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는 한결 나아진 듯했다. 구경꾼들은 여전했다. 잔뜩 내렸던 눈도 빌딩 숲 사이로 부셔져 내려오는 햇살 때문인지 입적을 기다리는 수도승 마냥 처마 밑에 매달려, 역시 같은 신세의 고드름 줄기를 타고 조용히 뚝뚝 떨어지며 속세로 속세로 화하고 있었다.

준오의 눈이 방과 거실, 주방 구석구석을 더듬고 있었다. 근무가 바뀌었는지 뚱반장을 포함해 어제 보였던 경찰들은 보이지 않았다. 젊은 의경 둘만이 현관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준오를 따랐다. 준오는 어제 미희가 뚱반장에게서 받은 것이라며 전해준 사건 조사서를 들고 있었다. 기존 신문에 보도되었던 기사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번엔 주변 정황과 비교하며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사건을 되짚어 나갔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초저녁인 오후 6시경. 얘기했듯 김·경·훈, 단독범행이었다. 스물 세 살. 중학교를 중퇴했으며 폭행 마약 강간 절도 등 전과 5범. 범행 이유에 대해선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피의자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음. 추정컨대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실어증으로 보임….

 

대문을 열면 약간의 공간이 있었고 두세 걸음이면 현관에 닿았다. 피는 그곳까지도 번져 있었다. 준오는 술을 마신 어느 날 집에 들어가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오줌을 누었던 일을 기억해냈다. 다행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일을 마쳤는데 오줌은 골목을 걷는 그의 뒤를 계속 따랐다. 마치 긴 뱀이 혀를 내두르며 그의 뒤를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뱀은 다음날 아침 쓰린 속을 껴안고 출근할 때에도 전날 밤 그대로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겨울이었기 때문이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약간은 응고된 채 꼬불꼬불 뻗어 있는 핏줄기는 그대로, 신발을 벗어두는 현관문 앞을 지나 거실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피를 이어지게 한 원천들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채 거두지 않은 살점들이 피가 뒤엉켜 응고되다 만 머리카락들과 뒤섞여 있었다. 끔찍했다. 특히 이제 갓 풀리기 시작한 날씨는 거기에 더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해내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냄새들이 뒤섞여 준오의 코끝을 찔러왔다. 눈이 아렸다. 살점과 피와 머리카락들은 거실 옆에 붙어있는 주방에서도, 그리고 젊은 의경의 각별한 부탁에 따라 뒷발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들어간 안방에도 있었다.

아…수…라…장. 준오는 여기가 바로 불교에 나오는 아수라라고 생각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주방의 싱크대 위 한쪽에 주먹만하게 놓여 있었는데 검붉은 색을 한 살점 덩어리였다.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한 준오가 따르던 의경에게 눈짓으로 이유를 물었다. 그건 소고기,라고 답을 해주었다. 맞다. 사건이 일어난 건 구정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음식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 밖에 나가 살았던 것으로 드러난 피의자는 신정연휴를 보내기 위해 귀가했던 것으로 보임.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사건 발생 30분 전 쯤부터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6시 무렵 커다란 비명소리가 몇 차례 들린 뒤 잠잠해졌다고 함. 신고자는 바로 옆집에 사는 황철식. 경찰이 출동했을 때 피의자는 안방과 거실 중간쯤에 앉아 있었음. 거실엔 남자의 시신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널부러져 있었음. 안방에선 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이 여러 개 발견됨. 나머지 방 하나는 행방불명중인 김숙영이 쓰던 것으로 그녀는 살해된 모친 김미자의 친딸이자 피의자 김경훈의 친누나임.

 

준오는 김숙영이 썼다는 거실 바로 옆에 조그맣게 붙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거긴 그나마 어느 정도는 정돈이 돼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핏빛 냄새 사이로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듯한 싸구려 향수냄새가 준오의 코를 자극했다. 앉은뱅이 책상과 그 위에 책꽂이도 없이 간신히 서 있는 몇 권의 책, 앙증맞은 알람시계, 그리고 옷가지를 넣어두는 조그만 간이 옷장이 있을 뿐 사진 한 장 구경할 수가 없었다. 경찰이 수거해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어찌된 것이지? 의경에게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경찰이 출동한 시간은 밤 8시경. 출동했을 때 피의자는 손에 칼을 든 채였으며 칼은 주방에 있던 것으로 피의자 김경훈 외에 김미자의 지문이 같이 묻어 있었음. 중학교 때부터 가출을 일삼고 전과가 5범일 정도로 불량한 문제아였던 피의자 김경훈은 구정연휴를 앞두고 귀가, 집에서 말다툼을 벌이던 끝에 이날 자정 무렵 주방에서 고기를 썰고 있던 친모 김미자의 칼을 빼앗아 안방에 있던 계부 김기춘을 난자해 죽이고 다음 이를 말리던 김미자를 같은 방법으로 살해한 것으로 보임. 살해 동기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우발적인 것으로 추정됨. 피의자 김경훈은 여전히 입을 열고 있지 않으며 현재 국립의료원 정신분석 팀에 정신 이상 유무를 의뢰해 둔 상태임.

 

준오는 경찰서에 가는 동안 내내 김숙영이란 이름에 신경이 쓰였다. 조서에 나와있기로 그녀의 나이는 스물 여섯. 동생이며 사건의 피의자인 김경훈과는 세 살 차이였다. 그녀는 분명 계부, 친모와 동거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사건 당시 현장에 있기는 했던 것일까. 경찰이 도착했을 당시 그녀가 없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외엔 어떤 것도 드러난 사항이 없었다. 그리고 피의자 김경훈이 입을 열지 않는 한은 쉽게 드러날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사건의 전모를 확연히 밝혀줄 열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경찰도 그녀의 행방을 쫓고 있으리라.

의외로 경찰서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세밑 일어난 큰 사건 때문에 설 연휴를 엽기적 살인사건에 헌납해야 했던 형사들이나, 휴가 중 사건소식을 듣고 급거 다시 일자리로 내몰린 사회부 사건기자들은, 이제 다시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형사과 한 귀퉁이에서 진한 휘발유 냄새를 풍기는 난로만이 유일한 근무자인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내부는 다른 때와는 달리 훈훈했다. 준오는 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명패를 발견하고 그 자리로 다가갔다. 슬그머니 주위를 살펴보니 칸막이로 반쯤 가려진 귀퉁이 한쪽에서 한 여직원만이 뜨거운 난로의 열기 탓에 졸립다는 듯 연신 하품을 해대며 책상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준오는 뚱반장의 책상 위를 재빨리 훑었다. 사건일지라고 적힌 서류철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형사과 안을 살핀 준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건일지의 겉장을 들추고 한 장 한 장 정리된 사건에 대한 뚱반장의 조사상황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거기에는 준오가 사회부 캡한테 들은 얘기나 사건현장에서 접한 경찰의 조사내용을 벗어나는 건 없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번 사건은 다른 어떤 사건들처럼 감춰지거나 쉬쉬하면서 조사를 진행해 나갈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사건의 크기나, 경중에 비해 사건기자들의 후각을 자극할 만한 어떤 뒷거리도 기대하기 힘든 말 그대로 자체에 모든 게 그대로 실린 그런 사건이었다. 범인 김경훈의 범행 동기나 밝혀진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 역시 경찰에선 의붓아버지와 어머니에 불만을 품은 한 파렴치하고 반인륜적인 아들의 순간적인 감정이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경찰의 남은 임무는 사라진 김경훈의 누이 김숙영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재빨리 사건을 마무리짓는 일이었지만 그 역시 급하거나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그들은 이미 현장에는 김숙영이 없었던 걸로 결론을 내려놓고 있던 처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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