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이야기 많은 우리 옆집

우리 집 옆집은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사람 냄새를 풍길 뿐 내내 비어 있다. 사람 냄새를 풍긴다 해도 남자 혼자일 뿐이다. 아주 드물게 남자의 아내로 짐작되는 여자 목소리가 나기도 하지만 낯가림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 얼굴을 내게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빈집이나 다름없는 그런 집이었다. 그런 빈집에 어느 하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남자 세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자동차를 사립문 앞에 세워둔 채로 잠겨 있는 사립문 앞에 서서 뭐라고들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해대다가는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지 서너 시간 뒤에는 남녀 한 쌍이 와서 자전거용 자물쇠로 잠겨 있는 사립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우리 집으로 왔다.

 

▲ 백 년이 넘은 옛집

 

“저기요. 뭐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네 그러세요, 하는 투로 응대를 하고 보니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집 주인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그 내용이 서울 하고도 강남에서 운영하는 부동산 중개업소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는 것이었다. 놀랐다. 옆집 주인 남자는 우리 집 마당을 열 번도 넘게 들어왔었고, 방에까지 들어와서 수박도 먹고 커피도 마신 바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옆집 사람에게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집을 내놓았다니 이게 뭔 일이냐 싶어 즉각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인데도 그 내막을 알 수 없어 인터넷 검색까지 해야 하는구나. 야아 이게 참 황당하긴 하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할 것이냐, 어쩌고 중얼거리며 검색창 주소를 입력하고 엔터를 탁 치니 사진이 훌쩍 떠올라 온다. 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가득 눈발이 희끗거린다. 사진을 찍은 날이 아마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첫눈 내리는 날 나는 새벽에 갯벌 일을 나갔었고, 일이 바빠서 밤에도 나갔었다. 그리고 내 옆의 그녀는 그즈음 김장을 목적으로 엄마 곁에 가 있었다. 그러니까 옆집 주인은 집을 팔려고 한다는 말을 우리에게 하고 싶었다 해도 할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우리 집 옆집은 이야깃거리가 꽤 많은 집이었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오던 해에 노부부가 두 달여 간격으로 운명하셨다. 부부가 다 정원 가꾸기를 좋아해서 마당에 온갖 나무와 화초들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꽃은 수많은 종류들 중에서도 특히 왜철쭉을 사랑하셨던지 철쭉이 피는 계절이면 노란색 파란색 아이보리색 등등 그야말로 온갖 색깔의 철쭉이 피어나곤 했다.

 

▲ 우리 동네 뒷산

 

젊어서는 농사도 머슴까지 두고 꽤 많이 지으셨지만, 아들 딸 모두 박사에 의사 공부를 시키는 동안 농지는 다 사라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 즈음쯤부터는 대학교수 아들이며 의사 딸들이 생활비를 대주니 농사를 짓지 않는다 해도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서 아마 더욱더 정원 가꾸기에 몰입해 들어갔을 것이다. 노부부가 가꿔놓은 정원은 광주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큰아들이 가장 좋아했다.

큰아들 부부가 수시로 찾아와서 부모님과 함께 꽃구경을 하고 차를 마시고 하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 어머니에게 심술꾸러기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어제까지 함께 어울려 고스톱을 쳤던 이웃 사람을 보고 누구냐고 묻더니 다음 날 아침에는 아들 이름으로 남편을 불렀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아들을 남편으로 알고 며느리를 남편의 첩으로 오인해서 마구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그렇게 웃지도 울지도 못할 언행으로 어머니는 당신이 이제 어른으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아이가 돼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들 부부는 고민 끝에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간 첫날부터 집에 간다고 울며불며 대단히 싫어하셨지만, 아들 부부가 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어머니를 모시고 있기가 어려워서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 뒤로 삼 개월이 채 안 돼서 아들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통보를 받았고,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운명하셨다.

남편의 입장에서 보자면 순식간에 아내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그 충격이 깊었던 것인지 남편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 두 달이 채 안 돼서 아내의 곁으로 갔다. 사람들은 두 부부의 금슬이 엄청나게 좋았다는 등의 후일담으로 아들을 위로하고 있었지만, 술자리에서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깊어서 때 아닌 때에 아버지가 운명하고 말았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아들 부부가 노부모를 모셔갈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갖고 있었던 아버지로서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넣고 있는 아들을 보면서 희망이고 뭐고 다 잃어버렸거나 혹은 포기했지 않았겠느냐 하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 진실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자식은 부모에게 불만이 있으면 부모를 공개적으로 원망하고 심지어는 탄핵도 하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불만이 있어도 가능한 한 숨기고자 애를 쓰는 게 인류사의 전통이 아니던가 말이다. 어쨌든 주인을 잃어버린 집은 방치된 채로 오륙 개월 동안 잡풀이 무성해져 갔다. 집 없는 고양이들이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새끼를 낳았고, 끈 풀린 개들은 똥 누는 장소로 마당을 이용했으며, 산에서는 각종 동물들이 내려와서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 대나무를 쪼개서 만든 울타리

 

부모님을 거의 동시에 잃어버린 아들이 충격에서 벗어나 집을 찾았을 때의 상황이 그와 같았다. 몹시 당황한 그는 부랴부랴 일꾼들을 사서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성한 잡풀들을 베어내고, 멋대로 자라난 정원수들 가지치기를 하고, 내친 김에 마당에는 잔디를 깔았다. 그리고 또한 내친 김에 울타리도 치고, 그때까지는 없었던 대문도 새로 달고, 등나무 넝쿨을 올려놓는 거치대도 만들고, 한쪽 구석에는 혼자서 책도 보고 사색에 잠길 수도 있는 서재도 작고 아담하게 지었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미술 전공 친구와 그 제자의 도움으로 대나무를 쪼개고 다듬어서 둘러놓은 울타리와 대문은 자연미가 느껴져서 보기에도 썩 좋았다.

청출어람이라고, 부모님이 가꿔놓은 정원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지도 않고 부분적으로 손을 본 결과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어서, 아들은 아마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나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자랑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매주 토요일이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을 전체가 떠들썩했다. 어떤 날은 제자들이 단체로 몰려와서 출장뷔페를 불러놓고 ‘어떤 개인 날’ 같은 아리아를 부르기도 했고, 다른 어떤 날은 동료 교수며 친한 친구들이 몰려와서 바비큐 파티를 열어놓고 ‘청산에 살어리라’ 같은 시조 풍의 가곡을 읊조리기도 했고, 또 어떤 날에는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몰려와서 삼겹살에 소주를 소비하며 ‘타향살이 몇 해더냐’ 같은 애환이 뚝뚝 듣는 노래를 불러 젖히기도 했다.

그렇게 또 세월은 갔다. 그런데 세월은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일거리를 남겨놓고 있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말끔하게 단장했던 화단이며 지붕이며 마당은 어느새 다시 엉망이 돼 있었다. 일년생 화초들 사이로 잡풀이 마구 자라나서 화초와 잡초의 구별이 불가능할 지경이었고, 예쁘게 잘 심었다고 심어놓은 마당의 잔디는 소나기 한 번으로 도처에 구덩이가 생기고 뿌리는 파헤쳐져서 잡초를 방불케 했으며, 미술대 교수와 그 제자들이 대나무를 쪼개서 보기 좋게 만들어놓은 대문과 울타리 또한 사람만 없으면 각종 동물들이 틈을 비집고 드나들었던 까닭에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흉물이 돼 있었다.

자,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부모님이 가꿔놓은 정원을 즐기기만 했지 자기 손으로 직접 무엇을 해본 적이 없는 교수 부부는 난감했다. 처음 한두 차례 정도는 마을 사람들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일손을 보태기도 했지만, 사람 한 명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려워진 농번기에 남의 집 정원손질이나 하겠다고 나설 만한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하여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던 전원주택은 그렇게도 순식간에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 자전거용 자물쇠를 걸어놓은 사립문

 

공휴일이나 주말이면 어김없이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은 이제 자전거용 자물쇠로 잠긴 채 열릴 줄을 몰랐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꼴로 제자들이 몰려와서 잡초를 뽑는다고 부산을 피우기는 하지만 그들의 애당초 목적은 소풍이지 노동이 아니었던 까닭에 화단은 더욱 엉망이 되어갔다. 그런 세월이 아마 이 년쯤 흐른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밖에서 들어오는데 낯선 사람들이 옆집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나한테 와서 인사를 했다. 자기네 처남이 그 집을 샀으므로 나와는 이제 이웃사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때 그 교수도 집을 팔겠다는 얘기랄까 선전 같은 것을 마을 사람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소리 소문도 없이 부동산 소개소를 찾아가서 집을 팔아 달라 했고, 소개업자는 사진 몇 방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렇게 내놓은 집을 누가 발견하고 아 이것이다, 했는가 하면,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가 있는 대사관에서 문화담당 무엇이라던가 하여튼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팔십년 그 엄혹한 시절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노태우와 김영삼 정권 그 사이 어느 시절에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임무를 맡고 약 삼 년 동안 호남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종교로서의 동학이 아니라 농민혁명으로서의 동학은 전라도의 고창과 정읍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까닭에, 공무원인 그는 싫건 좋건 고창을 발이 닳도록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고창에 흠뻑 정이 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정이 들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문득문득 고창에서의 일들이 생각났다고 하니 그게 아마 정이라는 것일 터이었다. 정년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나면 고창에 가서 살겠다, 하는 생각을 언제부터 하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어느 하루 부쩍 쓸쓸함이 느껴져서 일손을 멈추고 잠깐 인터넷서핑을 하던 중에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고창에 주소를 둔 시골집이 한 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전원생활 꿈을 접게 한 말벌집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진 속의 집은 단숨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비록 기와는 벗겨지고 슬레이트가 얹어져 있기는 했지만 한눈에 봐도 한국 전통의 기와집이 분명했고, 부분적으로 개비를 하기는 했지만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었다. 이거다, 하고 생각한 그는 그 자리에서 처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남은 마침 광주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고, 고창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게 해서 집을 사기는 샀지만 아직도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직원인 그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자기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화단에 잡초를 뽑고 나무들 전지를 하는 등의 관리는 일단 광주의 처남에게 맡겼다. 그리고 삼 년, 마침내 본국 근무를 명받은 그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왔고, 거의 매주에 한 번씩은 미래의 전원주택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도시 사람이 시골에 집을 한 채 가외로 둔다는 것은 어쩌면 낭만일지도 모른다. 낭만은 그 성격이 무엇이건 사람을 생기발랄하게 해주기 마련이다. 토요일 오전 아홉 시나 열 시면 벌써 도착해서 사립문을 활짝 열어놓고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전지가위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그는 아닌 게 아니라 생기발랄하고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런데 뭐랄까, 내 눈에는 그의 활기찬 몸짓이 영 불안정해 보였다. 백구두를 신고 산에 오르는 사람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도시에서 공무원 생활만 해온 사람 특유의 서투름이라고만 보기도 어려운, 중요한 뭔가 하나가 빠졌다는 느낌이었다. 의도적인 과장은 아니라 해도, 뭔가를 확대해석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너스레 같은 것이 그의 행동거지에서 자꾸 보이던 것이었다.

 

▲ 등나무 거치대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일 년이 채 안 돼서부터 지겨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뽑고 또 뽑아도 자라나 있는 잡초가 밀림 속의 게릴라 같다고 투덜거리는가 하면, 마당에 벗어놓은 뱀의 허물이 마치 무슨 스카프처럼 자신의 목에서 펄럭거리는 환상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치를 떨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점차 시골살이에 정나미가 떨어져 갔다. 매주 토요일마다 내려오던 그의 발걸음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줄었고, 나중에는 두세 달에 한 번꼴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가 최종적으로 전원생활에의 꿈을 접은 것은 내가 짐작하기로는 아마 지난해 추석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날 그는 모처럼 부인과 딸 그렇게 셋이서 내려왔다. 그런데 그들 가족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말벌 집이었다. 거대한 말법 집이 다른 데도 아닌 마루에 지어져 있었고, 수백 마리의 말벌들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주인 행세를 하는 바람에 부인과 딸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석 달쯤 뒤의 첫눈이 내리던 날 주인은 혼자 가만히 내려와서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들고 부동산 소개소를 찾았다는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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