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베란다 창을 통해 스미는 아침 햇살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른한 일요일 아침, 멍하니 넋을 내려놓은 채 창 너머 보이는 아파트 외벽사이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하늘을 찾아내었다. 주말 아침은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고서야 일어나는데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일찍 깨었다. 아마도 전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덕분일 것이다. 내가 잠드는 시간은 한창 밤이 깊은 두 세시 정도이다. 집안일을 마무리 하고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 어느새 시간은 한밤중으로 치닫고 있었다. 매번 그러다보니 평일에는 눈뜨는 일이 버겁고 힘들다. 그래서 주말엔 아침 시간을 잠으로 몽땅 소비해 버리곤 했는데 최근에 코로나를 앓은 이후로 일찍 잠드는 습관이 생겼다. 아니, 습관이라기보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몸살의 여파로 저녁만 되면 모가지를 90도로 꺽은 채 꼬박꼬박 졸면서 비몽사몽을 해매다 보면 밤 열두시를 넘기는 일은 쉽지 않다. 어젯밤에도 뭔가를 하겠다고 잔뜩 늘어놓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대충 미뤄둔 채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의식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코를 쌕쌕 골았을 것이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가스 렌지의 불을 켜고 주전자를 올렸다. 한나절 동안은 보온을 유지해 내는 텀블러에 새까만 커피가루 한 포를 털어 넣었다. 이 나이쯤 되면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다며 커피를 멀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은 하루에 두 세잔씩 마셔도 불면의 걱정은 없다. 커다란 솥단지에 커피 대여섯 포를 때려 넣고 한 가득 끓여서 식힌 나만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냉장고에 넣어 두고 물마시듯 음용하는 일은 더운 여름을 견뎌내는 비법이기도 하다.

주전자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낸다. 커피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커피를 마시는 고급진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떤 이는 원두를 직접 갈거나 또 어떤 이는 커피의 그윽한 풍미를 위해서 커피 머신을 이용하기도 하던데 나는 그저 가스렌지에 데운 물을 텀블러에 가득 붓는 전통적인 방법이 짱이다.

커피 가루가 끓는 물에 용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진한 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난타 회원 한 분이 소개해 준 이 커피는 향에서 신맛이 느껴질 정도로 독특한데 지금은 그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 열흘 만에 한 모금 넘긴 커피에서는 어떠한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코로나가 할퀴고 간 내 몸뚱이엔 몽롱함과 피곤함을 남기고 감각기관을 둔화시켜 놓았다.

식구들 중에서 코로나를 가장 먼저 영접한 이는 딸아이였다.

작년 봄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병원균이 제 몸속으로 침투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했다. 소위 망했다는 느낌이 들더란다.

병원에서 확진 판정을 받고 당시만 해도 의무였던 일주일 동안의 격리를 위해서 제 방에 스스로 갇혔고 남편은 재택근무를 신청했다. 가족 중에 확진자가 발생했으니 자기는 당연히 재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스크의 자율 착용을 검토한다는 뉴스가 보도되던 시점에 남편의 재택근무가 왠 말인가 싶었다.

덕분에 나는 목이 아프다는 딸아이를 위해서 죽을 쑤고 물을 끓여서 식기를 소독하고 남편의 식사를 챙기는 힘겨운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확진자가 있으니 바깥 활동도 조심스러워서 난타 수업을 제외한 일체의 외부일정을 자제한 채 그야말로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하루 세끼의 식사가 버거워서 두 끼로 줄이고 그마저도 귀찮아서 알약 하나에 배부를 세상을 꿈꾸는 내가 주방을 벗어나지 못했던 일주일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아찔하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 김현수 객원기자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고 겨울이 코앞에 닥쳤을 때 남편에게도 코로나가 찾아왔다.

코로나 4차 예방접종을 한 지 닷새만이었다. 예방접종을 4차까지 맞았다는 사실이 무색했다. 딸아이 때의 경험을 되살려서 갖은 신선한 재료로 죽을 쑤었고 물을 끓여 식기를 소독했으며 틈틈이 간식도 밀어 넣어 주었다. 딸아이나 남편은 격리기간이 끝나고 방문을 여는 순간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했다.

“사육당하는 느낌이었어.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살만 뒤룩뒤룩 쪄서 출소한 느낌이야.”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확진이 된다면 누가 내게 죽을 쑤어 줄 것인가...차라리 확진이 되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먹을 죽은 고사하고라도 매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몹시 고대되는 관전 포인트일 것 같았다.

그러나 지인들은 말이 씨가 된다며 행여나 빈말이라도 그런 소리 말라고들 했다. 니가 안 아파봐서 모른다고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도 했다. 니는 승질이 하도 지랄같으니 코로나도 비켜갈 것이라며 악담 같은 덕담도 던져주었다.

아들의 코로나는 올 봄이었다. 어째 식구들이 6개월 단위로 확진자의 대열에 들어섰다.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고 코로나가 4급 감염병으로 전환되면서 위기의식이 많이 느슨해졌을 것이다. 확진자가 하루에 10만명을 육박하던 재수학원 시절, 아들은 코로나에 감염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마치 외딴 섬에 홀로 동떨어지듯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격리조치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공포가 더 극심했다고 했다.

딸아이도 그랬지만 아들의 코로나도 쉽게 지나갔다. 격리기간에 대한 의무도 완화가 되어서 아들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열심히 학교를 갔다. 나는 아들의 죽을 따로 쑤지도 않았고 식기 소독도 굳이 하지 않아서 제법 편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 한 켠에서는 양가의 감정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코로나가 제발 나에게서 비켜가기를 바라다가도 코로나에 걸려서 내가 먹을 죽을 누가 쑬 것인가를 지켜봐야겠다는 고약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일까. 그런 고약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벌을 받은 듯 하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효창공원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그 날은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일주일 중 단 하루였다. 빠른 비트와 속주로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난타 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동안 땀 흘리며 난타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내가 출강하는 복지관의 어르신들과 함께 난타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나의 양력 생일이었으며 서양에서 가장 싫어한다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생일날 아침에 확진을 받았으니 이건 벌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온 몸의 관절통으로 공격하던 나의 코로나는 다행히도 하루 이틀 사이에 사라져갔다. 입맛이 떨어져서 누가 죽을 쑤어 준대도 못 먹을 판이었는데 남편은 유투브를 보면서 열심히 죽을 쑤어 주었다. 나의 고약했던 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괜히 멋쩍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남편과 아이들은 의기투합해서 엄마 없는 주방을 잘 지켜내었고 지금은 다시 나의 차지가 되었다. 나는 언제쯤 이 주방을 모른 척 하고 살 수 있을까.

아직도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텀블러의 새까만 커피는 향이 나지 않는다.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졸음이 또 몰려온다. 밭은기침이 목구멍에서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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