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축하해, 규르카
생일 축하해, 규르카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3.02.03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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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카르스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반 떠나기

터키 최동단의 도시 반(van)에서 진과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생각했다. 반에서 여행을 함께 했던 지크란은 그 도시에서 쳐야할 시험을 끝마치고 돌아갔다. 특수장애 학생들을 돕는 일종의 임용고사라고 했는데, 지크란은 맨처음에는 자신의 미래를 걸고 보는 시험에 퍽 긴장한 눈치였지만, 시험을 보고 나서는 헛헛해했다. 시험이 채 5분도 되지 않았다며 지크란은 어이없이 웃었다. 이러려면 이 먼 곳까지 나를 불렀을 필요가 있을까. 지크란은 우리에게 물었고, 그래도 우리를 만나서 즐거웠지 않았냐고 하던 차에 지크란이 말했다. 그래도 너희를 만나서 즐거웠다, 모처럼 여행도 하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시험을 마친 지크란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진과 나와 지크란은 카페에 들렀다.

지크란은 이 만남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했다. 나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나는 지크란의 꼿꼿하지만 다정한 태도 같은 것들이 좋았고, 세상을 막 궁금해 하는 호기심어린 태도가 좋았다. 지크란과 카페에 마주 앉아 서로에게 마지막이 될 선물을 교환했다. 여행이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기억은 점차 옅어지고 흐릿해질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기억을 하고 싶었고, 지크란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펜으로 짧은 편지를 써서 건넸다. 지크란은 진과 나에게 가방에 있던 머리끈 같은 것을 줬다. 내가 받은 것은 붉은색에 하얀색 땡땡이가 그려진 머리끈이었다. 지크란이 내가 준 지폐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그가 내게 준 머리끈을 아직 가지고 있다.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지크란만큼은 어쩐지 조금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지크란을 보내고 우리는 처음에 에르주름에 가려고 했다. 순전히 내가 그곳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인데, 단순히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고풍스럽고 완고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관광객들이 잘 들리지 않는 중소도시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지방으로 이동하는 게 생각보다 퍽 힘들듯, 에르주름으로 가는 버스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던 버스도 매진이라고 했던가. 진과 나는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우리는 터키 여행의 끝에 육로로 예전에는 그루지야로 불렸던 조지아로 넘어가기로 했으므로, 북쪽으로 가야하기는 했다. 그때 찾은 것이 ‘카르스’라는 도시였다. 동쪽에 아르메니아와 상당히 붙어 있고, 북쪽으로는 조지아와 가까운 터키 북동쪽의 도시.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몇몇 유적이 남아 있다는 그 도시로 가는 버스를 끊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에 떠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한 사람을 보고 나는 헛것을 본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신기했던지, 오래 알고 지냈지만 완전히 잊고 있던 사람을 갑자기 마주친 것 마냥 놀랐다. 튀어나온 사람은 이전에 터키 중앙의 마을인 카파도키아 괴레메에서 만났던 중국인 여자애 단이었다. 단과 나는 괴레메 마을의 어느 히피 혹은 힙스터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다. 스스로를 예수라고 소개하는 어떤 어설픈 히피 주인장에게 마음이 상한 단은, 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거의 자기 몸 크기에 가까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뚜벅뚜벅 떠났다. 학생 같지는 않았고, 체구가 작지만 눈빛이 어른스럽고 단단해서, 그의 얼굴을 나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갑자기 튀어나온 단은 나와 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며,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신기하다고 단은 계속 이야기했다. 단은 여전히 적당히 쾌활했고, 지적으로 보였으며, 풍파에 익숙한 사람처럼 단단해보였다. 그가 한국말을 알았다면 나는 그를 단단이라고 부르며 놀렸겠지만 단은 한국말을 몰라 아쉽게도 그를 단단이라고 부를 일은 없었다. 단과 우리는 지나온 이야기를 짧게 나누었다. 그도 우리처럼 카르스로 떠난다고 했다. 아직 버스표는 끊지 않았다고 하는 단에게, 내일 아침 떠날 우리의 일정을 말하자 단은 흔쾌히 같이 따라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배낭을 멘 세 명의 동양인은 잠시 함께 했다. 덩치가 크고 몸이 좋은 진이 가운데에 있고, 체구가 크지 않은 단과 내가 그 옆에 걸어가면 꼭 삼각형의 대형으로 선 기분이 들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카르스의 대학생들

버스를 오래 타고 도착한 카르스는 어딘가 눅눅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기분 나쁜 눅눅함은 아니었다. 강원도 산골에 있는 어느 스키장 밑 마을 같았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붐비지 않지만 사람이 많을 때는 장비를 렌탈해 줄 것도 같은, 그러나 그런 기색은 거의 보이지 않는 적당한 지방 도시의 느낌이었다. 여행객이 많이 찾는 도시도 아니라서 그런지, 값싸게 묵을 수 있는 숙소도 많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카르스에 도착하기 전에 일반인이 자기 집을 대여해주는 에어비앤비를 뒤졌고, 괜찮아 보이는 한 곳을 찾았다. 정류장에 내려 그곳을 찾아 걸어갔다. 돈을 아끼겠다고 인터넷이 되지 않는 유심칩을 쓰고 있는 단이 미리 핸드폰에 다운받아 놓은 지도를 열심히 쳐다보는 단의 뒤에서 계속 걸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간 곳은 그저 아파트와 빌라 사이에 있는 커다란 건물이었다. 여기서 누가 방을 빌려준다는 건지, 사람 기척도 거의 없었다. 지도를 이모저모 따져 봐도 여기가 맞는데, 연락을 보내도 빌려준다는 사람은 바로 연락이 안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단과 진과 나는 일단 배낭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우선을 더 기다려보는 게 맞겠지.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리에 나앉은 동아시아인 세 명을 둘러보았다. 주변과 우리가 서로를 어색해하고 있을 때, 건물 안 쪽에서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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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멜리였다. 20대 중반의 의대생. 그는 이 건물 몇 층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대학 친구들과 함께 하우스쉐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적어도 다섯 명은 넘어 보였다. 한 층에 집이 두 개였고, 그중 한 집을 우리에게 에어비앤비로 빌려준 상황이었다. 멜리는 세를 들어 사는 집에 이렇게 또 방을 빌려주는 것은 사실 불법이라며, 건물을 드나들 때는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누군가 어떻게 이 건물에 묵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멜리의 친구라고 대답해달라고 했다. 잠시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좀 지고 있다고 말하라고 했다. 어쩌면 그래서 멜리와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마침 나이도 거의 비슷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우리가 묵을 방으로 향하자 젊은 애들이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를 향한 환영파티인가 싶었지만 당연히 그렇지는 않았다. 마침 하우스 메이트 중 한 명의 생일이라고 했다. 생일의 주인공은 옆방에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이제 곧 깜짝 생일 파티를 할 건데 너희들도 같이 할래? 멜리와 몇몇 친구들이 우리에게 물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신발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신발장을 지나, 그렇게 어지러울수록 마음을 끄는 친숙한 신발장을 지나, 생일인 규르카가 자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불을 끄고, 단과 진과 나를 포함한 거의 열 명의 애들이 살금살금 걸어갔다. 방에서 갑자기 불을 껐고, 누군가 규르카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깨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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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 되르뎀 규르카, 이키 되르뎀 규르카

생일 축하합니다, 멜로디에 맞춰서 우리는 계속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해, 규르카, 생일 축하해, 규르카. 규르카는 처음 보는 낯선 동양인이 나타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에 당황하지 않고, 맨 앞에 있던 그의 여자 친구를 끌어안으며 환하고 넉넉하게 웃었다. 놀라서 감동하지도, 무감하지도 않은 넓은 얼굴로 느지막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좋았다. 카르스에 도착하자마자 벌써 많은 표정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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