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1.06.14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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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벵갈루루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1. 벵갈루루라는 발음

나는 처음부터 이 도시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벵갈루루, 벵갈루루. 뱅글 돌며 혀끝에서 가볍게 튕겨 나오는 산뜻한 기분. 걸어 다니며 도시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나를 이 도시로 이끈 친구 마노즈는 도시의 이름이 ‘방-갈루’에 가깝다고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발음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인도 남부의 대도시에는 거리마다 야자수들이 가득했고(우리는 야자수를 볼 때마다 어쩐지 진짜 ‘이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햇빛이 쨍쨍했다. 사람들은 인도 북부의 번잡한 대도시들보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거리를 돌아다녔고, 남부의 다른 휴양지들처럼 쉬러온 사람들 특유의 느긋함과도 사뭇 달랐다. 바쁘긴 한데 쾌활한 구석이 엿보이는, 피부가 조금 더 까무잡잡한 사람들. 나중에 듣다보니 뱅갈루루는 남인도의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개방적인 곳이라고 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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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이었는데 32도를 웃돌았다. 낮에 반팔을 입고 길가를 돌아다니다보면 바나나 잎이나 철판 위에 가벼운 간식들을 집어먹고 있는 회사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가끔씩 이마 위에 하얗거나 빨간 점을 발라, 오늘 사원에 들렸다는 표식을 비추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먹는 남인도의 밥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북인도의 음식(커리나 난 같은)과 묘하게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더운 지방의 음식들이 으레 그렇듯 조금 더 간이나 향이 강했고, 그게 또 너무 맛있어서 배고플 때마다 와구와구 먹었다. 인도는 역시 인도인지라 거리가 번잡한 것은 비슷해서 사람들은 무단횡단을 쉽게 했다. 다만 무단횡단의 느낌이 조금 다른 느낌? 콜카타나 델리에서 무단횡단을 하다보면 자칫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 사람들은 (조금 웃기는 표현이지만) 질서 있게 무단횡단을 했고 그건 마음의 안녕에 분명한 도움이 되었다. 남부의 인도 아이티 기업들이 모여 있다는 번화한 도시 벵갈루루는 세련된 동시에 투박하기도 해서, 지나치다 왠지 미국드라마에 나올만한 인도의 수학천재들을 만날 수 있을 것도 같은 느낌이었다.

더운 나라에 있을 때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늘이다. 나올 때 시원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사우나에 들어가는 것처럼 땡볕에 걷다가 그늘로 돌아와 누워 맞는 선풍기의 바람은 사람을 기분 좋게 노곤하게 한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없는 여행자에게 산뜻한 노곤함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내가 묵는 게스트하우스의 천장에는 거대한 선풍기가 매달려 느릿하게 돌아갔는데, 그 큰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자다보면 내가 정말 어딘가 다른 곳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저 바람에 대해 생각했다. 마노즈가 오토바이로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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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도인 여행자

마노즈는 내가 만났던 인도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다. 우리는 타지마할이 있는 인도 북부의 도시 ‘아그라’의 게스트하우스에서 같은 방을 쓰다가 만났다. 그는 딱 봐도 꽤 똑똑해보였는데 많이 배운 사람 특유의 오만한 눈매가 없었고, 20대 초중반의 활기를 띠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사람 대하는 법을 알고 있는 남인도에서 온 배낭 여행자였다. 그와 30분도 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인도 사람도 인도를 여행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로부터 알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였는데, 인도는 무척 넓고 스무 개가 넘는 주들은 각각 한국보다 크기도 하고, 심지어 말도 다른 경우가 있다. 남인도와 북인도의 깊고 깊은 역사 문화적 차이까지 운운할 필요는 없겠지만, 인도는 그야말로 넓은 세계였다. 마노즈는 남인도의 많은 사람들이 북인도에 가본 적도 없고, 지금 우리가 있는 타지마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잘은 모른다고 했다. 자신은 먼 북부의 라다크를 여행하다 고향으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 중인데, 힌디어를 잘 몰라 현지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다 몇 번 사기를 당한 적도 있다고 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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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나고 자라 전자공학 석사과정까지 공부하고 있는 벵갈루루는 인도 곳곳의 이공계 지망자들이 모이는 곳이라고도 했는데, 그는 주로 그들과 영어로 대화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어는 느긋하면서도 또 정확한 발음이었다. 걔는 인도인이었고, 나는 한국인이었는데 북인도에서의 처지는 약간 비슷했다. 무엇보다 그의 눈매가 꼭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이 편했다. 성격 좋은 원래 알던 사람 같은 느낌. 사람은 사람을 얼마 만에 알 수 있는가? 오랜 시간 알아야 알 수 있기도 하고, 아주 잠깐의 시간으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알 것 같다는 (적어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인도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 그를 만나러 벵갈루루에 왔다. 발음이 좋은 도시네,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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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했냐면

내가 게스트하우스의 그늘 속에 미역처럼 누워있을 때 그는 세련된 오토바이를 끌고 나를 데리러 왔다. 만났던 시간은 한나절, 만난 지는 한 달 만에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너무 반가웠다. 원래 오래 알던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우리는 웃으며 악수했다. 그는 그의 대학 친구 둘을 데려와 소개시켜주었다. 소누와 마가. 어차피 방학 중이라 시간이 남는다며 잘됐다고 그들은 웃었다. 마노즈처럼 그들도 웃음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이었다. 모두 내 또래였다. 생각해보면 여행지에서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현지 또래들과 어울린 적은 처음이었다. 친구들끼리 모여 누군가의 자취방으로 향하듯 우리는 소누의 방으로 갔다.

바닥이 희고 차가운 돌 같다는 걸 빼면 한국의 자취방과 닮아 있었다. 하이데라바드라는 다른 도시에서 일종의 유학을 온 소누는, 많은 자취생들이 다소 부실하게 챙겨먹듯이 마치 햇반 데워주듯 우리에게 간단한 빵을 몇 개 주었다. 소누는 요새 블랙핑크에 빠져서 내게 제니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마노즈나 소누보다 한 살 많았던 마가는 우리나라로 치면 약간 진지하고 보수적인 어른 컨셉이라, 마노즈와 소누는 그를 ‘베이비-부머’라고 윗세대를 놀리는 말로 놀려댔다. 허허, 하며 웃는 진중한 마가의 얼굴이 좋았다. 나는 스케치북에 한글로 그들의 이름을 쓰고 자주 그리는 새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공유하며 어울렸다. 한국의 친구 집에 놀러온 기분이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도 닮았구나, 다른 것들과 마주하는 흥분보다 같은 것들과 어울리는 편안함이 소누의 자취방에 있었다. 별 다른 것 없이, 으레 그래왔듯 그렇게 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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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번화가로 나갔다. 술을 터부화하는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보통 구석에 숨어있는 철창 달린 가게에서 술을 사야했다. 술집은 꿈도 못 꾸었다.) 벵갈루루의 번화가는 그냥 홍대 앞 같았다. 자유로운 분위기에 술집들이 이어졌고, 밤에 보니 건물들도 내가 알던 한국의 건물을 닮았다. 마노즈, 나 지금 고향에 온 것 같아, 내가 말하자 그들은 웃었고 우리가 맥주를 사서 건배할 때 술집에 스크린에서는 축구 경기가 중계되었다. 다들 기분 좋게 취해 사먹었던 노점의 매운 커리의 매운 향만이 이곳이 홍대가 아니라 벵갈루루임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몇 주 전에 만났던 친구들과 나누었던 한담들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그 또래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별 다를 것 없이 그들의 일상에 섞여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그저 좋게 남아있다. 어설픈 가정이지만 그들이 만약 한국인이었어도, 그렇게 그들을 한국에서 만났더라도, 나는 그들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에 가깝게 느껴지니까. 나는 그들의 성격을 좋아했다.

마노즈와 보냈던 아그라에서의 한나절과, 벵갈루루에서의 이틀. 그는 이제 한밤 나를 게스트하우스 앞에 내려다주고 포옹한다. Have a nice trip, dude. 그의 느릿한 말투대로. 내가 좋아하는 그의 눈매로 웃으면서.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렇게 너에 대해 쓰면, 마치 모든 기억이 글자에 붙어 갈무리되고, 다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만, 왠지 너만큼은 꼭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노즈, 여행은 어쩌면 다시 그곳에 가야할 이유를 만들러 가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그렇게 내게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 거기에는 네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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