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요즘처럼 날이 덥고 후덥지근할 때면 집에서 뭘 해먹는 것도 일이다.

특히 나처럼 먹는 일에 큰 관심도 없고 게다가 음식솜씨는 요린이에 가까울 정도로 젬병이어서 삼시세끼 먹거리에 대한 고민으로 이 계절을 나기가 쉽지는 않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그러다보니 얼마 전 부터는 자연스레 하루에 두 끼만 해결하는 것으로 생활패턴이 바뀌게 되었다. 사실 아침부터 음식을 준비하고 차려서 먹는 시간보다는 잠을 선택하는 것이 직장인이나 학생들에게 국룰이 아니던가. 우리 집도 마찬가지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남편은 아침식사를 하는 게 오히려 부대낀다고 한다. 방학 중인 아이들은 해가 중천에 올랐어도 일어나질 않으니 아침 식사는 그냥 패스다. 그러나 두 끼만으로 식사를 해결한다고 해서 먹거리에 대한 고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오늘 저녁엔 뭘 해먹어야 하나의 고민은 내 남은 평생을 질척거리며 따라 붙을 거란 불길함 마저 든다.

식재료가 풍부해지고 다양한 맛을 겸비한 퓨전 음식도 많아서 언뜻 생각해보면 뭘 그렇게 고민할까 싶겠지만 우리 식구들의 입맛이 좀 고리타분하다. 된장찌개와 김치를 최고의 반찬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어릴 적부터 입에 밴 엄마의 맛이랄까.

한 여름의 뙤약볕이 절정을 치닫고 있을 때에도 엄마는 삼시 세끼 밥상을 차려 내었다. 보리와 쌀이 반반 섞인 밥과 뽀얀 밀가루 풀로 국물을 낸 열무김치와 마당의 화단 한편에 매달린 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넣은 된장찌개는 여름 한 철, 종종 먹던 식단이었다. 그런 입맛에 길들여진 탓에 나도 밥과 찌개와 김치가 주를 이루는 밥상을 늘 준비하였다. 제철에 나는 식재료들을 다듬고 유투버들의 레시피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말이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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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입맛은 전통적인 한식에서 벗어나 점점 다채로워지고 별스러운 맛과 모양을 뽐내는 음식들도 많아졌지만 아직도 우리 식구들은 한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음식을 접해본 아이들 덕택에 색다른 메뉴를 접해 볼 기회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레스토랑을 가 볼 수 있었던 것도 아이들 때문이었다.

여름휴가철을 맞이해서 가족끼리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를 계획하던 중 아이들의 제안으로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를 가게 되었다. 레스토랑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적이 있지만 주 메뉴는 무엇인지 가격대는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스테이크 하우스라니까 스테이크가 주 메뉴인가보다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식구들의 육류에 대한 선호도는 삼겹살을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낮은 편이다. 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누구보다 잘 맡아내고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어하는 나의 개코 때문에 집에서도 육류를 즐겨 먹지 않는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도 고기반찬을 잘 해먹이지 않는다며 주변 어른들한테 핀잔을 들었을 정도이다.(이 부분은 지금까지도 많은 반성을 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스테이크에 대한 구미가 썩 당기진 않았지만 온 가족의 나들이에 설래임이 앞서서 고리타분한 내 입맛 따위는 눈 딱 감고 무시해버렸다. 레스토랑의 위치도 놀거리와 볼거리들이 밀집해 있는 핫한 장소라니 뭐를 먹든 전혀 개의치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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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긴 좋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관과 실내 인테리어가 눈을 호강시켜 주었다. 아늑한 색깔의 조명과 낮은 조도는 음식의 색깔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도 같았다. 고급 진 레스토랑에 처음 와봤다며 이리저리 찍어 댄 가족사진에도 내 얼굴의 주름은 다소 묻힌 듯 보였으니 말이다. 음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상냥함을 잃지 않고 서빙을 해 주던 직원들 덕분에 기분 좋은 식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두툼한 스테이크를 한 입 머금었을 때 입안에 가득 풍기던 것은 더 이상 누린내가 아니라 특유의 향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함께 한 가족 나들이었으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고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했다. 강남 한 복판의 번화가는 우리 동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고 정말 볼거리도 많았다. 한창 점심시간이라 식당가는 북적거렸고 대기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우리가 식사를 마친 레스토랑 근처에도 다양한 메뉴의 식당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퓨전 짬뽕집도 눈에 띄었다. 불과 한 시간 전, 두툼한 스테이크와 각종 해산물을 올리브 오일에 볶은 스파게티를 먹고 후식까지 먹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짬뽕의 얼큰함이 머릿속에 마구 상상이 되어 목구멍에 머물렀다. 빨간 국물에 잠겨 있을 면발들은 내 발걸음을 휘감고 있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 에서 썸을 타고 있던 두 남녀가 주고받은 유명한 대사가 있다.

집에 데려다 주고 뒤돌아서려던 남자에게 여자는 “라면 먹을래요?”라며 쑥스러운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다. 오늘날 자유분방한 연애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그 시절에 여자가 먼저 직접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대사이다. 지극히 평범한 문장 속에 야릇한 감정이 녹아들고 있으니 나도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 썸을 타고 있는 상황이라면 한 번쯤은 내뱉어 보고 싶었을 심쿵한 대사이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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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를 개봉했던 시기에 안타깝게도 나는 이미 썸을 타고 연애를 거쳐 유부녀의 대열에 합류한 뒤였으니 새로운 썸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때였다. 그러니 누구한테든 야릇한 감정을 녹인 채 라면을 먹겠냐고 물어볼 기회 또한 생길 리 만무했다. 고작해야 밥하기 귀찮은 어느 한 끼에 밥 대신 라면을 먹겠냐고 식구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비록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썸을 타는 풋풋한 청춘 남녀는 아니지만 그 라면 대신 짬뽕은 어떤 지 중년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남편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짬뽕 먹고 갈래?”

멋쩍은 웃음을 띠며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쳐 주는 바람에 우리는 당당히 짬뽕을 주문할 수 있었다. 점심을 또 먹냐면서 딸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는 스테이크를 자르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은 지 한 시간여 만에 마치 처음 시작하는 식사인 양, 젓가락에 짬뽕을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평소엔 생활습관이나 가치관 등이 잘 맞지 않아서 티격태격 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식성에 대한 케미는 희한하게도 잘 맞는다.

그렇다고 스테이크와 스파게티를 선택한 것에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 가족에게 신문명이었을 새로운 도전이고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 입맛만 고수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새로운 문명을 접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글로벌한 시대를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적이거나 퓨전스런 음식을 접하는 일은 아직은 쉽지가 않을 듯하다.

오늘 저녁엔 한 여름 더위를 이기기 위해 오이를 채 썰고 미역을 버물려서 새콤달콤한 오이냉국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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