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그의 고향은 그렇게 변해갔다. 초등학교는 계속해 폐교한다는 소리가 나돌았지만 아직까지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들도 없었지만 폐교가 되었을 경우 나머지 몇 안되는 학생들의 고생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족히 이십리 길은 더 넘게 통학을 하게 되는 것이었고 당연히 주민들은 양손양발을 다 들어 반대 의견을 쏟아냈다. 하지만 오래 갈 일은 못되었다. 그런 반대도 현실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그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는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기껏 외지인들의 합숙소 등으로나 쓰이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준오가 가슴아픈 건 초등학교의 폐교와 함께 그의 가슴속에 여태껏 살아 숨쉬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의 영혼을 지배할, 추억의 편린들마저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물론 그 추억의 가장 큰 부분에 한 여자, 남순이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단 한번의 정사. 그리고 영원을 떠올리게 했던 그녀.

복구촌 어귀 사거리를 지나 약 20여분을 걸으면 마을이 나타난다. 준오의 집은 그 마을에서도 바닷가 쪽으로 한참 치우친 곳에 있었다. 사방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마치 소나무로 된 병풍 안에 들어앉은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리고 거기서 오솔길을 따라 약 500m쯤 간 곳에 남순의 집이 있었다.

준오도 그곳, 그리고 그 집에서 태어났고 남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준오의 기억에 남아있는 최초의 남순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의 모습이었다.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분명히 함께 태어나 함께 자랐는데 왜 그전까진 기억이 없을까, 남순을 떠올릴 때마다 궁금해했던 준오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초등학교 때부터 남순은 절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부터의 기억이 지나치게 강해서일까. 유난히 키가 컸던 그 아이. 항상 분홍색의 짧은 치마에 하얀색 티셔츠를 나풀거리며 뛰어다녔던 그 아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담뿍 담은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라도 할 듯했다. 초등학교 때 기억나는 그녀의 첫 인상은 그랬다. 준오는 그녀가 코스모스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준오가 살고 있던, 그 곳 어디서나 지천으로 피어 행인들의 낯을 간지럽히던 코스모스. 무슨 이유였는지 그 동네엔 코스모스 꽃이 유난히 많았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린 시절 기억은 온통 코스모스로 도배돼 있었다. 기실 준오네 집만 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아니지만 준오가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닐 무렵까지 가을이면 어디를 둘러봐도 빨강 파랑 하얀색의 코스모스 꽃 천지였다. 사계절 중 봄, 여름, 겨울 삼계절만 울타리가 있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총천연색으로 만들어져 그나마 초라한 집의 풍광을 가려주던 울타리는, 이내 겨울이 되면 앙상한 줄기만을 남긴 채 형체도 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코스모스 세상.

소녀의 외모는 바로 그런 코스모스를 닮아 있었다. 때 이른 소슬바람에도 소리 없이 흔들리다 이내 꺾여 버리고 말 것 같은 나약함을 간직한 채. 비라도 내릴라치면 겁먹은 듯 가녀린 목을 한껏 숙여 눈물방울을 금새 뚝뚝 떨어뜨리고 마는 어린 코스모스 마냥. 피부는 자그마한 호숫가 물위에 어려있는 푸른 가을 하늘을 고스란히 담았다. 건드리면 파란 물이 톡 터져 나올 것만 같은 투명함. 몸은 코스모스의 줄기였다. 다른 애들에 비해 머리 하나쯤은 더 튀어나온 큰 키는, 하지만 그녀의 지나칠 정도로 메마른 몸 때문에 두 배, 세 배는 더 커 보이는 것이었다.

반대로 준오는 땅강아지, 라고 불리었을 정도로 작았다. 특별히 먹을 것을 못 먹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진.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은 물론,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역시 신은 공평했다.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3년 중 약 2년 만에 정말 주변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키가 쑥쑥 늘어난 것이었다. 하루가 달랐다. 전혀 다니지 않던 목욕탕에 가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번씩은 꼭꼭 들러 키를 재보았다. 커 가는 자신의 몸을 눈으로 실감해보고 싶은 거였다.

그리고 그는 새삼 느꼈다. 사람의 몸이란 게 이럴 수도 있구나. 놀려대던 친구들의 입에서 땅강아지,라는 소리가 쏘옥 들어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질펀했던 운동장의 흙들이 무척 사람들을 귀찮게 했던 초등학교 입학식 날. 준오는 이미 학교에 다니던 형, 누나 그리고 엄마의 손을 잡고 논과 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학교에 갔다. 아주 따뜻한 날씨. 한기가 덜 가실 만도 했지만 그 날 만은 아니었다. 얼었던 땅들은 제법 녹아 스멀스멀 아지랑이들을 뱉어냈다. 입학식 날을 위해 몇 달을 쳐다보기만 하고 애써 아껴왔던 새 운동화는, 그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흙투성이가 되더니 이내 논밭 길에 이르러서는 아예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진흙에 지푸라기들이 잔뜩 묻어 중간에 몇 번 걸음을 멈추고 풀 섶에 문지르기를 계속했던 준오는 누나와 형의 질책에 그마저 포기해버렸다. 잔뜩 무거워진 운동화를 끌고 운동장에 들어서자 저마다 가슴에 노란색 손수건을 매단 햇병아리들이 이제 새로이 시작되는 새 인생에 대해 막연한 동경의 눈초리들을 하고, 쏟아지는 봄 햇살 아래서 그들의 새로운 인생을 이끌어줄 선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치고는 꽤 큰 운동장이었는데도 사람들은 가득했다.

신입생들이라야 고작 100여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머지 상급학생들도 이제 갓 들어오는 햇병아리들을 알현하기 위해 전부 모였고 거기다 신입생들을 따라 나온 할 일없는 가족들까지, 발디딜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준오는 어머니가 이끄는 대로 신입생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남순을 볼 수 있었다. 큰 키 때문에 그녀는 유독 시야에 금방 들어왔다. 그녀 옆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가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할머니였다. 어머니가 아는 채를 하자 남순이 고개를 돌렸고, 이내 준오는 남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눈이 시려왔다. 그녀의 눈부신 얼굴 탓만은 아니었다. 눈물이 씀벅거려 재빨리 고개를 숙여야 했으나 당돌한 그녀의 시선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그의 숙여진 고개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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