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오토바이 빌린 후에

여행 중에 국제운전면허증을 꺼낼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번도 없었다. 오토바이를 빌렸을 때도, 빌리지 못했을 때도 면허증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4륜 오토바이를 빌릴 수 있었을 때는 호기롭게 챙겨온 국제면허증을 지갑과 함께 소매치기 당한 뒤라 면허증을 꺼낼 수도 없었고, 덕분에 오토바이를 빌리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몇몇 장사꾼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냈다. 국제면허증 없이 오토바이 빌려 주기. 그들은 한국 면허증 사진을 찍어 둔다거나, 경찰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렌트샵에 나를 데려간다거나 하는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그렇게 단 한 번 오토바이를 빌려 탄 이후로 후환이 두려워 이런 식으로는 오토바이를 빌린 적은 없다. 사고라도 나면 일이 커질 게 뻔하기도 하고 적어도 무단횡단 이상의 잘못을 타국에서 더 짓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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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면허증 없이 빌리는 게 마치 무단횡단처럼 일상화된 곳이라면? 인도에서 스쿠터를 빌릴 때는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았다. 간단한 신상정보 정도. 그들이 달라고 하지 않은 나의 국제운전면허증을 먼저 맡길 이유는 없었다. 이거 탈래? 얼마인데? 몇 시간 타고 와서 가져다 주면 돼. 응 알았어. 하고 스쿠터를 타다 맡기기. 생각해보면 자전거 빌려주듯 스쿠터를 빌려주는 참 허술하고 위험한 방식이 맞는데 적어도 가슴에 국제운전면허증을 품고 있는 나는 당당하게 두 개의 바퀴 위에 올랐다. 돌무더기 황야의 풍경들이 휙휙 지나가고 꼬리가 길고 얼굴이 검었던 원숭이 떼들이 스쿠터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빠르게 달음질 할 때 자유롭다고 느낀다. 움직이는 것들은 늘 어딘가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여행 중에 스쿠터를 타는 건 그런 면에서 자유에 자유를 덧댄 기분에 가까울지도. 돌이켜보면 그다지 여행 중에 오토바이를 자주 탔던 것도 아닌데 탔던 그 몇 번의 순간들은 잘 잊히지 않는다. 그때 참 좋았지? 하는 회상에서 빠질 수 없는 극적인 장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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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순간들 중의 하나를 떠올린다. 히피 스타일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편안하게 쉬어가고 망중한을 즐기는 돌무더기의 황야, 함피에서 효진과 내가 스쿠터를 빌려 달렸던 시간을. 달리고 달려도 돌이 나오고 저수지가 나오고 원숭이들이 나오고 했던 그 길을. 그 길의 끝에서 내 스쿠터가 약간의 오작동을 일으켜 갑자기 빠르게 발진했던 그 순간을. 길 모퉁이에 서있던 자전거를 치고 옆으로 고꾸라졌던 그 아찔한 순간을.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단지 낡은 자전거의 체인이 조금 부러졌을 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경황없는 순간에 나타난 주인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액수에 만족했는지 주인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것을 보았다. 다친 사람도 없고 스쿠터도 멀쩡하다는 사실에, 큰 일이 지나고 실은 큰 결과가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조심조심 스쿠터를 몰아 되돌아 왔던 길. 야자수들이 논밭에 가득했다. 그때는 해변이 아니라 논밭에 야자수가 있다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일처럼 여겨졌다. 돌과 논과 거대한 야자수들 사이에서 두 개의 바퀴를 끌고 돌아와 누운 눅진한 밤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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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빠르게 지나치는 흐름 속으로

베트남의 하노이에서는 평생 본 오토바이보다 더 많은 오토바이를 볼 수 있었다.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부터 아이를 뒤에 태운 사람들, 젊은이들과 노인들 모두 자신의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내가 본 오토바이는 여행자들의 흥미로운 레저가 아니라, 삶과 일상의 수단이었다. 자신들의 삶의 크기를 지탱하듯 비슷한 모양의 오토바이는 도로를 가득 메운 채로 계속 지나갔다. 횡단보도의 신호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는 곳이어서 어떻게 그 도로를 건너야 하는지 어렵기만 했는데, 천천히 도로에 발을 딛고 나아가면 오토바이는 알아서 피해간다는 걸 알았다. 멈칫 거리지 말고 느릿느릿하게 도로를 건너갈 것. 흐르고 있는 강물을 일정한 속도로 건너가듯이. 최대한 일정한 속도로 그 도로에 하나의 패턴이 되듯이. 익숙해진 이후에는 사실 이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오토바이의 흐름들 속에 가볍게 잠겼다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향하고 있는 체계 속으로 함께 미끄러지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번에도 무사히 잘 건넜다는 성취감과 효능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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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적응한 덕에 교통 상황이 더 악랄한 인도에서도 길을 잘 건넜다. 인도의 오토바이와 릭샤와 차들이 클락션을 뺑뺑 누르고 가는 시끄러운 도로에서는, 길을 잘 건넜다는 안도감이 더 컸고, 그래서 더 만족스러웠다. 정말 어떻게 건너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도로에서는 다른 현지인을 슬쩍 뒤따라갔다. 하얀 눈밭에서 앞 사람의 발자국을 뒤 쫒듯이. 어쩌면 거대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였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다. 실은 오토바이가 더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오토바이들의 도로에서는 어떻게든 건널 수 있었다. 그 도로는 차들이 편하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잘 뻗은 도로가 아니라, 이 짐 저 짐을 동여맨 오토바이들이 다소 느리게 낑겨 가는 우둘투둘한 일상의 도로였기 때문인 것 같다. 고속도로를 지나치는 자동차들의 무리에서, 나는 사람을 상상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엉키는, 사람마다 각자의 헬멧을 조여 맨 도로에서 차라리 사람을 상상한다. 자동차보다 오토바이가 훨씬 위험하다는 사실 역시. 이 위험하고, 직접적이고, 바퀴가 두 개 뿐이고, 여러 사람 탈 수 없는 오토바이로 가득 찬 도로 위에서, 이 혼란스러운 도로에 던져진 사람들의 하루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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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직선적으로 흐르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의 의견이 분분할 것이나, 국가 간 경제력의 차이는 원한다면 직선에 세워 놓을 수 있다. 어릴 적 캄보디아를 여행할 때 만난 가이드는 내게 말해주었다. 이 근처의 국가들을 보면, 경제력에 따라 어떻게 탈 것들이 달라지는지를 볼 수 있다고. 캄보디아는 자전거, 베트남은 오토바이, 태국은 자동차를 탄다고. 어린 나는 그 명확한 구분이 신기하고 이상했는데, 그 말을 할 때 내 앞을 지나갔던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몰던 캄보디아 아저씨의 표정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내가 베트남에서 만난 그 수많은 오토바이는, 어떤 국가 특정 시기의 단면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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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하노이에도 지하철이 개통된다고 들었다. 이 이후에도 하노이의 오토바이 무리들은 그대로일까? 차만큼 비싸지 않지만 차 정도로 빠르게 갈 수 있고, 부피가 크지 않아 기동성이 좋아 골목 구석구석 갈 수 있어 일상의 발이 될 수 있었던 오토바이. 그 흐름이 만들던 매연 냄새 가득한 일상은 계속 어떻게 흘러갈까. 그만큼 많은 오토바이를 내가 사는 곳에서는 볼 수 없어서 우리가 이를테면 어떤 시대에 묶여 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린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얼굴과, 그 얼굴이 겪고 있는 사뭇 다른 일상들의 경과를. 오토바이 빠르게 지나치는 흐름 속으로 섞여들고 있는 인간상의 한 단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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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 앉아

오래 전에 면허를 땄지만 운전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이른바 장롱면허다. 자주 연습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당장 운전할 일이 거의 없어 아무 것도 안했더니 여전히 운전을 못한다. 자동차는 못 몰지만, 이상하게 스쿠터나 오토바이는 곧잘 탄다. 이게 나에게는 이런 느낌이다. 자동차를 몰면 누구를 자칫 죽일 거 같은데, 오토바이를 몰면 차라리 내가 죽을 것 같다. 이 말은 누구를 죽이느니 내가 죽겠다는 이타심 섞인 말이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동차는 내가 통제하기에 부피가 너무 커서 어려운 느낌이고 오토바이는 내가 다룰 정도의 크기라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저 내 느낌일 뿐인데 나에게는 오토바이가 좀 더 생물 같고, 자동차는 그냥 자동차인 것 같다. 안과 밖이 명확한 자동차의 구조는 하나의‘공간’에 들어선 느낌이고, 오토바이는 말 그대로 정말 내가 위에 타고 가는 것 같다. 아마 이 이상하고 쓸 데 없는 감정을 지나쳐야 내가 운전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 텐데, 여전히 오토바이를 생각하면 그 위에 있는 사람과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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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토바이를 몰았던 기억도, 수많은 오토바이를 보았던 기억도 뚜렷하지만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누군가가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탔을 때다. 주로 여행 중에 만나 친해진 친구들과 작별할 때, 그들이 나를 먼 곳의 정류장까지 태워줄 때 나는 뒤에 타 있었다. 하루하루 오토바이로 일 나가는 친구들이 내어준 등. 그 등을 꽉 붙잡고 복잡한 도로 한 가운데에 섰을 때. 그릉그릉 거리는 엔진을 다리로 느끼고 친구의 등의 차가운 촉감을 느끼고 있었을 때. 어딘가를 붙잡고 가고 있다는 이상하게 편안한 기억. 두 개의 바퀴를 가진 오토바이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두 개의 바퀴를 가진 나의 기억은 가끔씩 내 앞을 빙글빙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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