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장이 있는 건물은 밖으로 나와서도 약 5분 여는 족히 걸어야 했다. 검찰청 정원 잔디 위에 쌓여있는 백설들이 한낮의 햇볕을 반사하며 준오의 눈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눈물이 고여왔다. 준오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주변에 심어져있는 이름 모를 나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녹색의 나무 잎파리를 보면 좀 괜찮아질까 하는 것이었지만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오염에 찌든 나무 잎파리의 변한 색깔 탓이라고 애써 생각해야 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다른 쪽을 보니 희뿌연 색의 유치장 건물이 눈물에 가려진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어디선가 참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준오는 문득 그게 종달새소리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빨리 봄이 와야 할텐데.

그러고 보니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눈도 많이 내렸다. 지난번 내린 폭설은 38년만의 기록이라고도 했다. 준오의 걸음은 겨울 내내 안방에만 들어앉아 있다가 이른봄을 맞아 처음 산보를 나온 노인네의 그것처럼 느릿느릿했다.

하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치장건물 벽의 희뿌연 색이 좀더 선명해지면 해질수록 가슴속의 요동치는 방망이 소리는 커지고 있었다. 이러다 심장병이라도 걸리는 건 아닐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도 그랬었다. 준오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어버이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날은 그가 처음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하는 날이었다. 학부모들을 전부 모시고 하는 어버이날 기념 행사. 준오는 학년 대표로 뽑혀 넓은 운동장 맨 앞에 놓여있는 단상에 올라가 웅변을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가 웅변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고려장'이었다.

지금 그 내용이라든가 하는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가지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건 바로 그가 처음으로 경험했던 '떨림'이란 낯선 느낌이었다. 그 날 단상에 서기 위해 그는 정규수업까지 빠지는 학교측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거의 한달 여간을 연습에 매달렸다. 수업이 끝나면 역시 학교측에서 제공해주는 빵 등의 부식을 먹어가며 과외로까지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연습했던 것인데 그 낯선 두 음절의 단어는 그 결과를 너무 어처구니없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의 순서가 되어 단상에 올라가려고 할 때부터 갑자기 그 괴물은 준오의 가슴에 잦아들었다. 콩...콩...콩, 하던 처음의 미동은 시간이 가까워 오면 올수록 그 강도가 세어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준오의 혼까지 빼앗아버릴 정도로 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혼돈을 간신히 억누르며 단상에 섰을 무렵 그는 거의 혼이 나가버린 상태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슴 안의 진동이 다리에 전달되는 것이라고 준오는 생각했다. 단상에 놓인 마이크의 높이를 조절해주러 온 선생님이 다행히 이런 눈치를 챘고 품안에 들어있는 웅변원고를 꺼내어 놓으면서 사태는 간신히 수습되었다. 반은 외우고, 반은 원고를 읽다시피 하며 웅변을 마쳤다. 다행히도 운동장에 모여있던 청중들은 전부 이 조그마한 '똘똘이'의 당찬 목소리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지만 준오는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는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해낼 수 없을 정도가 됐던 것이다.

원고를 넘겨주었던 선생님은 이후 조용히 준오를 불렀다. 그는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런 것이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안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위안 끝에는 "원고 한 장 뛰어넘은 것 알지?"란 말도 붙어 나왔다.

어찌됐든 지금이 그랬다. 이후 여러 번 많은 사람들 앞에 설 기회가 있었던 준오였지만 처음의 혹독했던 경험 탓인지 긴장이나 떨림 같은 것은 다른 사람만의 얘기인 것처럼 생소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괴물이 거의 15년여가 지난 지금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태연해지려고 무척 노력하면서도 그는 그저 억제되지 않는 나약함을 나무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나오는 한숨에 기대를 거는 게 전부였다.

희뿌연 건물은, 희뿌연 색이 아니었다. 연한 하늘색이었는데 그렇게 보였던 것이었다. 쌓여서 빛을 발하고 있는 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벽 한 귀퉁이에 마치 무슨 고궁의 입장티켓을 파는 매표소 마냥 조그맣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안은 캄캄해서 보이질 않았다. 시커먼 유리로 된 입구를 몇 차례 두들기자 매표소의 아가씨 대신 시커먼 얼굴 하나가 안으로부터 굵직한 목소리로 화답해왔다.

"서울일보에서 오신 분이오? 잠깐만 기다리슈."

윤검사의 친절한 조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바로 옆에 있는 철문이 잠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덜커덩하고 열렸다. 바로 옆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하늘색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역설적인 장중함을 주는 시커먼 색의 철문이었다.

"들어오쇼."

그리고 그는 신분증을 요구했고 몸수색을 하면서 의례로 하는 거니까 기분 나빠하진 말라는 자상한 설명도 곁들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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