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오길 잘했네, 춘향이 보면서 정절 좀 길러!”
“남원 오길 잘했네, 춘향이 보면서 정절 좀 길러!”
  • 구혜리 기자
  • 승인 2015.07.31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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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떠나다> ‘나’를 찾아 무턱대고 떠난 전라도 여행 (2)

정말로 무턱대고 시작한 일주일 동안의 여정이 끝났다. 누군가 20대는 사랑이 전부였던 시절이라 말하지만 사실 우리 또래는 사랑 외에도 너무 많은 고민들과 해야 할 일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들은 겪어봐야 해”라며 고생을 강요받는 게 우리들 20대가 아닐까 싶다. 허겁지겁 한 학기를 마치고 순식간에 다가온 방학의 공백기에 공허함도 있었지만 동시에 하고 있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요 근래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로와 스펙, 가족과 사랑은 물론 자잘한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머릿속과 어깨엔 바위 같은 짐 덩어리가 가득 쌓인 것 같았다. 새벽 3시에 가까운 때에, 떠나야겠다고 결정했다. 다음날 아침 즉흥적으로 5일 권짜리 ‘내일로 여행(만 25세 이하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철도공사에서 판매하는 패스형 철도 여행 상품)’ 티켓을 끊고 배낭을 멨다.

핸드폰을 포함한 디지털 제품을 멀리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적지 않으면 수증기처럼 증발해 사라져버릴 기억들을 적어두기 위한 노트와 펜, 그리고 몇 가지 옷과 필수품만 챙겨 나왔다. 종착지도 정해지지 않은 채 집을 나서는 자체가 무척 신이 났다. ‘청춘 떠나다’는 3회에 걸쳐 연재된다.  

 

즐거운 소식이 생겼다. ‘내일로’ 발권 이용대상이 만 25세에서 만 28세까지로 확장된다고 한다. 삶에 대한 고민을 끝내지 못한 채 배낭하나 짊어 매고 떠날 수 있는 청춘의 기간이 길어졌다는 걸까. 청춘은 아직 불완전한 ‘어른아이’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기간이 길어진다니 아이러니한 씁쓸함도 느껴진다.

여행 둘째날 아침 지난 밤 자기 전에 정읍 한 바퀴를 돌았던 것이 생각났다. 불을 켜지 않아도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방이 환하게 보였다. ‘아 정읍이구나.’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나선 여행에 서울이 아닌 대한민국 남쪽 전라도 어디쯤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정오가 다 되도록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있었다. 정읍에 사는 친구를 만나 당신의 동네 얘기를 들으며 이 동네서 으뜸이라는 우렁쌈밥을 점심으로 배를 채우고서야 함께 남원을 다녀오기로 해답이 났다. 전날 먹었던 마늘보쌈도 아침으로 먹은 우렁쌈밥도 확실히 내가 집에서 먹던 음식들보다는 맛이 강했다. 전라도는 간이 짜다 맵다 들었는데 실제로 맛을 접하니 ‘일주일 동안 고생 좀 하겠구나’ 싶기도 했고, 특유의 지역미를 느끼는 것 같아 그게 또 기분이 좋았다. 우리 일행 외에도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두 일행정도 더 계셨는데, 들어오자마자 “정식 둘이요~” 하고 자연스레 앉으셨다. 어리바리하게 “우렁쌈밥 정식 2인분 주세요” 했던 여행 초행자와는 달리 안면이 있으신 단골 주민인가보다. 사실 내일로 발권자 혜택으로 10% 할인을 받을 수 있는 가게였는데 이용가능한지 묻자 가게 주인이 모르쇠로 일관해서 정말 맛있게 배불리 먹고는, 나서는 길엔 괜히 언짢았다.

 

사실 전라도 타 지역이라 해서 우리 동네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음에도 작은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걸음 하나를 떼놓을 때마다 기록을 갈망하듯 골목모퉁이에 자리잡은 거울에서 사진 한번 찍고, 낡은 담벼락에서 한번 더 찍고 떠나는 정읍역에서 마지막으로 또 찍고…. “간식거리랑 시원한 음료 있어~!” 자기 얼굴만한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나를 여행객으로 알아보셨는지 작은 구멍가게 이모가 귀엽다는 듯 인사해주셨다.

해가 중천일 쯤 느지막이 도착한 남원역은 어디선가 잔잔한 선율을 더한 국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무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공공자전거가 남원역 출입구에 길게 줄서 있었다. 다른 지역의 공공자전거보다 자전거 상태가 좋아보였고 꽤 신식자전거가 대부분이었다. 호탕한 인상의 역무원 아저씨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역무실에서 여행자들의 짐도 맡아주고 있음을 알려주셨다.

 

 

 

남원은 마을 전체가 푸근하고 향토적인 느낌이 강한 슬로시티 지역이다. ‘춘향전’의 배경을 관광 아이템으로 선정한 도시라는 점도 한 몫을 하는지 마을 전체가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한적한 작은 녹색 농촌마을의 모습이다. “허, 녀석!!” 남원 서원에서 막 나오셨는지 흰 전통 복장에 갓을 쓰신 어르신께 사진 촬영 양해를 부탁드리며 “이몽룡 도련님 같으셔요!”라고 순진무식한 농담을 던지니 어이가 없으셨던 걸까 부끄러우셨던 걸까 활짝 웃음을 지어주셨다. 작은 가게를 지키며 한가롭게 쉬고 계신 어르신들은 자전거를 타고 멈추길 반복하며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우리를 지긋이 미소로 바라보시거나 먼저 다가와서 마치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계시는 듯 저쪽으로 가라고 일러주셨다. 중간 약국에 들려 바르는 모기퇴치제와 비타민 음료를 각각 2병씩 샀다. 그냥 마시지 말고 광고를 찍어보자며 카메라를 들고 비타민 음료를 들이키니 “어린 게 벌써부터 약물에 의지해”라며 까르르 웃는 친구. 소소한 그 순간이 참 즐거웠다. 약제사 언니, 삼촌들이 “어머머머 여행 왔나봐”라고 귀엽다는 듯 속닥이시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우린 무얼 하든 누가 봐도 남부럽지 않은 청춘인걸까.

 

 

 

주민분들의 도움을 받아 자전거를 타고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만복사지가 나왔다. 고려시대의 절터다. 지금은 황량한 빈 터만 남아 넓은 풀밭 한 가운데 석탑 하나와 작은 집채 하나만 우뚝이 있었다. 홀로 여행 중인 또래 여행객이 이미 풀밭을 제치고 들어가 석탑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대로 길을 따라 가니 금방 광한루원에 도착했다. 광한루원은 나들이를 나온 이몽룡이 그네를 뛰는 춘향을 발견하고 첫 눈에 반한 첫 전개의 배경이 되는 장소다. 춘향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춘향관에는 춘향전 사이사이 등장한 시조들이 그림과 함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한자로 쓰인 시조를 읊고 대강의 뜻풀이를 시전 하니 친구가 다시 보인다는 눈동자로 엄지를 치켜세운다. “‘선상에 모셔 달라’는 춘향의 유언이 신분상승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상징한다는 국어문제가 나와서 대부분 애들이 다 틀렸는데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고~~.” 고등학생 때 열심히 배워두길 잘했나, 오래된 춘향전 얘기를 이어가며 여행이 더욱 풍만해졌다.

 

춘향의 수절을 기리기 위한 춘향사당에 들어서며 친구가 “남원 오길 잘 했네! 춘향이 보면서 정절을 좀 길러!”라며 농담을 던졌다. 사당 안에 춘향의 인물화가 모셔져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가지런하고 얇은 눈썹, 작지만 새침하게 예쁜 눈매와 작고 앵두 같은 입술은 그야말로 남원 제일의 미녀로 제격이었다. 호수가 두르고 있는 공원 곳곳에 이야기가 담겨 의미가 더해졌다. “뻥쟁이들! 야 여기서 그네 있는 데까지 안보이잖아!” 춘향이 도도하게 뛰었을 그네도 타보고, 그런 그녀를 넋이 나가 바라보았을 몽룡이 서 있었을 법한 곳에서 그네가 어디 보이나 한참을 찾았다.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작게 마련된 민속놀이 체험터에서 별 다른 기다림 없이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먼저 있던 두 꼬마 아이는 그네를 탔고, 부부는 널뛰기를 하며 하하호호 즐거워했다.

 

춘향이 모친네인 월매집의 작은 연못에는 춘향과 몽룡의 조각상이 한 가운데 있었고 그들이 들고 있는 항아리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춘향가에 나오는 ‘사랑가’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안내판이 써 있었다. 100원 짜리로 1300원이 되도록 시도했지만 결국 사랑가는 들을 수 없었다. 뒤돌아서 다시 돌아본 춘향 몽룡 조각이 왠지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다고 느껴졌다. 광한루원 한가운데 오작교 옆 터에선 저녁에 있을 불빛공연의 무대를 준비 중이었다. 한복을 대여해주기도 했지만 부끄러워서 입지는 못했다. 현대 한복은 아니었고 주로 춘향과 몽룡이 떠오를만한 전통한복이 있었다.

한바퀴 돌고나니 금새 출출해져 밖으로 나와 내일로 발권자로 할인쿠폰을 받은 추어탕집을 찾았다. ‘정식당’ 양 옆으로 다른 추어탕 음식점도 연이어 있었다. 서울에서 먹던 추어탕은 뼛가루가 많이 씹혀 좋아하지 않았는데 허기져서 그랬는지 소식 원칙도 잊은 채 국밥 한 대접을 국물도 남기지 않고 다 비웠다. 여행은 결국 먹거리가 남는 거라더니 사실인 것 같다.

 

 

계획은 늘 틀어지게 마련이지만 차선책을 최선책이 되도록 순발력과 유쾌함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을 닮은 여행이 아닐까. 남원에서의 흙내를 더 맡고 싶었지만 시야가 보이는 선에서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며 우리는 남원역으로 몸을 옮겨 또 다른 일정을 시작했다. 오전 중에 짰던 계획상으로는 저녁 7시쯤 순천에 도착해 순천만 전망대에서 순천만의 자연과 함께 노을을 감상한 뒤 노래 ‘여수 밤바다’로 유명해진 여수로 이동해 야경을 감상하려 했다. 그러나 기차에 탑승해 있던 많은 사람들도 시계와 하늘을 번갈아 보며 초조해하던 눈치였고, 우리는 기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차창 너머로 보이는 노을의 시작에 이전의 계획을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순천역에 도착했을 때는 해질녘 노을로 하늘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순천역 2층에서 철도를 끼고 번지는 노을을 감상했다. 여수에서의 일정을 다음날로 미루고 순천에서 야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마감을 서두르는 순천역 2층에서 노을이 끝날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다 밖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붉은 기운 없이 차가운 밤하늘이 뒤덮었다. 역 앞에 계신 순찰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야경을 보기 위해 어디로 가야할지 물었다. 익숙한 듯 멋쩍은 듯 죽도봉의 전망대를 추천해주셨다. 괜히 길을 잃을까봐 택시를 탔다. “어디서 오셨어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기사님이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우리 일행에게 능숙하고 장황한 수사를 곁들여 다음날 돌아야 할 여행 코스를 설명해주셨다.

“어디보자, 반나절밖에 시간이 없으면 화엄사 송광사는 보지도 못하겠네. 거 절 한 군데 정도랑 순천만은 다녀와요.”

 

내려오는 길은 택시가 없을 거라고 콜택시 명함을 전해주신다.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하천의 자연이 밤을 밝히는 내부 도심의 도시적 불빛과 이질적으로 어울려 둘러싸 나름대로의 독특한 장관을 만들고 있었다. 유독 야경의 빛을 잘 찍는 카메라 덕분에 신이나 사진을 여러 장 찍고 함께 하는 친구와의 소중한 인연을 감사했다. 계획이 틀어져도 투정을 부리거나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당연한 마찰과 착오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을 그저 즐거움의 여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이 노을을 놓쳐, 같이 죽도봉에 올랐던 두 여행객과 죽도봉을 내려오는 길에 인사를 나누었다.

“선암사랑 송광사 두 군데 다녀왔어요. 오늘은 찜질방에서 잘 것 같네요. 괜찮으시면 역 근처까지 같이 택시타고 가실래요?”

20대 초반의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두 여자도 내일로 여행을 온 것이라 했다. 편한 복장에 어깨 위로 크게 짊어진 배낭이 누가 봐도 여행객임을 보여주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모습이겠지.

“두 분이라도 만나서 다행이에요. 여자 둘이 내려가기엔 너무 무서운 길이네요.”

‘함께’라는 자신감으로 내려오는 길엔 택시 대신 도보를 선택했지만 곧장 귀신이라도 나올 것같이 가로등, 조명하나 없고 꽤 얽혀 있는 어둑어둑한 산길에 네 명의 여자들이 손을 꼭 잡고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이런 저런 대화를 더 많이 주고받곤 했다. 그렇게 새로이 만난 짧은 인연과도 인사로써 세 번째 날을 마무리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있는, 우리들이 어우러진 이 사회가 내 삶이 참 소중하다. <3회로 이어집니다.> 연세대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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