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의 와인이야기-9]

ⓒ위클리서울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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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후부터 흩날리기 시작한 눈송이가 저녁이 되니 집 앞을 소복하게 덮었다. 제대로 된 첫눈이라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아이들은 눈을 굴리고 던지며 한껏 들뜬 모습이다. 동심이 부럽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집 앞 도로가 빙판길이 될까 걱정하며 옆에서 비질을 한다.

눈이 내리고 추워지는 이맘때면 생각나는 술이 있다.
뱅 쇼(Vin Chaud). 프랑스어로 ‘뜨거운 와인, 따듯하게 데워 마시는 와인’이라는 뜻으로, 주로레드 와인에 과일과 계피 등의 향신료 그리고 설탕이나 꿀을 넣어 끓여 마시는 와인이다. 프랑스에서는 12월이 되면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터가 서는데 장터 주변으로 뱅쇼를 파는 좌판이 펼쳐진다. 향긋하고 달큰한 냄새와 함께 뱅쇼를 끓이는 냄비에서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나는 모습에 발길을 멈추게 된다. 딱히 와인잔에 담아주는 것도 아니다. 넉넉한 종이컵에 막 담아준다. 오들오들 떨던 몸과 마음이 따듯해진다.

필자에게 뱅쇼는 추억의 맛이다. 유학시절 아내와 내가 어렸던 그 때의 뭔가 늘 불안하고 시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다. 낯설고 차가웠던 도시의 겨울이 좌판에서 뱅쇼를 마시는 그 순간만큼은 더없이 따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뱅쇼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입 밖으로 이 단어를 내뱉을 때 들리는 경쾌하고 밝은 ‘뱅쇼’라는 발음이 좋다. 그리고 뱅쇼라는 단어 자체가 솔직하고 유쾌한 말이다. ‘뱅 쇼 vin+chaud 뜨거운 와인, 따듯한 와인’. 아무 꾸밈 없이, 만들어진 본디 모습 그대로 불리우는 이름이다. 이와 비슷하게 솔직하고 정겨운 이름의 술이 우리에게도 있다. 석양주. 해가 뉘엿뉘엿 늦은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찰나. 그 아련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한잔, 석양주다. 둘 다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술이요, 평생 잊히지 않을 단어다.

뱅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와인은 주로 레드 와인이다. 아주 드물게 화이트 와인을 사용하는 프랑스 사람들을 보았지만, 대개는 레드 와인을 사용한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만원 미만에 구입할 수 있는 와인이면 무난하다. 과일은 각자의 기호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주로 레몬이나 오렌지, 귤 등 감귤류 과일을 사용한다. 설탕이 간편하고 일반적이나 꿀을 넣기도 하며, 기호에 맞게 양을 조절한다. 그리고 계피를 넣는다. 설탕과 계피가 들어가다 보니 우리의 수정과와 그 맛이 비슷하다.
양을 늘리려면 와인과 물을 섞기도 하며, 깨끗이 씻은 과일을 잘라 담고, 계피 스틱을 함께 넣는다. 생강을 함께 넣으면 더 알싸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끓인 와인이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팔팔 끓이는 것이 아니라 약불에서 천천히 데운다는 느낌이다. 와인을 데우는 과정에서 와인의 알코올은 상당히 날아가 도수가 확 낮아지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추운 겨울에 마셔야 제 맛인 뱅쇼. 별다른 기술이나 장비가 필요 없는 아주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술이다. 올 겨울에는 가끔 뱅쇼를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어떨까?
주고받는 사람 모두 마음의 온도가 한껏 올라갈 것 같다.

박재현 (주)인디펜던트리쿼코리아 전략기획팀 팀장
박재현 (주)인디펜던트리쿼코리아 전략기획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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