 안재홍 배우 특유의 여유롭고 순수하고 행복한 느낌이 양현에게서 그대로 묻어나온다. 슬램덩크의 태섭이 불우한 일들을 겪고 자책하던 모습에 기운 센 응원을 건네고 싶었다면, 양현은 곁에서 함께 미소를 짓고 싶은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응원하는 마음을 알아줄 것 같은 단단함이 있다.

그 사이 양현의 운명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큰 소파들과 난초가 있는 교장실에서다. 훨씬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이지만 어쩐지 좁게 느껴지는 앵글 속에서 선생님들은 농구부 대책 회의 중이다. 양현은 교무실에 불려 간 학생처럼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 있다. 사람을 세워두고 다소 무례한 말들이 치열하게 오간다. 아마 싼 값에 귀찮은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듯하다. 양현은 구색맞추기 용으로 농구부 코치가 된다.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지만, 달리 보면 그가 걸어온 길과 지금의 태도가 만들어낸 기회이기도 하다. 농구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양현은 적당히 흉내만 내도 되는 일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화 ‘리바운드' 스틸컷 ⓒ위클리서울/ 네이버영화
영화 ‘리바운드' 스틸컷 ⓒ위클리서울/ 네이버영화

마음에 불씨가 날아온다

“니 진짜로 농구해 볼 생각 없나?”

“진짜로?”

“진짜로.”

양현이 발로 뛰어가며 모은 선수는 총 5명이다. 농구 외길을 걸어온 선수들도 있지만, 그저 취미이거나 다른 스포츠 출신인 경우도 있다. 진짜 농구를 해보겠냐는 물음에 의심과 함께 미소가 번진다. 주목받는 유망주였지만 슬럼프에 접어든 가드 기범(이신영), 부상 이후 방황 중인 올라운더 스몰 포워드 규혁(정진운), 축구선수 출신이지만 점프력만 좋은 센터 순규(김택), 길거리 농구계의 강자 파워 포워드 강호(정건주), 양현 덕분에 농구를 하게 된 장신의 센터 준영(이대희)이다. 용어가 어려워도 걱정할 것 없다. 주목받는 선수인 준영을 제외하고는 전부 아마추어에 가깝다. 아무리 노력한들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는 최약체 팀이라는 것, 각자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르지만 농구에는 진심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의도치 않게 농구부의 명운을 쥐게 된 양현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대로는 모교의 농구부도, 자신도, 선수들도 빛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어느새 조급해진 그는 준영 한 명에게 ‘몰빵’한다. 나머지 선수들은 준영이 공을 넣을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에만 그친다. 개개인의 역량을 기를 틈도 없고, 좋은 기회가 와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무조건 준영에게 넘겨야 한다. 팀 스포츠인데 전략과 훈련부터 균형이 무너졌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준영 다음으로 조금이나마 믿음직한 팀원이 기범과 규혁이라는 점이다. 선수 출신인 둘 사이에는 오래된 앙금이 있다. 눈만 마주쳐도 싸우려 들 정도니, 서로에게 패스를 할 리도 없다. 오합지졸에 팀워크도 무너진 이들이 출전하는 고교대회 경기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팀을 이끄는 양현은 이제 스물다섯인 데다, 선수 생활 말고는 별다른 경험도 없다.

악당은 없다

첫 시합 날, 하필 상대 팀은 우승 후보인 용산고다. 그래, 이 정도 시련은 있어야지. 모든 스포츠 장르물에서 나오는 클리셰적 서사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저찌 우승을 해내는 그림을 상상하며 받아들였다. 라이벌인 용산고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보여줄지, 박빙의 뛰어난 경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유일한 희망인 준영이 용산고 유니폼을 입고 등장한다. 중앙고가 아닌 용산고 버스에서 내린다.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나도 모르는 새 양현의 모교이자 아이들이 한 팀으로 모인 중앙고를 응원하고 있던 터라, 여유롭던 마음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초조해졌다. 신사적인 용산고 코치에 의하면 준영은 부모님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시합 직전에 전학을 갔다.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싶어 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양현과 선수들은 충격 속에서도 그를 원망하지 못한다. 장래가 유망한 선수는 서울로 스카우트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다. 농구 명문이었던 중앙고가 쇠퇴한 것도 그 탓이다.

악당은 없다. 준영도, 그의 부모님도, 용산고 코치도 자신이 해야 하는 책임을 다할 뿐이다. 오직 냉정한 현실만이 위기를 만들어낸다. 이제 중앙고는 6명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농구는 5명씩 경기에 참여하고, 선수 교체에 제한이 없다. 다른 팀이 전략적으로 선수를 교체하는 동안 중앙고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끝까지 버텨야 한다. 잠깐 숨을 고를 시간도 없다. 이기거나 비기기는커녕, 정신줄을 부여잡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무사히 경기를 치르기만 해도 다행이다. 아직 미성년자인 고등학생들에게 이런 시련은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싶다만,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중앙고는 갑작스럽게 포지션을 변경하고 전력을 다한다. 해설위원의 내레이션을 중심으로 농구를 몰라도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경기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빠른 전개 속에서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중앙고는 맥도 추리지 못하고 압도적인 스코어로 패배한다. 그동안 준영을 중심으로 한 훈련만 했기에 당연한 수순이다. 팀을 꾸린 후 첫 경기다. 급한 마음에 심판에게 항의하던 양현은 퇴장당하고, 화난 규혁이 기범을 향해 던진 공은 심판을 맞힌다. 결과는 몰수패와 6개월 출전 정지다. 이보다 최악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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