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각각의 계절, 권여선 저, 문학동네, 2023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아무 이유도 없이 힘 좀 내라고 북돋는 소설보다는 끝내 삶에 고통 앞에 무너진 사람들을 정직하게 그리는 소설이 차라리 힘이 난다. 그런 소설을 읽을 때면 내게 모호하게 느껴져서 더 어렵기만 했던 ‘인생’을, 인물들이 겪은 불행을 통해 조금은 이해한 기분이 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 이게 인생이야,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무너지기도 해, 무너져서 일어나지 못하기도 해. 모두가 비슷한 고통과 아픔을 겪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겪고야 마는 삶의 횡포한 불행을 기어코 정확하게 그리는 소설이 있다.

 

ⓒ위클리서울/ 정다은

삶에는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는데 주어지는 고통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나는 개인의 삶보다 더 거대한 ‘운명’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통로로 소설을 택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운명이라는 말에 끼어든 거창한 느낌을 전부 걷어내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거나/그렇게 되고야 만 삶의 사건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최소한 느낄 수 있 있는 고통으로 바꿔치기. 고통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의 무의미라고 말했던 어떤 철학자의 말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게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와 맞닿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는다고 때로 삶이 건네는 고통의 무의미에서 갑자기 대단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직한 소설은 무의미함을 무의미하다고 다시 의미화함으로써 삶에 작은 위안을 준다.

7년 전에 읽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는 그런 소설집이었다. 그 소설집 안에 가득한 ‘그렇게 되고야 만’ 인생의 끝자락에서 술을 잔뜩 마시는 인물들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항상 내용을 쉽게 잊는 편이다. 마치 힘을 내어 기록해 두지 않은 간밤의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용을 잊고 만다.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지워지고 특정한 장면의 인상만이 강하게 남는다. 지금에야 책을 읽으면 감상을 간단하게나마 기록하려고 하는데 오래전에 읽었던 이 책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에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요양원에서 만남을 이어가는 중년의 커플. 알코올 중독에 걸린 여자, 심각한 관절염에 걸린 남자.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병원을 나와 또 술을 먹게 된 여자. 그리고 그녀가 평상에 앉아 외우는 김수영의 시 <봄밤>의 시구.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이상하게 그 소설에 적힌 그 시구를 나는 잊을 수 없었고, 지금도 종종 속으로 생각한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이미 모든 일이 벌어졌고, 벌어질 것이다. 서두를 필요 없다. 천천히 마음을 따라가면 될 뿐. 서두르는 자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굴레 속에서 더 아프게 넘어질 뿐. 매번 생각할 때마다 다른 문장을 덧붙이면서 그 시구를 떠올린다. 힘내라는 것도 아니고, 다 망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끝까지 간 사람이 말하는 ‘서둘지 말라’는 시구 속에는, 억지로 조급하게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지나가고 흐르는 삶의 시간이 있다는 말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올해 권여선의 소설집이 새로 나왔다는 소식에, 예전에 읽은 <안녕, 주정뱅이>와 봄밤의 시구를 떠올렸다. 이번 소설집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집을 펼쳐 읽었다. 당황스럽게도, 다 읽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내용이 자세히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천천히 책을 보며 내용을 깊이 있게 읽어낼 수 있을지라도 지금으로서는 처음 권여선의 소설을 읽었을 때처럼 어떤 느낌과 감상만이 내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다. 정확히는 한 소설에 등장하는 하나의 ‘문답’이 머릿속에 박혀 있다. 소설집의 첫 번째 소설 <사슴벌레식 문답>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특별한 문답을 통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어떤 ‘운명’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어쩐지 계속 생각하게 되고 마는 삶의 질문과 대답을.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 표지ⓒ위클리서울/ 문학동네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20대 초반에 함께 살았던 여대생 넷은 세 사람만 중년이 되었다. 다들 각자의 방향으로 무언가를 염원했던 네 명의 학생. 그중 한 명은 자살했고, 한 명은 다른 한 명을 배신했고, 배신당한 한 명은 제대로 연락이 닿지 않는다. 주인공은 자살한 친구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연락을 돌리며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그들이 함께 펜션으로 여행 갔던 날, 숙소에 들어온 사슴벌레를 보고 펜션 주인에게 따지자 그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디로든 들어와”

친구들은 그 말이 재밌었는지, 그 문답을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만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간은 무엇으로 살아?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락이 하고 싶어. 질문을 하면, 대답은 항상 ‘-든’이 붙은 채로 돌아온다. 구체적인 이유와 내용을 모두 빼더라도, 결국 ‘어떻게든’ 일어난다는 대답. 그때 친구들은 분명 그 문답을 통해 가벼운 힘을 얻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젊은이들의 목을 수많은 구체적인 한계가 조르고 있었을 시기에, 아무튼 ‘된다는’ 문답은 분명한 힘을 준다. 나는 왜 이 글을 써야 해? 나는 왜든 이 글을 써. 이유를 막론하고, 그냥 하는 것이고, 또 하게 된다는 의연한 대답.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바람이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들을 뒤돌아 볼 때 이 문답을 쓰게 된다면, 이 문답은 갑자기 돌변해 목을 조른다. 이를테면 이런 식.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부영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부영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든. 이유를 막론하고,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일들. 다른 말을 허용하지 않는 말들. 이때 이름 붙이는 거창한 ‘운명’이라는 말은 너무나 무거워서, 다른 어떤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고 이미 벌어진 일을 그저 받아들이라는 폭력적인 입막음이 된다.

삶의 무거움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썼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순간 너무나 무섭고 답답했다.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말 하나 붙이지 못할 만큼, 이미 다 정해져 버린 듯한 아픔을 보는 것이 답답했다. 그야말로 이미 벌어진 고통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때 느껴지는 막막함 때문에. 미래에 벌어질(내가 원하는)일을 생각할 때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의젓하게 웃는 힘을 주지만, 과거에 벌어진 일(전혀 원하지 않는)을 떠올릴 때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그보다 막막할 수 없는 아픔을 준다.

소설은 그 막막함을 해소하지 않고 끝난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로 두겠다는 듯이. 소설은 마치 절망감과 막막함이라는 삶이라는, 한때는 푸르렀지만 이제는 황폐해진 평야에 인물들을 두고 오는 듯 끝이 났지만, 그게 이미 소설의 전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슴벌레식 문답’이, 인생의 어느 면을 단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도구’라면, 그 도구의 의젓함과 막막함 두 가지가 모두가 인생에 가깝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일방적인 ‘대답’이 아니라, 문답의 형식을 갖춘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어떤 질문을 어떤 시간을 바라보며 하냐에 따라, 답은 다르게 나온다. 우리는 왜 아프고 말았을까?,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든 아프다’는 답이 나온다. 반대로, 우리가 앞으로 왜 살아야 할까?,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든 산다‘는 답이 나온다. 그러니까, 과거의 막막함을 바라보되, 결국 끝에서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사슴벌레식으로 물을 것. 미래를 다시 기약하는 운명의 힘을 가끔은 되새기면서.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