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사랑을 위한 되풀이' / 황인찬, 창비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2019년 가을에 나는 인도 여행을 앞두고 논술 학원 테이블에 앉아 학생을 앞에 두고 두괄식의 중요성을 미괄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루는 길지 않았고 원고지의 글자는 많았다. 더 많은 색을 쓰며 원고지에 첨삭하라는 다른 조교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로지 빨간색과 파란색만을 쓸 거라고 공연히 생각했던 하루를 지났다. 그렇게 논술시험은 끝이 났고, 학생들이 자기 갈 길을 향해 떠나간 학원은 금세 차분해졌다.

원장 내외가 친절했고, 원장의 아들인 논술 강사는 장범준의 외모와 성격을 닮아 부드럽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은 사람이었고, 데스크 선생님은 친구의 결혼식에 가야 한다며 틈틈이 스쿼트를 했다. 장범준과 데스크는 다음 해에 결혼해 학원은 진정 가족 기업이 되었다. 좋은 의미로 가족 같았던 그들을 나는 늘 좋게 기억했다. 그곳에서 창 너머 민중가요가 울려 퍼지는 풍경을 보았고, 근처에 일하는 삼성맨들이 밤거리에서 문재인을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밤의 창문 밖으로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것도 보았다. 이름과 얼굴만을 알았던 학교 선배를 동료로 만나게 되서 기쁜 마음과, 이곳에서 어떻게든 잘 적응해나가고 있다는 묘한 안정감과, 무언가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차분한 예감 속에서 2019년 가을 나는 반복되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밥먹고 일하고 퇴근하면서.

다음해에 시작된 역병으로 학생들이 줄었다. 서울에 자취를 시작할 예정이었던 내가 수원에서 이 일을 계속 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자의반 타의반 학원을 떠났다. 그렇게 1년 쯤 지났을 즈음 일손이 필요하다며 원장이 나를 불렀다. 다시 가본 그곳에는 내가 알던 사람들의 화목한 얼굴은 없었다. 있었던 사람들은 조금 더 푸석하게, 없었던 사람들은 새롭게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그때와 오늘이 같을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채로, 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과거를 과거로 두었으면 좋았을까.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은 변하지 않은걸까. 손에 잡고 있던 모래가 빠져나가듯 허물어지는 시간. 모래가 다 떨어지면 뒤집어 놓아야하는 시계. 몇 번씩 거푸 모래시계를 뒤집으면서, 어떤 것이 끝나고 어떤 것이 끝나지 않는지를 혼자 셈 해보곤 했다.

이 시집은 2019년 11월 30일에 처음 나왔다. 내가 논술학원 일을 그만두었던 그날 출간되었던 셈이라 돌이켜보면 묘하다. 학원을 떠난 이후 나는 긴 여행에서 돌아왔고, 이 시집을 읽었을 즈음에는 무엇이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참이었다. 변한 게 많지만 그래도 쭉 이어진 하루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별 다를 것 없지만 평범하게 지속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 모래시계의 모래는 계속 흩어지고 있지만, 시계를 뒤집는 우리의 손은 똑같은 모양인 것처럼.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끊기는 것이 없다.

 

황인찬의 '사랑을 위한 되풀이' ⓒ위클리서울/ 창비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시집의 주된 감각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이 말은 맥락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결연한 다짐일 수도 있고 주저앉은 자조일 수도 있다. 그 끝나지 않은게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러나 이 시인이 이렇게 말할 때 저 문장에는 어떤 무게감이 없다. 가볍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냥 뭐가 다 끝난 게 아니니까. 우리는 계속 밥먹고 놀고 사랑하고 살 거니까. 이 시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그저 계속되는 일상과 그 속의 사랑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일상의 껍질은 계속 이어진다. 내용은 뒤바뀌어도, 형식은 같다. 그래서 이 시집은 어떤 무거운 감정 없이 가볍다. 이런 시 제목처럼.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 다음에 사랑하는 시’.

인간은 미간 찌푸리는 데 선수다. 아파하고, 아프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많은 시들이 마음속 감정의 소요를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표현할 때, 황인찬의 시에는 '인간적인 고통'의 직접적인 표현이 없다. 감정적 소요가 없다. 그런 것이 있었다는 흔적이 겨우 남아 보인다. 시에 바탕이 되는 것은 내용 없는 삶의 되풀이, 무한히 반복될 놀고 밥 먹고 사랑하는 날이다. 끝없이 반복되었기에 형식만 남은 하루는 일상 속의 작은 종교 같다. 그 가벼운 자리를 걸어가는 자의 무게는 너무나도 가볍고, 그 가벼운 걸음에는 속시끄러운 인간의 마음이 없다.

황인찬의 시는 구체적인 사건을 잘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사건의 자리가 비어있다. 그저 사건을 예감하거나, 이미 벌어졌던 사건의 여파를 차분하게 그린다. 이미 벌어진 것들과 앞으로 벌어질 것들을 공란에 넣고, 비어있기에 어떤 자국이나 흔적이 되는 모습들을 말하거나 이야기로 만든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아래에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일상, 거창하게 말하면 ‘삶’이 있기에 시는 너무 무거워지지도, 감정의 과잉에 빠지지도, 반대로 너무 건조해지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삶에 표면에 머무는' 시가 되고 싶다는 듯이 군다. 자아를 말하며 안쪽으로 너무 깊어지지도, 바깥만을 내어다보며 사물의 외양만 쫒지도 않고, 반복되는 일상의 형식을 가만히 쳐다보기. 그가 시에 직접 적어 넣은 이런 문장도 있다.

'이 누적 없는 반복을 삶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이 시의 서정적 일면이다' (아카이브, p85)

반복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울고 웃고 먹고 놀고 눕고 앉는 일상. 그 하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분명 기억한다. 그러나 계속 반복되고 반복된다면. 아주 멀리서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의 흔적만을 그린다면 어떨까. 그때 보이는 것은 우리를 울고 웃게 했던 ‘내용’이 아니라, 울고 웃는 우리의 ‘표정’이 아닐까. 형식처럼 남은 표정 말이다. 기억처럼 모래처럼 누적되어 쌓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반복되는 우리의 표정들. 그렇게 짓는 우리의 표정과 몸짓 속에, 내용이 없기에 되려 차오르는 가벼운 사랑이 있기도 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황인찬이 무겁지 않은 말로 내게 일러줄 때엔 왠지 편안한 마음이 된다. 그저 하루하루가 있고, 그 속에 반복되는 사랑이 있을 뿐이야. 이미 지나간 것들에 기억으로 매달리지 말고, 그것들이 변했다고 속상해하지 말고, 오늘처럼 반복되는 하루를 봐. 그리고 네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웃는지를 봐. 이 일상은, 우리의 사랑을 위해 되풀이될 거야. 하나도 속시끄러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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