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시 읽는 일기] 황인찬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2023) 中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픽사베이

옆집 감나무에는 아기 머리통만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누가 키웠을까 사람도 살지 않는게 산책하다 무심코 한 말에 저걸 누가 키워 알아서 자라는 거지 그가 말했습니다

담장 위로 나란히 앉은 새들은 정답게 울고 겨울을 맞아 잔뜩 털이 올랐네요
과연 그렇군요 다 알아서 자라는 것이군요

언덕길 경사를 따라 햇빛 떨어지는 오래된 동네
새들이 햇살 아래 자주 웃고 떠든다는 생각

살기 좋은 동네 같아,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 떠밀려오던 날, 이삿짐을 풀며 그가 했던 말

그런 말을 듣고 보면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요

인적 없는 집에도 감은 열리고
삶도 사랑도 그렇게 근거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내일은 오고
때때로 눈도 오고 비도 내리겠지요

우리는 이 동네로 떠밀려왔고, 어느새 짐을 풀고 있었을 뿐이지만

깨어도 꿈결 속아도 꿈결
꿈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가 늙었을 때,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동네에서 곱게 늙은 두 노인이 되었을 때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누구에게 해 끼치는 일도 없이 계속되어온 그저 선량한 우리 삶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는 가을

밤마다 옆집에서는 잘 익은 감들이 하나둘 떨어졌고
그때마다 사람 머리통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위클리서울/ 문학동네

부러 심지도 거두지도 않아도 알아서 크고 알아서 떨어지는 그 주황색 감들을 이 동네에서 처음 보았을 때, 여기는 감나무가 많구나 남쪽에는 무화과 나무가 많은데, 너는 옆에서 작게 말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노인 보호 구역 마크가 세워진 폭이 좁은 동네. 느리게 걷는 노인들 사이로 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계속 불었다. 이곳에 온 거야, 이곳에 밀려온 거야. 조금 더 어릴 때, 대학 주변에 살던 친구들은 나이가 들 수록 점점 더 밀려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이와 집값을 따라 점점 더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다고. 처음 물가에 던진 돌이 천천히 가라앉고 그 옆으로 둥근 파문이 이는 것처럼 서쪽으로, 북쪽으로 우리가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고

가라앉는 유람선에서 정신을 잃은 후 문득 깨어났을 때 별안간 아름다운 백사장이 펼쳐지는 것처럼,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가을이면 감나무가 자라는 아름다운 동네. 그 떨어지는 감이 실은 사람 머리통이라는 것을 꿈결처럼 알려주는 이 시를 읽은 것은 연희동이었다.

이제 곧 떠날 나의 집 연희동. 집앞이라고 부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카페에 앉아, 같이 살던 친구의 물건을 대신 팔아 주기 위해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심지도 거두지도 않아도 비 내리고 눈 내리는 계절을 여기에서 오래 보내왔지만 왜 그렇게 많은 기억을 여기에 심어두고 내가 다 거둔 것 같은지. 익숙한 회한에 젖어 감상적인 얼굴을 하게 만드는 이사를 준비하는 한 달을 보내면서, 나는 한 달 동안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한 달 동안 같은 꿈에서 깨어 났는데
 

깨어도 꿈결 속아도 꿈결
꿈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내가 다 허무는 기분으로 짐을 치웠다. 연희동에 살던 집은 사람 사는 방보다 짐을 쌓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더 커서 꼭 창고 같았다. 빈 공간은 물건을 자꾸만 부르더라. 정리되지 않은 채 대중 없이 쌓인 것들 보면 꼭 무슨 둥지 같고 그걸 허무는 나는 무슨 새 같은데, 이런 비유를 떠올리는 나의 감상적인 마음도 그 둥지에 함께 쌓아 놓은 물건 같더라.

감나무 밑에 감이 있는 것처럼 어쩜 시집을 펴면 요새 겪은 것들만 가까이 보게 되는지. 이 시를 한참 바라보았다. 새로 이사하게 될 동네는 감나무가 많고 이제 나와 함께 살아갈 이는 선량한 미래를 기다리고, 우리는 동네를 걸으며 살기 좋은 동네라고, 누군가를 만나면 또 살기 좋은 동네라고 말하고, 이 동네를 마치 운 좋게 구한 질 좋은 중고상품처럼 만지고 닦고 있었는데 이 시도 그런 말들을 하는 게 못내 신기했다.

몇달 간 읽고 충분히 쓰지 않아서 손가락이 주춤거리는 것도 못내 불편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이렇게 앉아 무언가를 주절거릴 날들은 다시 많이 있겠지. 가만히 있어도 내일은 오고 눈도 오고 비도 내리겠지. 쓸 말이 없어 계절만 이야기했던 시간을 지나 정말 겨울이 왔다. 겨울은 해를 걸쳐 계속되는 유일한 계절이다.

계절이 지나는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 잘 지내고 계실까. 잘이라는 말은 굳이 떼고, 지내고 계실까. 계속 눈도 오고 비도 내리겠지요. 그런 반복을 상상하다보면 문득 망연해지고 또 꿈결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겠지요. 일상에서 반복을 발견한 황인찬이 먼 과거와 먼 미래를 한 땀으로 잇는 순간에서 꿈결을 발견하는 것처럼 감나무 아래에서 이 동네는 오래도록 계속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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