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한국? 사우스 코레? 으아 나 거기 갔었어. 나빠, 정말 나빠.”

여행이 직업인 어떤 사람이 찍은 영상에서 그런 호들갑스런 비명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장소는 유럽 서남부 쪽이었고, 여행 전문가는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걷다가 눈에 띄는 사람이 있으면 동의를 구하고 마이크를 들이대는 식의 촬영을 하고 있었다.

 

갯벌을 묻고 들어선 방조제
갯벌을 묻고 들어선 방조제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날 그 영상에서 노출된 주인공은 우리 나이로 치면 열일곱의 소녀였고, 고등학생이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열리는 잼버리에 참가할 자격을 얻기 위해 일 년 이상 그 방면의 공부를 했고, 용돈을 꾸준히 모았고, 한국말도 조금은 익혔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고, 아마 영원히 못 잊을 거라고 분개 가득한 목소리로 치를 떨었다.

이에 대해 영상 제작자인 그 여행 전문가는 ‘젋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크게 악화되고 있다’는 내용의 코멘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뜨거운 여름날에 치러지는 잼버리 대회를 왜 굳이 허허벌판 새만금에서 해야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전라북도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새만금이었고, 답도 새만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새만금과 관련해서는 나도 할 말이 많다. 경험과 체험으로 축적된 기억도 비교적 충실하다.

내 나이 열 살도 채 안 되던 시절, 가오리연 만드는 기법을 하나에서 열까지 세심하게 가르쳐주며 “너는 손재주가 없어서 만화책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단 한 문장으로 나라는 인간을 정리해준 아저씨가 계셨다.

아저씨의 아내가 그 시기에 젖먹이 아이를 돌보느라 하루 종일 바빴다. 바쁜 엄마를 쉬게 하겠다는 듯이 아이가 잠들면 나를 가까이 오라 해서 귓밥을 파준다느니, 손톱을 깎아준다니, 등등의 이유로 어찌나 관심을 크게 가져주는지 나는 가끔 이 아줌마가 내 어머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사람들이 어느 하루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아저씨는 농촌에 살면서도 변변한 밭뙈기 하나 없는 완전한 가난뱅이였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가 끝난 다음 날이면 부자 동네로 머슴살이를 나갔다가 팥죽을 끓여먹는 동짓날이면 돌아오는 게 그들의 경제생활이었다. 돌아와서 두 달쯤 새끼를 꼬거나 부부가 함께 가마니 짜기를 하면서 보내고 다시 정월 대보름이면 부잣집 머슴살이를 나가는 아저씨는 키가 엄청 크고, 덩치도 좋고, 손재주도 좋아서 상머슴으로 소문나 있었다.

 

낚시금지 구역은 고기가 잘 물린다고
낚시금지 구역은 고기가 잘 물린다고 한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멀리서도 그 집 주변이 매우 이상해 보였다. 마치 무슨 귀신이거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 집을 포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벌벌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허둥지둥 달려가서 보니 마당에 걸레 쪼가리들만 뒹굴고 있을 뿐 사람은 한 명도 없이 텅 비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나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이사를 가버린 거야?

보통 남자가 열 달 머슴살이로 벼 열 가마를 받을 때 그 아저씨는 열두 가마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상일꾼이 갓난아이까지 두고 있으면서 남의 집 머슴살이나 한다는 게 당연히 좋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아마 오랜 기간 계획도 세우고, 준비도 나름 착착 해 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 아저씨는 다른 머슴들과는 달리 노름판 같은 데는 얼씬도 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나버릴 수도 있는 것인가? 가오리연 만드는 기술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지나 말던가. 귓밥 같은 거 파 주지나 말던가. 손톱도 응? 그런 걸 왜 깎아줘서 나를 이렇게 슬프게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거냐고.

내 생애 최초로 맛본 상실감 또는 배신감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어쨌든 꽤 오랜 동안 허둥거렸다.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몰아치는 슬픔을 어쩌지 못해서 콩밭이나 깨밭에 벌렁 드러누워 데굴데굴 뒹굴어대기 일쑤였고, 마루 밑에서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튀어나오는 개를 걷어차 버리고 어머니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씩씩대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어른들이 가끔 주고받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들은 그동안 모아온 돈으로 논을 한두 마지기도 아니고 열 마지기나 사서 이를테면 신세계를 개척한 것 같았다. 그들이 떠나간 새로운 세계, 그곳의 이름이 계화도라고 했다. 계화도라는 이름의 신세계, 거기가 어디지?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어디로 가서 버스를 타고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하여튼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어디에서 내리면 나온다고 했지만 어린 나로서는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너무 어려워서 아마 그냥 잊어버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내게서 차츰 희미하게, 그리고 거의 완전히 사라져 갔다.

 

방조제 밖의 가난한 어부들
방조제 밖의 가난한 어부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하지만 정말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아련한 추억처럼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 뒤로 삼십 년도 훨씬 지난 어느 하루 문득 깨달았다. 고향을 탈출해서 도시 생활을 삼십 년쯤 하다가 다시 도시를 탈출해서 고향으로 온 나를 유혹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문인협회를 중심으로 미술협회 등 예술관련 단체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내 친구가 되어갔다. 그 당시 내 고향의 중요 관심사는 첫째가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운동이었고, 둘째가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관한 찬반 논란이었다. 경제성을 이유로 찬성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인간이 자연을 학대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주장하는 반대쪽 사람들의 논리를 완전히 깨지는 못했다.

반대쪽 인사들 몇몇이 어느 하루 상황파악을 제대로 한 번 해보자 해서 따라나섰다.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고, 그때 어느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계화도 어쩌고 하는 말이 나왔다. 계화도? 정신이 번쩍 든다는 느낌이었다.

과거에 계화도라는 섬이 있었던가 보았다.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에 그 섬을 경계로 간척공사기 진행되었고, 김제만경평야 너른 들과 연계되는 대단위 농지가 새로 생겼고, 여기저기서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를 분양받아 새로운 마을이 조성됐다는 게 계화도 이야기의 골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더 큰 공사 새만금 방조제를 구축해서 계화도를 완전히 내륙화하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새로운 농지를 조성하고자 한다는 얘기였다.

계화도와 새만금 방조제의 관계야 어찌 되었건, 나는 갑자기 그때가 그리워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손톱을 깎아주고 귓속을 후벼주던 그때의 그 아이 엄마를, 그녀의 남편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저씨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허둥지둥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이름을 알아내긴 했지만, 계화도 간척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은 한둘이 아니었고, 이름을 아는 사람을 찾아낼 수도 없었다.

 

방조제 안쪽에 한 척 남은 어선
방조제 안쪽에 한 척 남은 어선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나마 위안이라면 우리 동네와는 달리 집들이 죄다 현대식으로 번듯번듯하고, 슬쩍 훑어만 봐도 부자 티가 난다는 점이었다. 농사만 지어서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섬이었던 계화도 양 옆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갯벌에서 저절로 나고 자라는 각종 해물을 채취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살림살이였다.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과거 우리 동네에서처럼 새끼 꼬기와 가마니 짜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물이 나가면 갯벌로 나가서 본업인 농사보다 수익이 더 높은 부업을 하는 것이니 부자가 안 되고 싶어도 안 될 수가 없었을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신세계를 찾아온 계화도 사람들만 갯벌을 드나드는 것은 아니었다. 계화도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대대손손 백합이라든가 바지락 같은 조개잡이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이 바닷가 주변에 훨씬 많았다. 몇십 개 마을에 몇백 아니 몇천 명인지 알 수는 없다 해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갯벌 하나에 생업을 걸고 있었고, 농사는 마당의 작은 텃밭 하나에 만족할 뿐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 그야말로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최종 결정되면 그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잃고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 집 한 채에 얼마, 땅 한 평에 얼마 하는 식의 정부 계산이 벌써 전에 나와 있었다는 소문도 광범위하게 돌았다. 갯마을 사람들은 설마, 설마, 설마를 오랫동안 중얼거리기만 했을 뿐 대응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있다가 이제는 막바지에 몰려 있었고, 앞날이 너무 캄캄해서 몹시 격앙돼 있었다.

“이거, 이거, 미친 짓이여. 미친 짓이랑게.”

갯마을 사람들의 아우성은 대체로 그와 같았다. 아우성을 접한 환경단체에서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접한 예술단체 사람들이 또 힘을 보태고 나섰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각종 연구논문과 외국의 실패 사례를 근거로 정부를 압박했고, 예술단체 사람들은 각종 형식의 작품으로 민심을 규합해 나가고자 했다.

그 시기에 등장한 것이 장승이었다. 어느 하루 커다란 장승 하나가 세워졌다. 육중한 콘크리트 방조제가 지나갈 것으로 예정된 자리에 세워진, 소나무를 거칠게 깎아서 만들어진 장승을 본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장승을 깎아다가 세우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갯벌 위에 전대미문의 장승촌이 조성되긴 했지만, 막강한 권력과 자본 그리고 치밀한 계산을 무기로 압박해 들어오는 정부의 선전 선동과 추진력을 막아내진 못했다.

 

23년 전의 갯벌지킴 장승촌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문제는 그런 대단위 토목공사를 왜, 무엇 때문에 해야만 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군산에서 통통배를 타고 다니던 낭만적인 섬 선유도 바로 앞까지 막아선 육중한 콘크리트 방조제의 길이는 장장 16킬로미터에 이르고, 그렇게 바다를 막고 산을 깎아다가 채워서 만들어진 새로운 땅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두 배도 넘는다. 이 새로운 땅에 무엇을 하고자 했던 거지?

처음에는 농경지와 산업단지 조성이 목적이라고 했지만 목적은 방조제 공사가 완성되기도 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자유무역 협정 등 통상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쌀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국내산 쌀이 폭락을 거듭하고, 이제 더 이상은 쌀농사를 짓지 말라는 취지의 직불제까지 도입하는 마당에 새로운 농경지는 의미를 크게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산업단지는 제대로 착착 진행되었을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하나도 없이 아이디어 차원의 희망상항을 목적사업으로 표기해서 발표해 왔다는 것이 결국은 드러나고 말았다. 무슨 공장을 짓는다, 아니다 그것 말고 다른 공장을 짓는다, 식으로 이삼 년마다 수정안이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세계 최대 규모의 도박장을 유치한다는 괴상한 발표가 나왔다.

그것조차도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지구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놀이동산을 조성한다더니 그것도 쏙 들어가고, 공항을 만들면 어쩌겠나 하는 문제로 시끌시끌하다가 스마트 도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초현대식 자동화 도시를 만들어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주거환경을 창출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누가 와서 살지? 하긴 어쩌면 그래서 잼버리 대회를 무리하게 강행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인들의 관심을 유도해서 국제도시를 만들어볼 수도 있겠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일자리 문제였다. 엄청난 규모의 일자리 창출로 지역 주민들의 삶이 매우 풍요로워질 거라고 했지만, 거대한 산을 몇 개씩이나 깎아다가 바다를 밀어내는 무지막지한 작업이다 보니 초대형 중장비를 수십 대씩 보유한 재벌급 토건회사들이나 경쟁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을 뿐, 몇 개의 허드렛일을 제외하고는 지역 주민들이 참여할 만한 일자리는 애초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새만금 방조제 공사는 일자리 창출을 구실로 오순도순 잘 살고 있는 갯마을 사람들을 도시 빈민으로 몰아내고 재벌급 토건회사들의 돈벌이만 시켜준 꼴이었다. 게다가 이 땅은 기후변화로 인해 해수면이 6미터 이상 상승하게 돼 있다는 기후학자들의 예상이 현실화되면 그대로 수장될 운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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