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타슈켄트2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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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밤중의 수박 파티, 웨스트 코리안

수많은 수박으로 둘러쌓인 오밤중의 파티에, 그것도 외국인으로 둘러싸인 파티에 갑작스럽게 초대되었을 때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다. 막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도착한 서늘한 여름밤 지친 몸으로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열었을 때 풍겨 오는 수박 냄새를 나는 금방 맡을 수 있었다. 비릿한 단 냄새와 모르는 사람들의 체취가 섞여 있었다. 나를 반기는 대머리 아제르바이잔 주인 아저씨의 넉넉하고 단단한 미소가 나를 반기고, 향락에 취한 히피들 과는 다른 적당하게 나른한 배낭여행자들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첫인상에 마음이 풀어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수줍은 동아시아인으로서 나는 한껏 홀로 어색해 했다. 수박을 먹는 사람들을 우선 지나, 내가 배정 받은 침대에 짐을 풀고 나오자, 대머리 아저씨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라고 말했다.

테이블에는 그보다 많은 수박이 있을 수 있나 싶은 수박들이 가득했다. 대충 크게 썰어 놓은 수박이 투박하고 거대해 보였고, 조명이 있다고는 해도 어둠 속이라 얼마나 붉은지는 알 수 없었다. 열 명 조금 안 되는 여행자들이 작은 중정 중앙에 놓인 야외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적당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파티가 시작된지는 얼마 안 된 듯했다. 결코 이른 시간은 아니었는데, 이런 수박 자리는 늦은 시간에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대머리 주인 아저씨는 어색하게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다가 이야기했다. 이제 자기 소개를 간단하게 한 번씩 해보자고, 먼저 내 소개부터 하자면,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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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이곳에 와 여기에 게스트하우스를 연 사람이다. 여름이면 이렇게 밤마다 수박을 준비해서 투숙객들과 나누어 먹는 파티를 한다. 내일도 여니까 다들 사양하지 말고 와서 도란도란 수박을 먹자. 맥주도 있다. 다음 사람의 소개를 부탁한다. 그렇게 간단한 자기 소개가 이어졌고, 나는 갑작스럽게 도착한 외국에서 시작된 자기 소개 타임이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작은 동아시아인의 스테레오 타입답게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런 자리를 늘 부담스러워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어떤 날에는 긴장이 사그러들지 않기도 했다. 아직도 수행평가를 기다리는 중학생처럼 긴장하는 내 모습이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람들의 차례가 돌았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불현듯 이 긴장을 일순간에 해소하기 위해 적당한 농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무리수를 두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다는 전형적인 소개에 나는 내가 웨스트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웨스트 코리아? 노스나 사우스가 아니라? 누군가 그렇게 물었고 나는 사실 숨겨진 웨스트 코리아에서 왔다고 했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이후 사실 조크라고, 장난이라고 대답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약간의 실소를 띄었고, 나는 몇 마디를 덧붙인 뒤 애매한 소리나 해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내 앞에 놓인 맥주와 수박을 먹었다. 여기 맥주가 13도라는 사실은 물론 몰랐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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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농담은 어디에나 똑같다

사람들은 점차 취해 갔다. 맥주와 수박처럼 무르익는 밤이었다고 하면 조금 이상한 표현일까.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충 흘려 들으며 이렇게 취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을 하고 있다기 보다는 분위기에 취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한 사람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코가 라틴계처럼 구부러진 것 같은 백인 여자였는데, 인상이 서글서글하고 친근했다. 그녀는 자기가 서울을 여행한 적이 있다고, 한국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다. 한국을 여행해 본 외국인을 외국에서 만나면 아무래도 반갑다. 내가 온 곳을 알고 있는 외지인이라니···. 서울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갑작스러운 한국 이야기에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국은 어떤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등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때 백인 여자가 한국 지하철이 쾌적하고 깔끔하며 노선도 잘 되어 있다고 칭찬을 시작했고, 나는 신이 나서 한국 지하철 방송 성대모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부터 영어, 일본어, 중국어 음성에 더해 이상한 태평소 소리까지 따라했다.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 코미디가 먹혔다는 기분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특히 취했을 때는. 나는 이외에도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이상한 코미디와 개그를 선보였고, 나는 그들에게 점점 더 어딘가 좀 이상하고 웃긴 동아시아 남자애가 되어 갔다. 그리고 나는, 한국이건 외국이건 그렇게 비추어지는 내 이미지를 좋아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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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우리들은 통성명을 하며 서로를 조금씩 더 알아갔다. 내게 말을 걸었던 백인 여자의 이름은 유아나였고, 발음이 조금 독특해 사람들이 이름을 한번에 외우지 못했지만, 그럴 때마다 자기 이름이 유아나라고 웃으며 고쳐 주는 여자였다. 루마니아인인 그녀는 영어 교사를 하다가 휴가를 받아 이쪽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들어보면 이곳저곳 안 간 곳이 없는 여행광이었다. 그 옆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난민 자격으로 캐나다에 이민을 가서 잘 뿌리내린 세이가 있었다. 수염이 기르고 눈빛이 진한 세이는 그야말로 날카로운 아저씨 같았는데, 웃으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이 환해졌다. 그가 왜 그때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미 그곳에서 몇 주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끼어든 마르고 키 큰 장난스러운 흑인의 이름은 몰이었다. 샘 오취리를 분명 닮은 그는 계속 이곳저곳 장난을 걸었다. 이상하게 귀엽게 생겨서 그가 하는 행동이 우악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청년 같았고, 여행을 하려고 돈을 모으다가 어쩌다 이곳에 도착해서 돈이 떨어질 때까지 한참 지내고 있다고 했다. 대책도 계획도 없어 보이는 늘 팬티가 다 보이게 바지를 내려 입는 애였지만 적어도 악의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파키스탄 친구, 일본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전한 군국주의 나라라고 비판하던 일본 아저씨, 우즈베키스탄 의대 학생····. 그곳에는 정말 이곳저곳에서 온 별다른 계획 없는 사람들이 많았고, 별 이야기를 다하며 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13도짜리 맥주를 먹으며 친해진 우리들은 다음날 서로를 격의 없이 놀리며 쏘다니는 사이가 된다.

아직도 파키스탄인 직원의 볼멘소리가 귓가를 멤돈다. 파키스탄보다 인도가 더 낫다는 우리들의 장난스러운 공격에, 그는 잠자코 있다가 말을 터트렸다.

“노...노....파키스탄...이즈 그레이트....!”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의 밤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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