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눈물이란 무엇이냐.

슬픔이 원한의 감정으로 응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런 눅눅한 주제를 붙잡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두 남자가 울음을 꾹꾹 눌러 참아가며, 억제하며, 억압해 가면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난 직후부터였으니 아마 한 달은 넘었고 두 달은 채 안 됐을 것이다.

그런 은밀한 대화를 내가 듣고자 해서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 비밀유지가 필요할 수도 있는 수사기록물 중에 하나였다. 수사관 신분인 그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참을 수가 없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 공개해 버렸다. 디지털 시대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렵거니와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물이 너무 많아져버린 연못
물이 너무 많아져버린 연못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들이 나눈 대화 내용 자체가 아니었다. 절로 터지는 울음마저도 각자 스스로 재량껏 억압하고자 애를 쓰는 그 형식이었다. 내용은 어린 해병대 병사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 직후부터 조금씩 흘러나온 정보들로 해서 대강의 스토리라인이 이미 잡혀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관계된 사건이라서 숨길 수가 없는, 숨겨질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숨겼다. 아니 숨기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제2, 제3, 제4의 억울한 사람이 무한대로 발생해 나갔다.

이래서 자살을 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그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하루가 한 시간처럼 후딱 지나가버렸다. 그렇다고 거기에 완전히 몰입해서 인사불성으로 빠져들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서도 바람이 댓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소리 정도는 의식하고 있었다. 댓잎들이 서로의 몸을 비벼대는 소리 속에 이슬비가 묻어 있음 또한 느끼고 있었다.

몸으로 직접 당하지 않아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나도 이제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린 시절 깊은 산속 절간에서 두 달 정도 함께 지냈던 노승이 생각난다. 그는 골방에 문을 꼭 닫고 앉아 상체를 좌우로 가만가만 흔들어가며 금강경 같은 염불을 읊조리면서도 내가 마당에서 뭔 짓을 하고 있는지를 다 알아채서 “너 이노-옴”하곤 했었지.

“오매 또 비네. 또 비여. 징상스러 죽겄네 잉?”

걸쭉한 여성성의 목소리가 우리 집을 옆을 지나간다. 나는 물론 그녀가 누구인지 안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그녀는 아마 올해 농사를 걱정하며 지나는 길에 물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나는 우리 집 연못을 힐끗 쳐다보고, 이어서 바람에 뒤채는 댓잎이 빗물에 젖어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울컥 짜증이 솟았을 것이다.

나는 나뭇가지에 맺힌 빗방울을, 그 빗방울이 연못 위로 떨어지는 순간에 벌어지는 파문을 상상해본다. 그것은 잘 새긴 조각 같기도 하고, 지금 막 피어나는 작은 꽃송이 같기도 하다. 아쉽다. 내게 그림 솜씨가 있었다면 그 무수한 파문을 10호, 100호, 500호 크기의 화폭에 담아놓고 ‘이것은 천지개벽이란 이름의 꽃이란다’하는 제목을 붙였을 텐데.

비가 많아졌다. 그야말로 ‘징상스럽게’ 많아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일 년이 다 돼간다. 작년 3월에 나는 물이 줄어서 못생겨져 가는 연못을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후배들에게 붕어 등 물고기들을 죄다 잡아가 달라는 청탁을 했었다. 지하수를 뽑아 올려서 간신히 명맥이나 유지해 온 연못을 더 이상은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한 달이 채 안 돼서부터 마치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사흘이 멀다고 비, 비, 비의 행렬이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리고 연못은 자동으로 부활해서 이끼와 미나리 등 수생식물이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리는 빗방울을 보면서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늘도 무심하지 않아서 함께 울어준다고, 나는 그런 말을 하나도 신뢰하지 않지만, 가끔은 믿어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긴 그래서 그토록 많은 소설가와 시인 그리고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울음과 생명은 불가분의 관계 즉 원래가 한 몸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즐겨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기가 막힐 때는 울어야 해. 원도 한도 없이 펑펑 큰소리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어야 해.”

내 경험으로만 봐도 그 말은 확실히 맞는 것 같기는 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문득, 갑자기, 뜬금없이 생각나는 옛날 화가들의 그림이 몇 작품 내 머릿속에는 들어 있다. 꼿꼿하게 앉은 자세로 부둥켜안은 채 완전 육탈이 돼서 뼈만 남아 있는 그림도 그 중에 하나이다.

이 그림 속 주인공들은 크기와 골격으로 미루어볼 때 남자와 여자이고, 여자가 남자의 무릎 위에 있는 그 형태로 봤을 때 성기가 결합된 채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는 ‘울어요’란 제목을 붙이는 방식으로 자기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설명함과 아울러 인간 존재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굉장히 심각한 철학적 주제를 제시한다.

이런 그림은 일단 슬프다. 슬프되 처연하게 슬프다. 한 번 봐도 슬프고, 두 번 봐도 슬프고, 계속 보면 계속 슬프다. 그 이상 다른 것은 없다. 그저 슬플 따름이다. 가슴이 아릿하고 먹먹하기는 하지만 눈물이라든가 기타 등등 생물학적 현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개의 슬픔은 감동이라든가 분노, 결연한 의지, 원한 등등의 다른 에너지로 전환돼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계기로 작동하지만, 성애가 원인이 된 슬픔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돼 버린 까닭에 눈물조차도 불러내지를 않고, 다른 에너지가 생성될 이유도 까닭도 없이 그저 처연하게 슬프기만 하다.

울음 중에 최고의 극한은 아무래도 끅, 끅, 소리일 것이다. 울고 싶지만 울 수가 없는, 울어야 할 상황인데도 울어지지 않는, 목구멍 저 안쪽의 울림통을 스스로 꽉 닫아놓고 있으면서도 울고 싶어 하는, 울지 않으면 금방 죽어버릴 것 같아서 남몰래 몸부림을 치고 있음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끄윽끅 소리, 이것은 비유를 하자면 분노라든가 원한의 감정 같은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되는 바로 그 순간으로 여겨진다.

이런 에너지는 그때까지의 삶을, 그런대로 평온했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게 만든다. 과거 왕조 시대에 그런 원한의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집을 나와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자기와 같거나 비슷한 에너지를 내장한 사람을 열심히 찾아다녔다지만, 디지털이 주도하는 21세기 현대사회는 굳이 그런 고생을 할 필요조차도 없다. 숲속으로 들어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지 않아도 사실이, 진실이 때가 됐다 싶은 순간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드러내는 게 디지털 사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빗방울
빗방울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만약에 현대가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시대였다면 해병대 병사 사망 사건 수사와 관계된 두 남자의 대화는 녹음이 안 됐을 것이고, 녹음이 안 됐다면 억울한 분노를 만천하에 드러내 보일 방법이 없어서 그만 스스로 혀라도 깨물어야만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견상 가해자와 피해자로 보이는 두 남자가 사실은 다 같은 피해자이고, 어쩌면 가해자가 더 큰 피해자일 수 있다는 추론마저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이다 못해 가해자가 더 큰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한 이런 기괴한 오류의 구도는 매우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간단했다. 사망 사고와 성폭력 사고는 해당 부대의 수사관들이 1차 수사를 해서 일반경찰에 이첩해야 한다는 새로 제정된 법률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해병대의 수사 책임자는 그렇게 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뜻밖의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대령 계급인 해병대 수사 책임자는 지휘체계상 최고 명령권자인 사단장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그런 의견을 1차 수사기록에 넣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수사기밀을 어떻게 알았는지 V로 표시되는 사람이 최고 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일은 급박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사단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삭제하라는 지시가 해병대 수사책임자에게 내려왔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 해병대 수사책임자는 원리원칙대로, 법률에 정해진 대로 1차 수사기록을 해당 경찰청 수사과로 보냈다. 그러자 항명죄라는 용어가 각종 매체를 도배하기 시작했고, 해병대 수사관 전원이 수사 대상이 돼서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범죄 혐의자로 전락하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해당 경찰청의 입장이랄까 태도가 또한 일반상식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자기들이 접수한 1차 수사기록을 다른 기관에 넘겨버린 거였다. 1차 수사기록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 접수는 안 했다는 기괴한 논리를 개발해서 공식 발표까지 해버리는 방식으로 해병대 수사관들을 한없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이해를 하고자 해도 이해가 안 된 수사관 중에 한 명이 해당 경찰청 수사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때의 통화내용이 나를 그토록 서글프게 한 바로 그 녹취록이었다. 해병대 수사관은 이십대 혹은 삼십대로 추정되고, 경찰청 수사팀장은 사십대 이상 오십대로 추정되는데 알고 보니 수사팀장은 전직 해병대 수사관 출신이었다. 해병대에서 갈고 닦은 수사 능력을 인정받아서 일반 경찰에 특채된 케이스인 것 같았다.

어쨌든 현직 해병대 수사관이 억울한 슬픔을 견디다 못해 전직 해병대 수사관 출신 경찰청 수사팀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기를 손에 든 채로 거수경례를 하고 있음이 분명한 절도 있는 목소리로 해병대 몇 기수 누구라고 자신의 관등성명을 밝혔다. 그런 다음 경찰청 수사팀장이 해병대 출신이고 자신의 대선배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해병대 수사관 출신의 현직 경찰청 수사팀장은 전화를 걸어온 해병대 수사관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전화를 걸어온 목적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평상시라면 한참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으니 조금은 엄격하면서도 유쾌한 반말 투의 응대를 했겠지만, 그는 처음부터 ‘응’도 아니고 ‘예’도 아닌, 발음이 매우 부정확해서 해석이 거의 안 되는 쩔쩔매는 투의 목소리를 간신히 토해내고 있었다.

왜 그러셨어요, 하고 현직 해병대 수사관이 추궁했다. 그러자 경찰청 수사팀장은 아 예, 응, 그게 저기,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해병대 수사관은 그건 아니잖아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하고 다시 추궁했다. 경찰청 수사팀장은 여전히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아 예, 응, 저기, 하고 얼버무렸다. 그런 식의 대화 아닌 대화가 한참을 이어지던 어느 순간 경찰청 수사팀장의 목소리에 끅, 끅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경찰청 수사팀장은 처음부터 눈물을 참느라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해병대 수사관 또한 목소리에 자동으로 섞여드는 끅, 끅 소리를 참아내지 못한 채로 이건 아니잖아요. 이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죠? 하고 비통하게 자조적으로 묻고 있었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자면 해병대란 멀리서 그 복장만 봐도 무서운, 씩씩하게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귀신 잡는 해병’이란 구호를 어려서부터 하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게도 용감하게 활달한 사람들이 저렇게도 비통한 목소리로 우물쭈물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으니 그저 서글플 따름이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