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오는 피식하고 웃었다. 늘상 하던 대로 서랍 쪽에 뻗었던 손을 잽싸게 거둔 것은 단순히 형사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단의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 그 서랍의 주인공 뚱반장이 섞여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건기자가 형사반장의 책상서랍을 뒤지는 것은 그리 놀랄만하거나 감출만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준오는 이제 금방 다시 채워진 듯, 한층 더 뚱해 보이는 배를 씰룩씰룩, 흔들며 들어오는 뚱반장한테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이 신사 나으리 왠 일이야, 라는 듯 뚱은 싱글벙글 사람 좋게 자리에 앉았다. 얼굴이 약간 달아오른 것으로 보아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끼니를 때우며 벌써 한잔 걸친 모양이었다. "뭔 고생이야, 이게. 하필 설 연휴에 이 지랄들이니, 이래서 어디 경찰 해먹겠어?"

그건 기자도 마찬가지라고 응수를 하면서 준오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뚱에게도 한 개피를 권했다.

몇몇의 형사들이 이 시간에 웬 손님, 하는 듯이 둘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씨발, 이눔의 경찰생활 30년에 늘어나는 건 담배밖에 없다니까…."

뚱은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 댕기더니 훅하고 내뱉는 연기 끝에 토를 달았다.

"김숙영이란 여자…어떻게 됐죠? 좀 진전이 있나요?"

"아직 찾고 있수다. 근데 뭐 급할 거 있겠어. 일단 범인은 현장에서 검거된 상태고 그 친구 입 열게 하는 게 우선이지. "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혹 사건 현장에서 입수된 사진 같은 건 없어요?"

준오는 스스로를 옥죄어 오는 어떤 불길한 예감을 간신히 억누르며 입을 떼었다. 바로 그녀, 김숙영의 사진을 얘기하는 것이었는데 그 불길한 예감의 근원은 바로 처음부터, 그러니까 준오가 고향의 읍내 버스터미널에서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자신 안에 일었던 알지 못할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사실 그 이상한 느낌은 신문에서 사건의 소식을 읽었을 때도, 그리고 피곤한 몸을 뉘이고 올라오는 고속버스 안에서도, 솟구치는 메스꺼움을 억누르며 사건현장을 둘러볼 때도, 미희와의 정사 중에도 계속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사진? 아하 김숙영이란 그 여자 말이지. 꽤 미인이던데. 사건 일어난 그 날 밤 현장에 출동했다가 거둬왔지. 혼자서 찍은 것 밖에 없던데. 그것도 한 두 장이 고작이야."

"그것 좀 볼 수 있죠?"

"그 여자 사진은 왜 보려고 하지? 난 이기자가 미인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미처 몰랐군. 어디 보자. 그 사진을 어디다 두었더라."

뚱은 허리를 숙여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이내 희뿌연 비닐 봉투를 꺼내 열고 사진 몇 장을 책상 위에 쏟아냈다. 온통 핏빛의 현장 사진들 사이로 낯선 몇 몇의 인물들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뚱은 그 사진 중 한 장을 집어들더니 준오에게 내밀었다.

"그 여자 방 책상 위에 있던 거야. 액자에 꽂아져 있던데 좀 오래된 것 같아. 어때 미인이지?"

준오는 무심결에 사진을 받아들다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다시 한번, 그리고 또 다시 한번 사진을 보았지만 틀림없는 그녀였다. 어딘지 모를 코스모스 꽃밭. 여자의 주위에는 온통 총천연색의 꽃들이 가득했다. 그 코스모스 속에서, 그 꽃보다 작은 손으로, 그 꽃보다 하얗고 투명한 자신의 몸을 내맡겼고, 그럼으로써 한 소년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새겨놓았던 소녀. 그리고 보름달이 휘엉청 떴던 어느 가을 밤, 채 영글기 전의 남성까지 고스란히 앗아가 버렸던…. 김남순이었다.

들고 있던 사진이 심하게 흔들렸다. 손에서 전달된 진동은 머리를 벌집처럼 헤집은 다음 목을 타고 가슴으로, 그리고 아랫배를 거쳐 다리까지 이어졌다. 사진을 받기 위해 일으켰던 몸이 쓰러지듯 소리나게 의자에 내팽개쳐 졌다.

'김숙영 맞아요? 진짜 김숙영 맞냐구요?'

이렇게 묻고 싶었으나 머릿속에서만 뱅뱅 맴돌 뿐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대신 윙하는 기계음이 귓속을 가득 채웠고 그 사이로 뚱이 무슨 말인가를 던지는 게 보였다.

"그래 그렇다니까. 근데 이기자 왜 그래. 갑자기 안색이…아는 여자기라도 해?"

'아는 여자? 허허허….'

허파에서 실체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건 의지와 상관없이, 목을 타고 싸늘한 혓바닥을 거쳐 벌어진 이빨 틈새로 빠져 나오는 바람소리였다.

'허…허…허. 세상에 이런 일이.'

김숙영, 아니 김남순은 바로 그 여자였다. 준오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그에게는 분명 처음이었던 단 한번의 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달이 휘엉청 떠있던 한가위의 밤.

6년만이었다. 새삼 흐른 세월을 헤아리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걸 계산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준오가 서울로 유학을 떠나 흐른 세월이 그만큼 이었기에.

유학을 가면서 바로 귀향을 꿈꾸었고, 그리고 그게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방학을 기다려야 했던 준오. 물론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그보단 바로 한 소녀, 남순에 대한 애절함이 더 간절했던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서는 괜한 부끄러움에 남모르게 얼굴 붉혀야 했던…. 하지만 거의 방학을 하자마자 같이 내려가자는 누이의 요청을 나몰라라, 하고 서둘러 돌아온 고향에 그녀는 없었다. 그 다음 방학에도, 또 그 다음 방학에도, 준오가 3년을 그렇게 보낸 뒤, 또 3년을 애달픔 속에 보내던 고등학교 3학년 가을 한가위 때까진.

친구들이 모였다는 한밤의 전갈. 간신히 부모의 허락을 얻어 채 달이 뜨지 않아 어두운 밤길을 더듬더듬 찾아간 그곳에 남순이 있었다.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버린. 짙게 화장을 한 얼굴에선 이름 모를 향기가 풍겼고 몸은, 완연한 여인네의 그것이었다. 빨간색 가죽 점퍼에, 역시 빨간색의 짧은 가죽 미니스커트, 빨간 루즈를 바른 입술까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일 뿐이었다. 준오는 그녀에게 쏟아지는 아이들의 스포트라이트를 의식하지 않은 채 하려고 애쓰면서 은근히 자신에게 집중되는 그녀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독한 술이 과자 부스러기를 안주로 해 몇 순 배 돌았다. 박수를 치면서 어울리지 않는 뽕짝을 돌아가며 불렀고 또 그 박자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쳐 하나둘 방구석에 나뒹굴게 된 밤늦은 시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달은 휘영청, 둘의 오랜만의 만남을 축복하는 듯 했다. 어디로 가자고, 누가 손을 잡아 이끈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둘은 마을을 벗어나 솔향기 가득한, 숲 속에 들어와 있었다. 멀리서 처얼썩 처얼썩,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들리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소나무 가지 위에 조용한 파문을 얹고 있었다. 소녀의 손이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술이, 그 뜨거운 소녀의 입술이 소년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조금 전 그들을 맘껏 희롱했던 독주의 쓰디쓴 악취는 어느새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향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둘은, 채 영글지 않아 달빛조차 수줍어 할 사랑을 나누었다. 혓바닥을 타고 나오는 문명의 이기는 필요 없었다. 그저 사랑했고 그랬기에 준오는 그걸 영원으로 기억했다.

 

달빛 아래 정사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머니의 처음 매질에 놀라 자빠질 것만 같은

어린아이의 동그란 눈 마냥

그런 달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영롱한 눈물 같은 빛

두 개의 육신은 쑥스러웠답니다

하이얀 몸뚱아리가 벌겋게 보이는 게

그 달빛 때문이라고요

아니랍니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두 개의 육신은 성스런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게지요

열반에 들었던 게지요

물론 희열에 찬 환희도 있었답니다

바로 몇 발자욱만 가면 넘쳐 나올 듯 용솟음쳐대는

들끓는 파도소리도 차마 감출 수 없게

그들이 열반에 들었을 때 세상은 온통 축복이었지요

둘러싸고 있던 소나무들도

달밤의 정사가 부러워 울던 짝 잃은 부엉이도

심지어는 하이얀 육신에 녹을 듯 부셔졌던

달의 눈물까지도

그 순간

그러니까

그 순간만큼은 축복을 해주었답니다

소년은 벙어리가 됐지요

소녀는 신이 됐답니다

그리고 다시 달밤의 정사는 없었지요

소년의 머릿속을 제외하곤요

영원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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