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생각> 김수복

▲ 억새무리

 

들판이 온통 갈색으로 물들어버린 칙칙한 계절이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파조가 되어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자던 당신’ 어쩌고 하는 유행가 한 소절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내가 본다기보다 느끼는 순간의 기분은 참으로 묘하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이라도 한 바가지 왈칵 쏟아내 버리고 싶기도 하고,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곳으로 그냥 마구 내달려 보고 싶기도 하지만, 하지만 내 몸은 아무 짓도 못하고 마치 낯선 곳에 뚝 떨어져 나온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눈이나 깜빡거리며 바람소리에나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소리가 들린다. 지난 세월 그렇게도 파랗던 너희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저기 어디에 누가 있어 이런 말을 했을까? 아니다. 사실은 내 입이 중얼거린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그 말을 누군가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어 내게 속삭여준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감정이 매우 민감하게 꿈틀거리는 날, 그런 날에는 시인 기형도가 생각나기도 하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같은 것이 생각나기도 한다.

시인 기형도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고 처연하게 공언하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사랑을 잃고 광야를 헤매며 부서진 낙엽 같은 소리를 낸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내 하나가,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또 다른 사내 하나는, 바람이 몹시 심한 날 갈대가 흔들리는 황토밭을 좌로우로 비틀거리면서 낙엽 밟는 소리를 낸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쓸까. 무엇을 써야 하나.

가을을 지나 겨울이 한창 세를 떨치는 계절이면 무시로 그런 그림들이 나를 찾아온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실연 같은 것을 당한 것도 아니다. 실연은커녕 내 옆의 그녀는 나를 염려해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준다. 그렇다. 그녀의 잔소리는 그냥 해대는 것이 아니라 해준다. 이것이 중요하다. 내 머리에 흰머리가 많아서 늙어 보인다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근사해 보인다는 둥, 수염을 깎지 말고 길러야 야성이 느껴진다는 둥,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얘기를 그녀는 틈만 나면 끄집어내서 나를 잠시도 멍 때리지 못하게 한다.

 

▲ 갈대와 억새의 어울림

 

그녀가 그렇게도 자주 나를 알아봐주는데도 나는 수시로 쓸쓸하고, 무시로 슬퍼져서 신파조의 노래를 혼자 속으로 웅얼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나만 그런가 해서 의기소침에 빠진 횟수도 아마 천 번은 될 것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찬바람 속으로 빗방울이 을씨년스럽게 뚝뚝 듣던 날, 그녀가 모르게 혼자 바다로 가서 모래밭에 머리통이라도 확 박아볼까 하는 엉뚱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을 때, 그때 어느 순간 정신 차리라는 듯 주머니 속의 전화기가 부르르 떨었다.

“어이 동생, 얼른 와서 쌀 한 가마니 가져가소. 제수씨랑 항꼬 와야 혀 잉? 아 이런 날 막걸리라도 한잔 해야제 안 그런가?”

전화를 받자마자 불문곡직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혈연관계는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의 선후배 사이도 아니었다. 처음 얼굴 보고 이름 익힌 지 삼 년도 채 안 되는 사이였다. 삼 년도 안 됐지만 가끔 삼십 년쯤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관계이기는 했다. 연배가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데서는 감히 형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으리만치 멀었다. 그런데도 형님, 동생 관계가 돼버린 사유는 뭐랄까, 복잡한 흐름 다 묻어놓고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는 변죽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변죽이 타고난 것도 아니고 저절로 그냥 생긴 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서울 특별시민 노릇을 했다. 서적 외판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에 아내를 잃었다. 아내를 잃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내가 왜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서울에 왔지? 가자, 고향으로 가자. 그렇게 시골 고향으로 내려와서 얼마 뒤에 아들 하나 딸린 홀어미와 재혼을 했는데 기가 막히게도 재혼한 아내와 동네 청년의 눈에서 그만 불꽃이 튀고 말았다. 눈이 맞은 두 남녀는 야반도주를 했고, 도로 홀아비가 돼버린 그는 의기소침이 끝자락에 이를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로 땅만 팠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간이 완전 멈춰버렸다. 그렇게 눈 한 번 깜빡 하는 동안 나이 칠십에 이르고 말았다나 어쨌다나.

 

▲ 겨울 사과나무

 

“아 내가 그짓말 하나도 안 하고 눈 한 번 깜빡거린 것밖에 없단 말이시. 죄라면 오직 하나 그것 뿐이여. 그 사이에 내 나이가 칠십, 믿어지는가?”

딴에는 사람들을 웃겨주겠다는 것이겠지만, 듣는 사람은 하나도 웃기지 않는 그런 소리를 툭하면 내놓고 혼자서 와하하, 그렇게 엄청나게 큰소리로 웃기를 좋아하는 이 양반은 나의 그녀를 좋아한다. 당신의 딸내미 같아서 좋아하고, 막둥이 동생의 각시 같아서 좋아한다. 내여자를 좋아하는 이 양반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속 좁은 놈이라고 비난받을 우려가 있어서는 아니지만 하여튼 나 또한 이 양반을 좋아해서 가끔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내 옆의 그녀가 집에 있는데도 나는 집에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혼자서 갔다. 남자 혼자서 살기에는 턱없이 커다란 집에 그는 과연 혼자 있었다. 재혼할 때 아내가 데려온 아들을 꽤나 사랑했었단다. 그래서 그 아들과 평생을 함께 살자고 집까지 크게 새로 지었다. 함께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야반도주를 해버리고 나니 집은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 그 엄청나게 커다랗고 쓸쓸한 거실 입구에 쌀가마니 하나와 찹쌀 봉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불현 듯 눈물이 쏟아지려 해서 얼른 시선을 돌리고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와따야 이놈의 홀아비 냄새 참말로 환장허겠네 잉?”

“냄새 좋재? 그걸로 술안주나 하세.”

“천장에 굴비 걸어놓고 밥 먹는다는 말은 들었어도 홀아비 냄새로 술안주 헌다는 말은 또 처음이요 야?”

“처음인 것이 좋은 것이여, 안 그런가?”

쓸데없는 흰소리가 난무하는 동안 분위기는 저절로 익어갔다. 세상은 온통 칙칙한 갈색이고, 바람은 차게 불어대고,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까지 틱틱거리고 있으니 이게 뭐냐 그, 술맛이 혀에 착착 감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 누군가 욕을 바가지로 퍼부어도 모자랄 정도의 대상이라도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저 유명한 이름 박근혜가 있는 것이었다.

 

▲ 그토록 파랗던 들판은 지금...

 

“아따 그 호로 개XX.”

“아이고 형님. 욕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니께요. 년이라고 하면 못 쓰고, 놈이라 해도 못 써요. 그냥 그것, 연놈도 아니고 그냥 그것, 잉?”

“그냥 그것이믄, 아, 사람도 아니다?”

“그러제, 그러제.”

“와따야, 자네는 역시 똑똑허네 잉?”

“내가 안 똑똑하면 형님이 상대나 해 주겄소? 그래서 똑똑해져 버린 거제.”

거기까진 좋았다.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쓸데없이 커다란 집안을 푸근하게 감싸 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인 벼락인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곳으로부터 난데없는 바위돌이 굴러 와서 장독대를 와장창 부셔버린 꼴이었다고나 할까. 무슨 얘기 끝에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하여튼 그의 입에서 반기문을 칭송하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잠자코 듣고 있던 내 머릿속이 점차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술잔이 깨지도록 쾅 내려놓고 있었다.

“아니 형님. 미쳤소? 환장했소? 반기문 대통령이라니. 응? 이런 염병. 그자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지배한단 말이오, 응?”

“아니 이 사람이 시방 뭔 소릴 하는겨. 유엔 사무총장을 아무나 하는가? 우리나라 대통령이사 뭐 우리끼리 뽑는 것이니께 아무나 할 수도 있다지만 유엔은 그것이 아니잖어.”

“그래서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충분하다?”

“아 그 이상 뭔 자격이 필요한가?”

“반기문 개인에 대해서 아는 것 있으세요?”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가 다 알아주는 거여. 세계의 대통령이란 말이시. 세계의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 못 할 것은 또 뭔가.”

“긍게 형님은 기어이 반기문 대통령 만드는 일에 앞장을 서시겠다?”

“아 이사람아 나도 인제 죽을 날이 얼매 안 남았어. 죽기 전에 뭣이라도 하나쯤은 해야 쓸 것 아닌가.”

“아, 그러셔요? 그라믄 되았소. 나 오늘부로 형님과 인연 끊을랑게, 아시겄소?”

“뭐, 뭐, 머시여?”

 

▲ 아주 오래된 까치집

 

나는 그대로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니 개가 짖어댄다. 마당을 빠져나오니 작은 회오리바람에 낙엽들이 하늘로 올라간다. 야, 이것 참 이상하구나. 죽 쒀서 개 준다더니 또 한 번 그런 꼴을 봐야만 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아니다. 이렇게 그냥 돌아서고 말 일이 아니다. 내가 왜 반기문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그가 납득을 하든 못 하든 설명해줄 의무가 내게 있었다. 나는 다시 돌아서서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사실 새마을 뭐라고 하는 단체에서 이른바 봉사활동을 꽤 오랫동안 해온 사람이었다. 재혼이 실패한 이후 세상사는 재미가 없어서, 처음에는 죽어라고 일만 했지만 나중에는 일하는 재미도 없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라도 누리고자 한 번 두 번 얼굴을 내밀다가 차츰 재미를 붙이게 된 게 새마을 관련 단체였다. 새마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박근혜이고 보면, 그는 아마 지난 대선 때 주저 없이 박근혜를 찍었을 터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혹시 새마을 관련 단체에서 조직적으로 반기문 띄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느닷없이 떠오른 이런 의문이 나를 흥분시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질문을 대놓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해서 입을 열어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어쩌면 반기문 대통령 설을 유포해서 내 마음을 흔들어보자는 목적으로 나를 불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더욱더 할 말이 많아진다.

영국인가 어디 무슨 지하철 안에서 찍었다는 사진 한 장은 반기문의 정치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옆에 앉은 사람들은 반기문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반기문 혼자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는, 그런 그림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으로써 반기문은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는 이미지를 유포하고자 했던 것일 텐데 그 마음씀씀이가 너무 후져보여서 나는 그만 울고 말았네 어쩌고 하는 노래라도 하나 만들고 싶은 심사였더랬다.

 

▲ 저수지 상류

 

그런 반기문이 개헌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몸은 많이 커졌는데 옷은 옛날 것 그대로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너무 숭숭 뚫렸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황에 맞지 않으면 코웃음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반기문은 이런 반격을 받아 마땅하다. 우리의 정치의식은 대단히 성숙했는데 반기문의 정치행위는 유권자를 유치원생으로 보고 있다고 말이다.

게다가 반기문의 최근 발언을 보면 박근혜가 겹쳐서 떠오른다. 검증을 빙자한 괴담 유포를 근절해야 한다는 말씀. 자신에 대한 각종 의혹이 근거 없는 괴담이고, 괴담은 근절해야 한다는데 이 말은 곧 대통령 박근혜가 정윤회 사건 때, 그리고 최순실 의혹이 불거졌을 때 무슨 교시처럼 내놓은 ‘찌라시’ 발언과 정확히 맥이 닿는다. 또한 괴담은 근절해야 한다는 반기문의 발언은 찌라시 유포 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박근혜의 발언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벌써 전에 박근혜를 고무 찬양하는 발언까지 공개적으로 했었지 않은가. 일본과의 위안부 관련 협상이 제법 잘 되었다는 식으로 박근혜를 고무 찬양하고 있는 반기문의 발언은 그 자체로써 반기문의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이 대단히 흐리멍텅하다는 걸 드러내고 있다. 만약에 박근혜가 탄핵에 몰리지 않고 그럭저럭 임기를 마칠 조짐을 보인다면 반기문은 아마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이나 자원외교 따위들을 큰 틀에서는 지지한다는 식의 발언으로 지지세력 확장을 꾀하고 나섰을 터이다.

그 어떤 시대적 유행이 있어서 이명박 열풍을 낳았고, 또한 그 어떤 시대적 발광이 있어서 박근혜를 청와대로 밀어 넣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한 번은 얼떨결에 당했고, 두 번째는 첫 번째의 정신없음이 아직 남아 있어서 당했다지만, 세 번째까지 당해야 하는가? 등등 그런 연설이 내 입에서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그는 마이동풍에 요지부동,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반기문 대통령을 주장하고 있었다. 어쩔 것인가. 일단은 각자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자는 선에서 대충 합의를 보고 말았다. 그렇게 돌아오는 내 마음은 착 가라앉은 들판만큼이나 쓸쓸하기 그지없었고, 입에서는 신파조의 유행가 한 소절이 그냥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자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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