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시 읽는 일기] 서대경 - 차단기 기둥 옆에서 /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中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위클리서울 DB

몇 해 전, 처음 그가 내게 이 시를 아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나는 좋아하는 시라고 당신도 이 시를 좋아하느냐고 답했다. 어느 맥락에서 이 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이리저리 물으며 맞닿을 접점을 찾는 흔한 대화 중이었을 것이다. 문학을 좋아하세요? 시를 좋아하세요? 그러면 어느 시인을 좋아하세요?···. 이런 유의 어색한 대화들을 이어나가는 것은 때로 고역이지만, 좋아하는 목록에서 구체적인 ‘시’를 만나면 느낌이 다르다. 하나의 시를 같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나눌 구석이 있다고 느껴서였을까, 갑작스럽게 열린 마음에 몇 해전 그와 나눈 대화는 계속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그날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로 무엇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제 일처럼 구체적이고 명확했던 기억은, 시간 저편에 잠시 치워두면 점점 더 흐릿해져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도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 시의 방식대로 그날의 기억을 불러오면 그렇다. 어느 날 나는 카페에 앉아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대화를 하고 있는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으나, 분명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웃음소리, 염소의 기분에 대해 말하는 그의 술 취한 목소리, 너무나 생생하지만 동시에 선명하지 않은 어떤 그리움 속에서, 건너편 카페에서 반짝거리는 조명들을 바라 보았다.

요약하면,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을 생각하면 마치 꿈 같았다는 이야기다. 꿈을 꾸는 사람의 ‘지금’처럼 모든 일들이 생생하게 믿겨지고, 꿈을 나온 사람의 후일담처럼 그 일들이 불투명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모든 ‘기억’들은 그 사이로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매일 실제로 겪는 일들은, 머릿속에서 선명함과 불투명함의 사이에서 차곡차곡 쌓여나간다. 긴 인생을 다 살고난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에서 인생이 마치 꿈 같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래서일까. 우리의 인생은 결국 꿈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덩어리 같을지 모른다고, 다 산 사람처럼 말해볼 수도 있겠다.

ⓒ위클리서울/ 문학동네

그렇게 입을 떼는 순간, 옆에서 한 마리의 염소가 운다. 웬 염소인가 싶어서 둘러보니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 옆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염소가 될 이유는 없었으므로 다시 생각해보지만, 나는 분명한 염소가 되고 말았다. 이 시는 나를 갑자기 염소로 만든다. 지난 기억들을 돌아보며 이게 꿈인지 꿈이 아닌지 뒤늦게 가늠할 시간을 주지 않고, 꿈인지 모를 기억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다. 마치 당장 꿈을 꾸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들듯이, 마치 꿈을 꾸는 동안 이 모든 상황이 ‘어느 날’ 벌어진 것처럼 황당해도, 너무나 생생해 그대로 믿기는 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화자가 ‘염소’가 되었던 꿈을 단순히 들려주는 것을 넘어선다. 꿈을 꾸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의 생생함을 통해 직접적인 꿈 같은 경험의 순간 자체를 읽는 사람이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 늘상 꿈을 꾸고 나면 깨어난 직후에만 명료하고 곧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 이질적이고 생생한 찰나의 경험을 다시 반복해서 느끼도록 만든다. 모든 ‘글’은 늘 특정한 사건 이후에 쓰인 것이지만, 시를 비롯한 문학의 힘은 읽는 이를 때로 ‘바로 지금’ 어떤 순간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의 지난 기억들이 꿈 같은 것이라면, 반대로 우리가 겪지 않은 이상한 꿈들도 우리의 기억 같은 것이 될 수 있는 것. 문학은 우리가 겪어보지 않은 기억들을 이런 방식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염소가 되어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꼈던 그 순간 불어오는 생생한 바람의 온도와 풀의 촉감 같은 것들이 남겨진다.

몇 해 전 그와 함께 이 시를 나누었던 그날을 떠올린다. 그인지 나인지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웃었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정확히는, 꿈에서 깨자마자 느꼈던 그 희미한 감각, 다시 꿈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그 순간으로 향하고 싶던 마음을 해소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알 수 없다. 그와의 기억들은 내게 충분히 꿈 같아서, 이런 시를 통해서 다시 한번 그 꿈으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기분을 상상할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염소가 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맞은편에 앉는 기분을 상상한다. 문학은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므로, 나는 여전히 그 생생한 꿈의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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