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준오의 고향은 서해안에 위치해 있었다. 도회지에서 그곳에 들어가려면 수많은 산등성이를 넘어야 했으므로 '깡촌'이라는 표현이 그럴싸했지만 또 단순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집이 있는 마을에서 약 10여분 정도를 걷다보면 바닷가가 나왔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지만 또 어업을 하기도 했다.

여름에는 몰려드는 새우 떼를 잡느라 전부 바닷가로 몰려들었고 길이가 10여 미터는 족히 되는 사각형의 새우잡이 그물(사방이 대나무로 짜여진)을 끌고 다니느라 분주했다. 물위에서 팔팔 뛰는 새우는 여름, 일손이 한가한 지역 촌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돈벌이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이들은 또 바다로 몰려들었다. 물결 모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해변의 모래밭을 호미같은 도구로 긁기만 하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밀조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개들은 일부는 찬거리나 술자리의 좋은 안주거리로 식탁에 오르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그걸 대부분 손으로 까서 내다 팔아 생계를 연명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전형적인 농어촌.

준오의 집이 있는 동네에서 해변이 있는 곳까지의 공간은 모두가 숲이었다. 마치 줄을 대고 나무를 심은 듯 질서 있게 정리된 인공림. 원래는 자연림이었다고, 준오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었다.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로 빽빽해서 마치 밀림을 연상케 했는데, 때문에 일제시대 전까진 거기서 사는 맹수에 당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고도 했다. 그러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군들이 화목용으로 무자비하게 베어냈고 해방 무렵에는 거의 모래사막이나 다름없을 정도가 되었다. 촌사람들은 약 10여 년을 모래 속에서 헤매야 했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염분 섞인 황금빛 모래들은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언덕에도 쌓였고, 마당에 널어놓은 하얀 빨래 위에도, 동네에 하나있는 우물에도 떨어졌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그들의 생업인 농사에 주는 막대한 피해였다. 벼건, 보리건 농작물들에게 염분 섞인 모래는 가히 치명적이었다. 매년이 흉년이었다. 사람들은 손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하늘을 탓하는 게 고작일 뿐. 그때 사람들에게 정부에 대한 대책마련 요구 등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살던 어느 날 그 지역순시를 나왔던 대통령의 눈에 그런 황량한 광경이 들어간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다음해부터 정부 지원 하에 인공조림 작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채 무릎에도 닿지 않는 어린 나무들은 아직 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야 했고 사람들은 그저 나무가 하루 빨리 자라주기만을 목 빼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준오가 사물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무렵엔 이미 인공림은 그 '훌륭한' 대통령이 내린 막중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만큼 무성해진 상태였다. 질서정연하게 바둑판 모양으로 심어 여전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 나무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끼며 해마다 명절 때면 숲에 들어가 산신제를 지낼 정도로 감사해가며 살고 있었다. 날아오는 모래바람을 피해 날아갔던 산새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숨길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결국 눈에 핏발을 세운 지역 촌사람들의 먹잇감이 되어 사라져야 했던 산짐승들도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간혹 눈에 띄게 됐다. 그 숲 아래는 온통 모래밭이었다. 모래 위의 소나무 숲. 그리고 그 숲 사이에는 오롯한 오솔길이 있었다. 바다를 왕래하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생겨난 생명의 그것과도 같은 그 길가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났다.

동네의 반대쪽은 논과 밭의 들판, 그리고 산이었다. 도회지로 나가려면 그 중간쯤에 위치한 산등성이를 넘어야 했는데 사람들은 그 고개를 '질마제' 라고 불렀다. 서정주 시인의 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거기서 바라본 마을주변의 전경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바로 아래로 펼쳐진 넓은 들판, 그리고 그 끝 쪽에 저만큼 성냥갑처럼 조그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그 너머 방금 얘기한 푸른 숲이 있었다. 그 숲 건너는 바다였다.

숲의 녹색과 진하게 대조를 이루는 푸른빛의 바다. 질마제에서 본 바다는 금방이라도 마을을 삼킬 듯 넘실거렸고 혀를 내밀면 바다의 냄새가 그대로 와 닿았다. 한 폭의 수채화는 바로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준오는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 명절 등을 맞아 고향에 내려올 때면 일부러 그 질마제 고개 못미쳐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산등성이에 올라가 이런 풍광들을 즐기곤 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집까지는 걸어서 족히 30분은 넘는 거리였다. 바로 복구촌이라는 마을의 네갈래 어귀가 나타나고 거기서 우측으로 약 15분을 걸으면 그가 다녔던, 그리고 남순이가 다니기도 했던 초등학교가 있었다. 산등성이 바로 아래에 위치한 초등학교. 정말 많은 추억이 얽히고 설킨 그곳. 하긴 준오나 남순이가 그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불리웠었는데 준오는 언젠가 달라진 초등학교의 명칭이 몹시 맘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마치 자신은 다녀보지 못한 새로운 학교가 생긴 것 같은 기분.

아마 그런 기분은 비단 그 하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었다. 준오가 다닐 때만 해도 꽤 번창했던 그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는 세월이 흐르면서 규모가 무척 작아졌다. 하긴 우선 인근에 있는 마을들부터 변화가 생겼으니. 사람들이 준오처럼 하나 둘 도회지로 떠나면서 인근 마을에선 젊은이들을 찾아보기가 아예 힘들 정도였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곤 준오의 기억에조차 없는 늙은 노인네들 뿐. 그들은 몇 남지 않은 젊은 사람들의 노동력에 의지해 꾸역꾸역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준오의 부모부터가 그랬다. 준오의 아버지는 그래도 마을에서 뿐 아니라 인근에선 꽤 학식 있고 재능 있는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다. 최소한 준오가 중학교 1학년 때 마을을 뜨기 전까진.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니 깡촌의 사람들에게 그 아버지의 존재는 당연히 대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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