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그런데 남순이 김숙영이로 돼 있는 건 뭐지? 하긴 그거야 굳이 어려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였다. 호적상 이름이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경훈이란 살해용의자는 그 남순의 동생인데. 남순을 닮아서인지 키가 훌쩍 컸던. 맞다. 그 아이의 이름이 경훈이였다.

어렴풋한 기억. 역시 남순과 마찬가지로 두껍게 쌍꺼풀진 눈에 그 눈을 다 가리고도 남을만한 길다란 눈썹. 준오를 비롯 동네 아이들은 그를 '경운기'라고 불렀다. 어떤 아이들은 '왕눈이'라고 했다. 하나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또 하나는 얼굴 생김새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별로 말도 없고 늘 혼자였는데 유독 준오네 집에는 자주 놀러와 동생들과 어울리고는 했다.

틀림없었다. 그는 준오가 중학교 입학과 함께 서울에 유학을 떠나기 며칠 전에도 준오네 집에 놀러와 함께 잠을 잤던 그 경훈이 틀림없었다. 왜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서는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까.

준오는 뚱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김경훈이 지금 어디있죠?"

"아니 이 친구가 왜 이래."

지나치게 돌변한 준오의 태도에 오히려 화들짝 놀란 뚱의 대응이었다. 하긴 뚱반장이 뭘 알겠는가.

"그 친구 지금 여기 서에 있나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넘어간지가 언젠데…"

뚱은 이미 검찰에 송치된 다음이었다. 하긴 사건 발생하고도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검찰로 가는 길에 준오는 택시 안에서 계속 경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무슨 말못할 사연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절대 생길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애썼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오랜만의 휴가 길에 접한 유산과 죽음. 그리고 이 천인공노할 살인사건의 주인공들. 그들이 바로 준오의 인생에 절대 지울 수 없는 그런 추억들이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비틀어지게 되었는지, 절로 고개가 내둘러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꾸 마음 한구석을 파고드는 깊은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는 것이었다.

빨리, 한시라도 빨리, 경훈을 만나는 게 일단은 최선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할 것이었다. 말이 안되면 글이라도 쓸 수 있을 것 아닌가. 경찰은 실어증이라고 하지만 그는 분명, 준오에게는 무슨 얘기든 할 것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미희로부터 걸려온 전화. 미희는 정사를 나눈 다음 날이면 늘 그렇듯이 보신을 시켜주겠다며 점심약속을 하자고 했다. 농담 삼아 "괜찮았어?" 라고 물으며 전날의 격렬한 정사를 회상하곤 하던 준오가, 성의 없이 몇 마디 하지 않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알았어, 있다가 시간 봐서 전화해" 하고 답지 않게 풀죽은 목소리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던 그녀는 아니나 다를까 채 일 이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뭐 안 좋은 일 있냐, 왜 그러느냐는 게 요지였는데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준오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이내 채질을 포기하고 말았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했던가. 아무리 기가 센 여자들도 남자들의 다리 밑에서는 얌전한 암컷이 되고 만다는 한 신문사 선배의 술자리 얘기가 떠올랐다.

이미 결혼 5-6년째에 접어드는 그 선배는 이런 말도 했다. 부부가 그렇게 앙앙대며 싸우다가도 아침만 되면 아내가 복숭아꽃 냄새가 풍기는 오묘한 얼굴을 해 가지고 남편 앞에서 아양을 떠는 것도 다 그놈의 다리 때문이다…그 놈 하나만 제대로 갖춰두면 세상사는 데 별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준오는 갑자기 그 머리 속에 오버랩 되어 떠오른 두 개의 영상 때문에 잠시 난감해했다. 하나는 남순과의 그것이었고, 또 하나는 바로 어젯밤, 미희와의 그것이었다.

경찰서에서 검찰청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준오가 택시에서 내려 입구로 다가가자 낯이 익은 경비병이 아는 채를 했다. 준오는 뚜벅뚜벅, 채 녹지 않은 눈 사이로 나 있는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검사실을 찾았다. 간혹 한 두 사람이 지날 뿐인 한적한 로비를 지나서 우측으로 꺾자 준오의 방향을 지정해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105호 윤준식검사. 이미 뚱에게서 담당검사의 이름을 들은 준오였다.

윤검사는 자리에 있었다. 번들거리는 머리는, 기름을 바른 것 같았는데 남자 얼굴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투명하고 하얀 피부와 어울려 전혀 거북함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30대 후반쯤 되었을까. 분명 초면이었는데 이미 기자임을 직감했는지 준오가 채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준오를 맞았다.

"이런 연휴에 어쩐 일이십니까."

준오가 신분을 밝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생긴 것과는 다소 다른 느낌의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김경훈 때문에 왔습니다."

"아…이번 살인사건의 김경훈요? 그 친구는 왜죠? 이미 초동수사는 다 끝난 상태인데. 아하, 이런 차라도 한 잔 드려야 하는 건데…."

"아…아뇨. 괜찮습니다. 방금 마셨습니다. 김경훈이는 제가 좀 알 것도 같은데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요."

"아는 사람이라고요?"

의외라는 듯 검사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예."

짤막한 준오의 대답에 검사는 조금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치장에 있긴 한데 일체 외부 면회를 하지 않고 있는데요. 국선 변호사 선임까지도 거부했어요. 게다가 얘길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말도 전혀 안하고 있구요."

윤검사는 그리고 무엇보다 규정상 지금 일체 면회를 할 수 없게 돼 있다는 얘기도 했다.

준오는 어느 정도는 사정 얘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간략히 고향 얘기와 경훈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남순을 꺼내선 안 된다는 것을 그저 막연하게 느꼈고 그 얘기만큼은 아껴두었다.

"이거 곤란하네. 사정 얘기를 듣고 보니 그냥 모른 채하고 거절할 수만도 없을 것 같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두 세 번 전화를 걸더니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연휴기간이라 그렇게 깐깐하진 않네요. 연락을 해놓았으니까 한번 들어가 보세요. 근데 뭐 별다른 얘기를 들을 순 없을 텐데."

그는 김경훈의 사건 이후 상태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얘기를 해주었다. 전혀 미동도 않고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는데 그를 보면서 간수들이 '마치 돌부처 같다'고 까지 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준오는 국과수에 의뢰한 경훈의 정신이상 분석 여부에 대해 물었다.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글쎄, 제가 보기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지, 정신이 이상한 것 같지는 않던데…"라며 준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마디 더 거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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