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오가 태어나고 살았던 지금의 그곳은 원래 아버지의 고향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도회지 태생으로 6.25 전쟁 때 그곳으로 흘러 들어왔는데 어머니를 만나면서 그곳에 정착해 살게 된 것이었다. 그곳은 바로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어머니의 아버지, 즉 준오의 외할아버지는 그곳에선 날리는 재력가에 세도가였다. 준오가 어렸을 적만 해도 그곳에선 외할아버지네 땅을 밟지 않고선 길을 다닐 수가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집도 마치 궁궐 같았다. 하늘을 찌를 듯 처마 끝이 휘어져 오른 솟을대문 바로 옆에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행랑채가 있었고, 손님들을 맞이할 때 쓰였다는 사랑채, 그리고 곡식들과 각종 농기구들을 보관해 놓은 창고에 방만 아홉 칸이 넘는 안가까지 하면 족히 집만도 7-8채는 되는 듯했다. 그 집들 주변은 그런 위세를 뒷받침해주듯 기와를 근엄하게 머리에 쓴 담이 빙 둘러 쳐져 있고 그 밖으론 사시사철 날카로운 가시로 사람들의 근접을 막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겹겹이 싸여 있었다. 정원은 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나무들의 천지였다.

봄이면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났고 여름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녹음이 우거졌다. 단풍이 드는 가을, 그리고 하얀 백설이 꽃의 화려함을 대신해주는 겨울까지, 그곳엔 그야말로 극락세상이 존재하는 듯 했다. 준오는, 때문에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곤 언젠가부터 그곳에 가는 걸 꺼려했었던 기억이 있다. 슬레이트 지붕의 집 한 칸에 옹기종기 얽혀 사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그곳에 가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준오 만의 경우는 절대 아니었다. 바로 아버지도 그랬던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술만 한 잔 얼큰하다 싶으면 항상 자신의 신세 타령을, 준오와 다른 형제들을 불러놓은 자리에서 늘어놓곤 했는데 항상 귀가 닳도록 들은 그 얘기의 요지는 '내가 이곳에 흘러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아니 너희 에미만 만나지 않았어도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란 것이었다.

아버지는 6.25전쟁 때 군에 입대했다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가 북한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이곳에 숨어들었고 마침 그 마을에서 그래도 사정이 제일 나았던 외할아버지의 집에 기거하게 된 것이었다. 며칠을 집에서 잠도 재워주고 밥도 먹여주고 하던 외할아버지는 아예 아버지를 묶어둘 생각을 한다. 번듯하게 생긴 용모에 일본 유학 경력까지 있는 젊은 도회지 남자는 그 지역에선 찾아보기조차 힘든 '난' 인물일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욕심을 낼만도 했을 것이다. 방법은 다섯인 딸 중 아직 출가를 안하고 나이가 어느 정도 꽉 찬 셋째 딸과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어쩌면 그건 아버지 당신이 더 원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도회지에서 살았고 제대로 배워 학식도 있는 처지였지만, 당시는 전혀 보잘 것 없는 도망자에 불과했고, 자신이 머물면서 실제로 보고 느낀 그 집의 부(富)도 탐이 났던 것이다. 게다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셋째 딸 역시 예쁘장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딸들은 바깥출입을 시키지 않는다는 외할아버지의 완고함 때문에 간신히 동네 인근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한 학력이 전부인 그녀였지만 차분했고 나름대로 여자로서의 매력도 있어 보였다.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한다. 그리고 외가 쪽 사람들과 인근 동네 사람들만 참가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고 그때부터 본격 처가살이를 시작한다.

한때 아버지가 그 지역 경찰서에서 경찰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준오는 아버지의 술취한 소리를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역시 오래가진 못한 모양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 지역 일대는 빨치산들의 소굴이었고, 셋째 딸의 장래, 즉 혹 청상과부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앞세운 외할아버지의 제지로 그마저 그만두어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습관처럼 이런 말도 하곤 했다. 내가 그때 경찰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은 '최소한' 경찰청장쯤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처가 불만을 자식 앞에서 늘어놓은 아버지도 하지만, 막상 외가에 가면 주눅이 드는 모양인지 그 기세가 수그러들고 마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그런 날일 수록 집에 들어온 아버지의 처가 비방과 신세타령은 더욱 심해졌다. 때로는 그걸 시작으로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기도 했는데, 그런 현상은 아버지가 나이가 먹고 몸에 힘이 빠질수록 정도를 더해갔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한계는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런 행동들이 쏘옥, 들어가 버린 것이다. 준오의 짐작으론 아마도 환갑 무렵부터였던 것 같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준오의 어머니조차 그런 아버지의 변화가 이상했는지 '이 양반이 돌아가실 때가 되었나벼'라고 자식들에게 얘기하곤 했을 정도였으니. 아버지는 그냥 여타의 자상한 촌로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이 되었다.

그리고 자식들이 모두 떠나버린 고향집을 늙은 아내와 단둘이 지키며 조용조용한 삶을 살고 있었다. 비가 오면 수로를 팠고 꽃이 피면 씨를 뿌렸다. 낙엽이 지면 손바닥만한 논밭에서 곡식을 거두었다. 생활에 아무런 불만은 없는 듯 보였다. 자연과 동화된 모습이라고 하면 과장된 것일까. 하지만 준오는 서릿발 같았던 어렸을 적 아버지의 모습과 현재를 비교해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결혼해 서울에서 꽤 그럭저럭 살고 있는 준오의 형이 부모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겠다는 의사를 비교적 강력하게 전했을 때도 그걸 반대한 사람은, 한번씩 서울 나들이를 할 때마다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보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이라고 부러워하던 영락없는 시골노인네 어머니가 아니고, 도회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도회지물을 먹으며 보냈던,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모습에서 그 도회지 냄새를 지우지 못한 아버지 당신이었다.

그러고 보니 준오는 최근 들어 분노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스스로 새삼 놀라기까지 했다. 자식들이나 손주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얼굴엔 항상 잔잔한 미소만이 흐를 뿐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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