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트빌리시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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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다리에서 그 남자가 울고 있었다

둘보다는 하나에 익숙한 여행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진과 한 달 동안 터키와 조지아를 여행하며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여행을 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우리는 행선지가 다른 각자의 여행을 하던 중이었고 단지 시간이 맞아 꽤 길게 함께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진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내 생각이나 감상에 몰두해 있었고, 거의 1년의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나온 진에게 나는 그저 잠시 여행을 나누는 동료였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서로를 존중하는 동행이었고, 다르게 말하면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만남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그와의 여행이 거의 끝나갈 때쯤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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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여행하는 동안 따로 다니지는 않았다. 우리는 거의 같이 다니며 보았고, 막간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맥주를 마시며 진솔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어쩌면 하나보다는 둘에 익숙해지고 있는 한 달의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나는 그가 해주는 음식들을 좋아했고, 커다란 덩치에 여행 내내 안심했으며, 투박한 듯 보이지만 여리고 섬세한 성정의 진이 찍는 사진들을 좋아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어쩌면 나는 진에게 여행 내내 어떤 부분을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날 트빌리에서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각자의 여행길을 위해 헤어지기 전날, 우리는 하루는 따로 일정을 잡아 돌아다니기로 했다.

혼자 여행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홀로 가고 싶은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트빌리시의 거리에서 나는 조금 외로웠다. 없다가 있는 것보다는 있다가 없는 것이, 하나에서 둘이 되는 것보다는 둘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조금 더 낯설었다.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두고 숙소를 나서기는 했지만 정확히 루트를 잡아두지 않은 채, 햇볕이 강하게 내려쬐는 여름의 트빌리시 거리를 혼자 오래 걸었다. 전날 진과 함께 다닐 때 지나쳤던 강가의 다리를 가보고 싶어, 약간의 청승을 곁들여 걷고 있을 때면 햇빛을 받아 살짝 반짝이는 트빌리시 가로수의 초록색 잎이 약한 바람에 살짝씩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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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가의 다리를 찾아갔던 것은, 전날 그 다리 밑에 무슨 전시회 사진 같은 것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위로는 자동차가 지나다니고 그 아래로 사람 지나다니는 길이 있는 2층 같은 다리였는데, 보행길의 가운데에는 두꺼운 벽 같은 것이 있어서, 지나다니는 왼쪽과 오른쪽 각각의 통로로만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 통로 옆으로 무슨 사진들이 쭉 이어 붙어 있었고, 왜인지 그 사진들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혼자 다리를 향했다. 찾아가 보니, 숙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트빌리시 중심가 즈음에 있었던 그 다리에 붙어 있던 사진들은 세계 곳곳의 분쟁 현장이나 제의 같은 문화 의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무슨 다큐멘터리 사진전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일 낮,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그 다리를 혼자 걸으며 사진들을 보았다. 머리 위로는 자동차의 소리가 계속 잔잔하게 울렸고, 약간 좁은 보행로에는 바로 아래에 있는 물 냄새가 풍겼다. 모두 훌륭한 사진들이었다. 어떤 사건의 단면을 명확하게 포착한 세계 곳곳의 사진들. 티베트의 풍장이라든지, 남미의 국경이라든지, 내가 알지 못했던 사건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사진들과 그 안에서 이것이 인간이라는 듯한 각각의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들을 보았다. 지나쳐 가며 사진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구경하고 있다가, 한 사진에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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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진은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이란에서 찍힌 사진이었을 것이다. 한밤중, 캠프파이어처럼 불을 피워 놓은 장작불 앞에 한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듯한 자세로 서서 울고 있었다. 등 뒤로는 어둠을 거느리고, 장작불의 붉은 빛에 얼굴과 상반신만이 비추어 보였다. 하얀 옷과 두건을 쓴 남자. 설명에는 강경한 이슬람 율법을 강조하는 정부가 노래 부르는 것마저 일종의 유흥으로 간주해 금지한 상황, 그 남자는 잡혀갈 것을 알면서도 울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진이라고 했다.

그게 과연 정말인지, 나는 지금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다만 불 앞에서 울고 있는 남자의 이미지에 완전히 압도되어 그 앞을 한동안 떠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절대 지울 수 없는 인간의 어떤 마음과, 거대한 것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왜소함이 그 사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내게 낯설었던 도시 트빌리시에서 나는 더 낯선 나라의 낯선 거리에서 홀로 울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진에서 보았던 그 남자의 얼굴은 내게 낯설지 않았고, 나는 아직까지도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트빌리시에그를 분명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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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상영합니다

그 후로 나는 종일 혼자 이곳저곳을 지나다녔다. 괜히 나를 시험해보고 싶은 날이 있는데 그날이 딱 그랬고, 다른 교통수단 없이 발로만 한나절 내내 걸어다녔다. 동물원에도 가서 코끼리도 보았고, 놀러 나온 가족들과 아이들도 보았으며, 평일에 한가로이 산책하는 그들은 오늘 어떤 휴가를 보내고 있을까 상상하며 벤치에 잠시 앉아 쉬기도 했다. 트빌리시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처럼 횡단보도보다는 지하도가 더 많은 인상이었는데, 이게 소련권 국가들의 특징인지는 모르겠다. 땡볕에 걷다가 지하로 훅 들어가는 굴 같은 지하도에서, 축축한 습기와 어둠 속에 그려진 자유로운 그래피티를 보며 단지 평화로운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갱스터와 힙스터 모두 그래피티에 어울리지만, 트빌리시의 그래피티는 힙스터에 가까워 위압적인 느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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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커다란 극장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영화 <기생충>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포스터 수준이 아니라 거의 한 벽면을 채울 만큼 커다란 광고면이 있었다. 그때는 <기생충>이 칸에서 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안 그래도 꼭 보고 싶어 하던 차였는데, 트빌리시에서 이 영화를 상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몇 시간 후에 영화 상영이 잡혀 있었다. 너무도 기쁘고 설레는 마음에 숙소로 돌아가 진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신나서 말했다. 다행히 진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유명해진 한국 영화를 거의 곧바로 볼 수 있다니, 영화라면 학을 떼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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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30석 정도 되는 그 작은 상영관, 한국의 예술영화관 같은 스타일의 상영관에서 결국 <기생충>을 볼 수 있었다. 신기하고 낯설게 꼬불거리는 조지아어 자막이 있는 채로 말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괜히 한국인인 것을 티 내고 싶어 한국어로 진에게 조잘거렸다. 한국 영화를 해외의 영화관에서 본 건 처음이었고, 또 자랑스럽기도 해서 들뜬 마음이었고, 같이 보는 조지아 사람들이 웃을 때면 저들은 이걸 어떻게 이해했나 싶었고, 아무튼 상영이 끝나고 대부분 만족해하는 얼굴을 보고 나도 만족했다. 영화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좋기도 했고. 즐겁게 보고 나와 숙소로 걸었던 트빌리시 거리의 밤 풍경이 아직 떠오른다. 진과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낼 수 있어서도 좋았다.

이런저런 경험 때문인지 내게 트빌리시는 기억의 한켠에 ‘예술의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피티, 예술영화, 사진전, 구제시장 같은 것들‧‧‧. 그런 것이 예술의 전모는 아니겠으나, 내가 트빌리시에서 평안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마주했던 예술의 작은 조각들 속에,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익숙한 인간의 얼굴이 그대로 다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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