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코스모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코스모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현실이 너무 바보 같다고 여겨질 때, 암담하고 한심해서 가슴이 금방 터질 것 같아질 때, 그런 순간에는 하늘에 별을 보자. 갸름하게 뜬 눈으로 별을 보면서 귀를 기울이자. 귀를 기울인 채로 나직이 말을 붙여보자. 그러면 응답이 있을까? 있을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너 거기 있지?
너도 거기 있구나?
우리 만날까?
네가 내 쪽으로 와.
네가 내 쪽으로 오면 안 돼?
네가 내 쪽으로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거야?
너 혹시 내가 싫은 건 아니지?
그런 너는 혹시 내가 싫은 거야?
맞아. 너는 나를 알고, 나는 너를 알아.
그러니까 우리 만나자고.
그러니까 네가 내 쪽으로 오라고.
네가 내 쪽으로 오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봐.

이것은 일종의 우화다. 이런 우화는 내가 습관적으로, 손버릇처럼, 아무 때 아무 데서나 가슴에 압력이 심하게 느껴질 때면 볼펜을 잡고 끼적거려보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내 손으로 끼적거린 문장이긴 하지만 순수한 창작은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칼 세이건의 영향을 받았음이 한눈에 척 느껴진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로 시작하는 푸쉬킨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쫓겨 다니는 삶을 숙명처럼 살아온 김구 선생의 고독한 뒷모습이 슬쩍 떠올라오기도 한다.

어쨌든 뭐 그렇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내가 아직은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증거를 찾아내곤 한다. 유아 시절 깊은 산속 절간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별들에 관한 기억이 너무나 선연하게 남아 있는 영향인지도 모르긴 하지만, 동기야 무엇이건 이런 소극적인 방식이나마 개척해내지 못했다면 내 가슴은 아마도 박격포탄을 맞고 부서지는 목제 가옥처럼 오래 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지질학 전공자와 천문학 전공자 그리고 문학하는 사람이 만나면 대단한 혼돈의 세계가 펼쳐진다. 일만 년 아니 오만 년 정도는 별다른 무게감도 없이 초 단위로 획획 넘어가 버리고, 수십억 년 세월 속에 갇혀 있던 삼엽충 같은 생명체가 거대한 바위를 깨고 불불불 기어 나오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런 환상이 그냥 혼돈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공간과 시간이 마구 헝클어져 있어서 정신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헝클어져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그 자체가 정교한 질서 체계임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까닭으로 내가, 나라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문득 감사하게 된다.

 

칼 세이건
칼 세이건  ‘코스모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매우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성된 칼 세이건의 저작 ‘코스모스’는 언제 봐도 놀랍기만 하다. 내가 그 책을 처음 접했을 무렵의 나는 코스모스를 가을날 길가에서 한들거리는 꽃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코스모스 꽃과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까마득한 우주 공간이 너무 아득해서 그만 공부를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터이었다.

나는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코스모스 꽃을 발견하면 한 번 더 보곤 한다. 보고자 해서 보는 것은 아니다. 고개가 그냥 저절로 돌려지는 것일 뿐이다. 심지어는 운전을 하던 중에 코스모스 꽃을 발견하면 거울을 통해서라도 기어이 한 번 더 보곤 한다. 간단히 말해서 코스모스 꽃은 내게 무구한 추억이고, 향수이며, 고향 그 자체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렇게 볼 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의 속담은 확실히 훌륭하다고 여겨진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내 기억에 코스모스 꽃이 아로새겨져 있지 않았다면 그런 추억을, 그런 향수를, 그런 고향을 가질 수는 아마도 없었으리라.

코스모스 꽃은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고, 발아율 또한 매우 높다. 그래서 코스모스 꽃이 피었던 자리에는 이듬해 봄날 코스모스 새싹이 콩나물시루 속의 콩나물보다도 열 배는 더 빽빽하게 나와서 오글거린다. 하도 빽빽해서 날마다 얼마씩은 죽어가고, 살아남은 녀석들은 쑥쑥 자라면서 친구들과 경쟁을 벌인다.

그 시기가 아마 7월에서 8월 사이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해마다 그 즈음이면 교장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들이 작업복 차림에 호미나 괭이 또는 삽 같은 연장 하나씩을 들고 운동장에 모였다. 학생들도 당연히 운동장에 모여 선생님의 주의사항을 듣는 척하다가 멋대로 씩씩하게 교문 밖으로 나서곤 했다.

3학년 이하 어린 학생들은 코스모스 모종을 나르고, 4학년 이상 상급학생들은 모종을 심어야 할 자리의 잡초를 뽑거나 구덩이를 파거나 또는 선생님들과 함께 모종을 심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빈터마다 모종을 심고 나면 학교 앞을 지나는 도로 양쪽으로 길게 모종 심기를 하고, 그 작업이 끝나면 또 학교에서 모든 마을 앞까지 모종 심기를 하는데 그 기간이 대략 일주일 이상 열흘 가까이 걸렸다.

학교 바로 앞에 있는 마을이야 물론 하루도 채 안 걸려서 일이 끝나버리지만, 우리 동네처럼 학교와의 거리가 2킬로미터 이상 되는 마을은 날마다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코스모스 모종 심기를 직업처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업이 끝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감쪽같이 까맣게 잊어버렸다.

잊어버린다는 거, 잊고 있었지만 거기에 있다는 거, 여기에 커다란 감동이 준비돼 있었다. 언제 코스모스 모종을 심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하루 문득 꽃봉오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이건 누가 심었는데 잘 살았고, 저건 누가 심었는데 잘못 살았다는 둥 서로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맞춰보는 우김질 경쟁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지구본
지구본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아이들이야 우김질 경쟁을 하건 말건 꽃봉오리를 선보이기 시작한 코스모스는 자기들의 스케줄대로 한 송이, 두 송이 꽃을 피워나가고, 드문드문 피어나던 꽃송이가 어느 순간 와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앞뒤좌우 사방에서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마구 피어나 버리면, 이때부터 아이들은 축제 모드로 들어간다.

축제는 지금부터 축제 시작, 하는 약속을 하고서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누군가 문득 코스모스 꽃 한 송이를 뚝 따서 손가락 사이에 끼어들고 누군가의 뒤로 가만히 다가간다. 그리고 갑자기 등짝을 찰싹 때리면 그 등짝에 코스모스 꽃 한 송이가 도장처럼 찍히는 것이어서, 이때부터 아이들은 일제히 꽃 도장 찍기 축제로 거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아무가 아무에게나 마구 꽃 도장을 찍어주는 것 같지만, 차츰 실체가 드러난다고나 할까 가닥이 잡힌다고나 할까, 남학생은 대체로 여학생을, 여학생은 대체로 남학생을 겨냥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또는 감추고자 했었던 마음이 또한 시나브로 드러나면서 아이들의 가슴은 풋사랑이랄까 첫사랑이랄까, 하여튼 새롭고도 낯설어서 흥미진진한 서정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다.

코스모스는 강한 생명력만큼이나 꽃이 피어 있는 날수도 한 달 가까이나 돼서,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날마다 꽃 도장 찍기를 해온 아이들은 누가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누가 누구를 몹시 싫어해서 그림자만 봐도 슬쩍 피해 가는지를 다 알게 돼버린다.

이렇게 해서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누가 누구를 싫어한다느니, 별별 놀림 소리가 휘파람 소리와 함께 가을 하늘을 날아다니고, 이름이 거론된 아이들은 수줍어서, 부끄러워서, 자신의 감정이 좋은 것도 같고 억울한 것도 같고 헷갈려서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사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는 등의 진풍경이 날마다 벌어지는 것이었다.

코스모스 하면 떠올라오는 그런 달콤 야릇한 추억을 갖고 있는 내게 어느 하루 느닷없이 나타난 칼 세이건의 천문학 책 ‘코스모스’는 글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책방에서 처음 그 책을 발견했을 때의 내 감정은 매우 당혹스러웠다.

책 표지에 코스모스 꽃 한 송이라도 스케치돼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엉뚱한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겠지만, 새까만 표지에 마치 돋을새김처럼 ‘코스모스cosmos' 이렇게 눈에 확 띄는 글자만 쓰여 있으니 이게 대체 뭔 천지개벽인가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날을 계기로 나는 천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천문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 보니 지질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호기심이 어느 정도 충족돼서 아하 이것이 이것이로구나, 하고 나니 놀라워라, 불변의 원칙인 줄만 알았던 지구의 하루가 24시간만이 아니라 겨우 여섯 시간인 시절도 있었다는 것이다.

 

꽃도장 찍기 좋은
꽃도장 찍기 좋은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대략 십만 년 전,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해서 모든 것이 다 꽁꽁 얼어붙었을 때, 지구의 무게가 균일하지 않고 얼음덩어리가 많은 곳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면서 자전축이 바뀌고, 자전축이 바뀌니 스물네 시간 동안 한 바퀴를 돌던 지구가 여섯 시간 만에 한 바퀴를 돌아가는 청룡열차 급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스물네 시간 동안 한 바퀴를 도는 지금도 사람은 가끔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는데 여섯 시간이면 어떻게 될까?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질학계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지금 또 그런 현상이 관측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얼음덩어리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생활 패턴이 문제가 돼서 인간의 삶을 위협하게 되는 기이한 역설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니 아아 이간이여, 인간이여, 소리가 절로 나오려고 한다.

핵심은 물이다. 바닷물의 염도가 매년 낮아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지하수 때문이란다. 과학기술이란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물을 오염시켜놓은 인간이 오염되지 않은 물을 찾는다고 생수, 생수, 노래를 부르다가 광천수니 암반수니 삼다수니 어쩌고 외치면서 지하수를 마구 뽑아대니 지하에 공극이 생기면서 지구가 마침내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가 내리면 지하수가 새로 생기는데 뭔 걱정이냐는 반문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게 또 그렇게 단순명료한 문제인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지하수는 삼태기를 빠져나가는 빗물처럼 한꺼번에 대량으로 축적되는 게 아니라 화선지를 먹어 들어가는 물감처럼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모이기 때문에 인간이 뽑아내는 물의 양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대 사회는 여기저기 사방천지가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코팅이 돼 있어서 물이 땅으로 스며드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지구 온난화가 본격화되기 전에 어쩌면 지구가 통째로 팽이처럼 마구 돌아가는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아직은 지구의 자전축이 이동하는 속도가 매우 느려서 체감이 안 되고 있다지만 글쎄, 이런 무감각의 세월이 얼마나 갈까.

이런 와중에도 인간은 여전히 시기와 질투와 욕망의 도가니 속에서 포탄이나 쏘아대며 선제타격을 외치고 있으니 뭐랄까, 한 치 앞도 못 보는 존재가 인간이란 옛말이 그저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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