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일본해와 후지산이 마르고 닳도록 대한사람 일본사람 두 손 높이 들어 천황폐하 만세 만만세.

갑자기 이런 기괴한 노랫말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사흘도 채 안돼서 어디를 가나 보인다. 아아 참, 인터넷은 확실히 빠르고 재기발랄하다. 여러 사람의 생각이 순식간에 하나로 모아져서 이뤄내는 성과 아니 비통한 탄식이다.

후쿠시마 핵 폐수 해상투기를 일본이 기어코 결행한 날이었다.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아무도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짓을 일본은 그냥 해치워 버렸다. 믿는 구석이 없다면 감히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겠지만, 어쨌든 그날은 8월 24일로 의미가 매우 심장한 날이었다.

 

ⓒ위클리서울/ 도쿄전력 홈피 캡쳐
ⓒ위클리서울/ 도쿄전력 홈피 캡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공식적인 패망 인정 아흐레째인 8월 24일에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앞바다에서 별다른 징후도 없이 그냥 침몰했다. 강제징용에 관한 기억을 비교적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조선인 오천여 명이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설렘을 가슴에 가득 안은 채로 수장된 그 사건의 배경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재일교포 등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본 당국이 저지른 간악한 증거은멸 범죄로 일찍이 각인되었다.

그 뒤로 팔십여 년 세월이 흐른 그날, 일본은 또 하나의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해치워 버렸다. 문제는 그날이 왜 하필 8월 24일이어야 했냐는 거였다. 핵 폐수 투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반증 아니겠냐고 어떤 사람은 진단했다. 잔혹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회학 이론이 증거로 제시되었다. 지진과 풍랑 등 자연 재해가 많은 섬나라 일본은 체질적으로 계산을 치밀하게 잘한다는 사회심리학적 분석도 추가되었다.

그러고 보면 징후는 확실하게 있었다. 자국의 이익이라면 무엇이든 다하는 미국이 일본해 표기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서 독도가 한국 땅이 아닌 일본 땅일 수도 있다는 근거를 만들어버렸다. 이게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나온 지원사격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왜구’라는 멸칭으로 표현되는 일본인이거나 그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일본 신문 ‘아사히’가 최종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가 임박하기 전에 후쿠시마 핵 폐수 방출을 서둘러 달라는 요청이 한국으로부터 있었다는 ‘아사히’의 보도를 접한 한국인 대다수는 설마, 설마, 하면서 ‘아사히’가 자기들의 희망사항을 퍼뜨린 거라고, 가짜뉴스일 거라고 평가절하 하고자 노력했지만,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 친한 교수 한 사람이 ‘아사히’와 그런 내용의 인터뷰를 했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아아, 우리는 역시 개돼지밖에 안 되는 것이냐, 하는 탄식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고위급 공무원의 입에서 ‘국민개돼지’ 발언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때 한순간뿐이었다. 매우 크게 분노하긴 했지만 분노 이상의 액션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고, 변하지도 않았고, 변화를 꾀하는 적극적인 노력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국민개돼지’는 아무나 아무 때나 쓰는 보통명사로 자리를 굳건히 잡아가는 중이다. 이 대목에서 괴로운 질문 하나를 던져야만 한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다함께 일치단결로 스스로를 개돼지라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가 다함께 일치단결로 나는 개돼지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개돼지 그룹에 속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개돼지가 아니라는 주문을 열심히 걸고 있는 중인 것일까?

세월이 좀 더 많이 흐른 뒤의 어느 날 어느 영특한 학생의 머릿속에 ‘국민개돼지’의 정확한 뜻이 뭐지? 하는 의문이 강력하게 드는 순간이 아마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학생은 온갖 문헌과 사전을 뒤적거리는 등의 노력을 다할 것이고, 마침내는 재판소로 끌고 가는 등 사회적 이슈화를 시켜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다.

‘국민개돼지’의 정의와 그 범위를 명확히 해 달라는 내용의 소장을 접수한 판사가 만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국민개돼지’란 관습에 따른 것이니 쓰는 사람은 쓰고 안 쓰는 사람은 안 쓰면 된다는 식의 모호한 판결을 내리겠지만, 보다 깐깐하고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판사라면 열심히 공부를 해서 ‘국민개돼지’의 어원을 찾아내고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밝혀낸 다음 이런 판결을 내리지 않을까 싶다.

 

지난 25일 더불어민주당이의 일본오염수방류규탄시위에 참여했다. ⓒ위클리서울/ 김현수 객원기자

--'국민개돼지’란 중앙부처 서기관급 이상 고위 공무원과 그에 준하는 공직자 그리고 대기업집단의 부장급 이상 간부와 중소기업체 대표를 제외한 모든 국민에게 적용된다 함이 옳다고 본다.

그런 재판과 판결이 실제로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어쨌든 ‘국민개돼지’론을 설파한 그 고위급 공무원의 식견은 제법 탁월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교적 깔끔한 생활패턴을 갖고 있는 개와 비교적 더러운 생활패턴을 체질적으로 갖고 있는 돼지를 동급으로 묶어내는 안목은 아무나 갖출 수 없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얼마 전 우리 집 개가 독살을 당했다. 아침에 습관적으로 먹이를 들고 가서 보니 눈과 코, 입, 성기 등 모든 구멍으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리지 않고 맹렬히 짖어대는 녀석의 습관적인 적개심에 매번 치를 떨던 어떤 사람이 아마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생각으로 고기 덩어리 속에 독약을 넣어서 휙 던졌고, 개는 그것을 넙죽 받아서 그냥 삼켜 버렸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했다.

요즘은 살아서 움직이는 돼지를 구경하기 어렵지만, 나 어렸을 적 농촌 마을에는 돼지 없는 집이 별로 없었다. 추수 때 외에는 돈 생길 일이 거의 없는 농촌에서 돼지와 개 그리고 닭은 완전 필요충분조건이어서, 변소 옆에는 돼지우리가 있고 마루 밑에는 개집이 있고 부엌 한쪽 땔나무 헛간 위에는 닭이 잠자는 횃대와 알 낳는 망태기가 매달려 있는 식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생각이 짧아서 눈여겨보지 못했지만, ‘국민개돼지’론을 염두에 두고 그 시절을 상기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새삼 발견된다. 개와 돼지는 일단 먹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동물이다. 개는 낯선 사람이 집으로 들어오면 짖어대다가도 먹을 것을 던져주면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생각도 없이 그냥 덥석 받아먹는 것을 특기로 한다. 그런 개도 범접이 불가능한 식탐의 제왕이 있으니 그게 바로 돼지다.

닭도 물론 먹을 것을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개돼지와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닭은 개와 돼지의 밥그릇을 호시탐탐 노린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던져주는 모이 앞에서는 뭐랄까, 불가원불가근의 원칙을 고수한다고나 할까. 금방 달려들어서 먹는 게 아니라 일단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한 발씩 천천히 다가서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눈을 깜빡거리며 좌우를 둘러보고, 그런 뒤에서야 모이를 입에 물기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대번에 삼키지 않고 일단 떨어트린 다음 다시 주워서 삼킨다.

지능이 낮다는 이유로 ‘닭머리’라는 멸칭을 얻기도 한 닭조차도 먹을 것을 던져주면 그렇게도 의심, 의심, 의심을 몇 번씩이나 하지만, 개와 돼지는 의심은 개뿔이나 무슨, 먹는 것은 일단 먹고 보자, 하는 뭐 그런 단순명확한 철학을 고수한다. 뿐만이 아니다. 개와 돼지는 외견상 크게 달라 보이면서도 만짐과 긁어줌을 매우 좋아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닮았다.

 

지금은 없는 녀석
지금은 없는 녀석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래서 개돼지를 잡고자 할 때 사람은 일단 먹이를 내밀고, 만지고, 긁어주는 3단계 공식을 따른다. 살살 만지고 긁어주는 혼곤한 느낌에 취해서 눈을 사르르 감을 때, 사람은 재빠르게 올가미를 휘둘러서 묶어버리는 뭐 그런 식이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자가 사람을 잡고자 할 때도 같은 공식이 적용된다. 올가미로 실제의 몸을 묶는 게 아니라 마음을, 머릿속을 친친 동여매서 포로로 만든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국민개돼지’론을 설파한 그 고위급 공무원은 아마도 개와 돼지의 습성이 사람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었을 것이다. 문제는 왜 굳이 그런 발언을 해서 주목을 받고 말았느냐이다. 어쩌면 직업 정치인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이 상했고, 그래서 홧김에 ‘국민개돼지’론을 설파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차피 국민이란 개돼지의 습성을 갖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막 대해도 된다는 평소의 사상이 자기도 모르게 쏟아져 나온 것일까? 어느 쪽이 됐건 그는 정치를 개인의 이익창출 수단으로 삼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치를 자기 가족이나 패거리들의 이익창출 기술로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국민개돼지’론은 사실 일종의 금기어였다. 오랜 세월 그런 묵계가 형성돼 왔었다. 언행일치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정치를 가족 비즈니스라고 아예 대놓고 떠들어대는 그런 사심으로 가득한 정치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언행일치 따위가 아니라 권모술수였다. 그래서 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하는 기술이 매우 발달해 있다.

국민 여러분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주인님의 종이요 머슴이라고 외치는 방식으로 그들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살살 긁어주고 어루만져 준다. 그러다가 선거철이 다가오면 ‘때려잡자 공산당’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을 은밀히 찾아가서 손에 돈을 쥐어주며 기관총 몇 발만 난사해 달라고, 대포 몇 방만 터뜨려 달라고, 여기와 저기에서 소규모 국지전을 간헐적으로 일으켜 달라고 애걸한다.

그렇게 해서 사회적 불안이 조성되면,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가, 우리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고래고래 악을 쓴다. 그리고 이런 간악한 권모술수는, 신기하게도 거의 매번 통한다. 보다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간악하다는 생각조차도 유권자들은 하지 않는다. 그냥 속아 넘어가고, 속았다는 것이 확실하게 밝혀지면 그때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고 분개하지만 분노 또한 그때 그 순간뿐이다.

권모술수가 유일한 자산인 정치꾼들에게 미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늘이, 현재가,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할 뿐이다. 따라서 민족이라든가 국가 같은 개념도 그들에게는 중요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만약에 이완용 등 소위 을사오적이라는 사람들을 부활시켜서 국민의 미래나 민족, 국가 같은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런 걸 왜 알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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