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성남시 중원구 단대동 출신 그 남자를 또 만났다. 가을 이후 벌써 두 번째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찾아간 게 아니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하기 좋은 말로 그냥 우연이었다. 차를 몰고 달리다가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고, 그래서 차를 세운 것일 뿐이었다. 저물어 가는 가을이 만들어준 우연, 아니 필연한 만남이었다고 하면 말이 좀 되려나?

 

볓짚뭉치 공룡알
볓짚뭉치 공룡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따지고 보면 이것도 습관성 질환이라 할만 했다. 가을이 닫히고 겨울이 열리기 시작할 즈음이면 내 몸에서 가슴 부위가 뭉텅 잘려 나간 것만 같았다. 딱히 무슨 원하는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불만도 없이 그냥 허둥거렸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에 또 하나의 뻥 뚫린 구멍 같은 것이 느껴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니, 아아 이래서 옛 어른들이 ‘가을 하늘 공활(空豁)하다’는 투의 시를 지었던가 보구나 하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런 날은 집을 나서야 했다. 찾아야만 한다는 조급증이 있었다.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알 수도 없으면서 찾다 보면 뭔가가 보이기 마련이었다. 내 안에는 그런 체험이, 경험이, 어쩌면 집단무의식인지도 모를 그런 지혜 같은 것이 차곡차곡 많이도 쟁여져 있었다.

몇 시에 집을 나섰고, 얼마나 쏘다녔는지 알 수도 없는 어느 순간 마침내 뭔가가 보였다. 보인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보였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추수가 끝난 뒤의 들판에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색색의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그것의 실체를 내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해마다 추수가 끝난 뒤의 들판에는 그것들이 널려 있곤 했었다. 볏짚을 랩으로 둘둘 말아서 한우나 염소 같은 초식동물 사육장에 쌓아 놓고 간식거리로 쓰는 그것을 사람들은 공룡 알이라고 불렀다. 알처럼 둥근 모양에 덩치가 하도 커서 붙인 해학적인 별칭이었다.

그런데 많다. 너무 많다. 흡사 무슨 열병식이라도 하는 것 같다. 농촌 생활 이십 년이 넘었지만 공룡 알아 이토록 대단위로 늘어선 장면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색깔도 다양하다. 처음 공룡 알이 등장했을 때는 흰색 하나뿐이었다. 흰색 일색이다 보니 주인을 구별하기 어려워서 다른 색 하나가 추가되었고, 또 하나, 또 하나, 해서 이제는 아예 무슨 색색이 꽃 농사라도 지어놓은 것 같다.

잠깐 멈춰서 감탄사를 몇 번 토해내다가 다시 차에 올랐다. 핸들을 잡고 정면을 주시하는 순간 그가 멀리로 보였다. 한 눈에 척 봐도 그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랄까. 그에게는 그런 어떤 독특함이 있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망연자실이라고나 할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이 통째로 망연자실인 것만 같았다. 그는 그렇게도, 망연자실한 상태로 공룡 알들을 보고 있었다. 꼼짝도 없이 조용히,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는 중이었다. 타인의 그런 소리 없는 슬픔 같은 것은 가능한 한 모르는 게 편하고, 알아도 모르는 체하는 게 좋겠지만, 나는 이미 그것을 알아버렸고, 모르는 체할 만한 인내심도 없었다.

대충 계산으로도 십오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사십 년도 넘게 교류해 온 지인들이 꼴도 보기 싫어져서 핸드폰을 내던지고 성남시에서도 영원히 떠나기로 했다는 그는 자동차가 없고, 오토바이 같은 것도 없고, 심지어는 자전거도 없었다. 아침에 무엇인가의 충동으로 집을 나와서 한없이 걸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걷다가 홀연 대단위로 늘어선 공룡 알을 발견하고 신기해서 걸음을 멈췄을까?

나는 조용히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고, 가만히 문을 여닫고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그가 보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텅 빈 들판을 가득 채운 공룡 알들을 보면서 그는 아마 공룡 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떤 여인의 실루엣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잊어버리면 어쩌나 두려워서 죽지도 못 하겠다는 얘기를 그는 술이 취하면 혼잣말로 음유시인처럼 중얼거리곤 했었다. 그 중얼거림을 통해서 나는 그의 생을 크게 흔들어놓은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살았다.

 

소 먹이 개별
소 먹이 개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두 사람 모두 이재명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었다. 이재명를 몰랐다면 아무 데서나 문득문득, 불쑥불쑥 감정이 북받쳐서 우는 소리를 내야 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는 여인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모든 사고체계는 이재명과 연동돼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굉장한 인연으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정말로 묘하게 맺어지는 것이로구나 하는 새삼스런 인식으로 고개나 한 번 크게 끄덕거릴 수 있을 정도의 인연이었다.

시작은 그가 아직 본격적인 고물 수집상으로 나서기 전 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건대원이란 호칭의 제법 그럴싸한 직업으로도 통하고, 쓰레기를 뒤진다는 뜻의 넝마주이란 멸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일을 해서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생명을 이어가는 소년 시절이었고, 얻어맞고 욕지거리 듣는 게 직업처럼 인식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 언제인가 그의 눈에 한 소녀가 보였다. 오물조물 작은 병아리와 미키마우스 인형을 만들어내는 허름한 공장에서였다. 허름한 공장에는 찢어진 골판지 등 내다버려야 할 것들이 항상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래서 공장 주인과 넝마주이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가 반가운 관계였다. 그렇다고 작업실 내부로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소년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작업실 내부를 훔쳐나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소년의 관심은 작업실 내부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발로 밟아서 돌리는 재봉틀 앞에 앉아 있는 한 소녀의 뒤로 질끈 묶은 말총머리가 너무 야물고 단정해 보여서 본다는 의식도 없이 훔쳐보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 순간적으로 소녀의 눈과 딱 마주쳤다. 마주치고자 해서 마주친 것은 아니었다. 소녀가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렸고, 소년이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일 뿐이었다.

찰나라고나 해야 할,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을 소년은 보아버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소녀가 소년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화들짝 놀라서 도로 후딱 고개를 돌려 외면한 것 같았다. 문제는 외면하는 동작이 자연스럽지가 않고 소녀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마음을 무엇이라고 똑 짚어낼 수는 해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빨리 꺼지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는 후딱 외면하는 소녀의 볼과, 목에서 수줍음이랄까 부끄러움이랄까 하여튼 함부로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무엇인가를 보아버렸다.

그날 이후로 그는 넝마주이 신분이 아니라 한 명의 남자 신분으로 공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 보는 동안 소년은 야물게 단아한 줄로만 알았던 소녀의 가슴에 엄청난 양의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의 그 소녀가 지금은 별거 중인 아내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자기 자신들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꿈속처럼, 무슨 약에라도 취한 것처럼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큰아이가 태어나 있었고, 첫돌이라고 조촐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돌상 앞에서 두 사람은 우리가 언제 결혼까지 했었지? 하고 서로에게 묻다가 소녀의 아버지를 추억해 내고는 펑펑 울어야만 했다.

 

소 먹이
소 먹이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소녀가 어린 나이에 봉재공장을 다인 것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이었다. 새벽이면 공사장 날품팔이를 나가시는 아버지가 그날 새벽에 일어나서 얼굴을 씻다 말고 쓰러졌다. 쓰러져서 배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머리가 아프면 약국에 가서 뇌신을 사다 먹고, 배가 아프면 역시 약국에 가서 소화제나 사다 먹던 시절이었다. 세상에는 병원이란 게 있어서 어지간한 병은 고칠 수 있다는 지식은 있었어도 감히 찾아갈 엄두는 내볼 수 없이 가난한 살림살이였다.

아버지는 소화제도 필요 없다는 듯이 계속 뒹굴다가 그날 오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에야 급성 맹장염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고, 맹장염 정도는 병원에서 아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것을 아예 몰랐다면 어쩔 수 없는 죽음이려니 여기고 쉽게 체념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알고 나니 슬픔에 더해져서 까닭 모를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서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살이로 정신이 없는 동안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기억은 차츰 희미해져 갔지만, 어느 하루 갑자기 들려온 이재명이란 사람의 시립병원 건립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를 다시 슬픔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마치 시립병원만 지어지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날 수 있기라도 한다는 듯이 눈물에 콧물을 흘려가며 시립병원, 시립병원, 노래를 불렀다.

새롭게 불타오르는 아내의 희망에 고부된 남편도 역시 시립병원 찬양자가 되어갔고,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이재명 전도사가 되어갔다.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을 만나면 시립병원과 이재명이란 단어가 저절로 막 흘러나왔다. 심지어는 이재명의 여동생한테도 이재명 선전을 하다가 무안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그때 야쿠르트 배달 일을 하고 있었다. 고물 장사와 야쿠르트 배달원은 오래 전부터 가끔 길에서 마주쳐 왔었고, 농담을 주고받는 정도로까지 친애함을 느끼게 됐을 때 그녀가 뜬금없이 “오빠라고 불러도 되려나?” 소리를 해서 그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얄밉게도 이재명이 자신의 친오빠라는 사실은 한참 뒤에까지도 밝히지 않았다. 딱히 숨겨야 할 이유도 없는 사실관계를 계속 숨기다 보니 자신도 불편했던 것인지 어느 하루 농담처럼 가볍게 한 마디 “그 사람이 사실은 우리 친오빠야.”하고는 후딱후딱 걸어가 버렸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어야 할 이유도 없어서 그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지내다가 결국은 믿게 되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의 어느 하루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그는 장례도 끝난 뒤에 인터넷을 통해서 알았다.

자기를 오빠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실조차 몰랐다는 거, 게다가 화장실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죽었다는 거, 이게 사실인지 꿈인지 아직도 명쾌한 해석이 안 돼서 그는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고, 이재명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와 자신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것도 같고 엄청나게 먼 것도 같고 헷갈려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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