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의 와인이야기-11]

ⓒ위클리서울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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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박재현] 필자는 와인 수입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 안에서 다양한 직무의 구분이 있고 역할이 다르지만 간단히 말하면, <상품성이 있는 와인
을 선택하여 적재적소에 판매하는 것>이 이 업의 골갱이다.
이번 글에서는 필자의 업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을 이야기할까 한다.

가격대, 브랜드의 대중성, 트렌드에 대한 민감도 등의 요소에 따라서 와인을 판매하는 판매처가 나뉜다. 이것은 비단 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소비재에 공통된 사항일 것이다. 와인 판매의 특이점 중 하나는 맛에 대하여 소구하면서 구매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다. 와인이 식품이기에 그렇다. 와인도 다른 모든 제품들처럼 판매가 이루어진 뒤에 구매자들로부터 냉정한 평가를 받는다. 구매 후기가 될 수도 있고, 제품에 대한 직접적인 문의를 받기도 한다. 주로 맛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더 흥미가 있다. 가령, 샴푸나 비누를 구매한 뒤에 ‘향과 맛이 내가 기대한 바와 다른 데요’하면서 판매자에게 문의를 하거나 평가를 내리는 일은 매우 드물 것이다. 하지만 와인은 그렇다.

지난주, 한 거래처로부터 맛에 대한 문의를 받았다. 골자는 와인을 오픈하고 난 뒤에 느껴지던 기분 좋은 향과 맛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흐릿한 향과 함께 쓴맛만 남더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보면, 와인을 오픈하고 액체가 공기와 닿아 여러가지 향기 분자가 기화하면서 좋은 향을 점차 발산한다. 점차 맛은 부드러워지고 향은 복합적으로 변해간다. 그러다 산화가 계속 진행되면, 향은 희미해지고 맛도 묽어진다. 이런 일반적인 와인 풍미의 변화 과정은, 와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예측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런데 앞에서 묘사한 거래처의 문의는 약간 결이 다르다. 맛 자체가 흐려지거나 묽어진 것이 아니라 쓴맛은 여전히 진하게 남는다.

이에 대해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한번 그리고 필자 혼자 한번 최대한 그 거래처의 음용 상
황과 비슷하게 시음을 해 보았다.
거래처에서 얘기한 특정 시간이 경과하자 쓴맛만 두드러진다. 무슨 일일까? 이번에는 예의 그 특정 시간을 더 넘겨서 하루가 지난 뒤에 같은 와인을 다시 시음했다. 쓴맛은 약해지고 처음 느껴지던 기분 좋은 향과 맛이 다시 느껴진다. 더 헷갈리는 상황이다. 포도를 직접 기르고 와인을 양조했던 양조장의 와인메이커에게 이런 상황을 알려주고 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볼 참이다. 어떤 답변을 듣게 될지 궁금하다.

해당 와인의 맛 변화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일련의 시음 과정을 겪으면서, 맛에 대한 필자의 감각과 기억이 ‘스냅샷’이 아닌 ‘동영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와인을 두고 하루 반나절에 걸쳐 세 번 시음을 했는데, 각각의 감각은 이어지지 않고 그 순간만을 보여주는 정지 사진 (스냅샷) 같았다.

사실 와인의 향과 맛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자극을 인식하는 우리 감각과 묘사는 즉시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와인 책이나 다른 지면에서 접하고 참고하는 와인에 대한 묘사는 그 와인의 전체를 보여주기 보다는 잠깐 잠깐 정지한 장면을 보여줄 뿐이다.

‘동영상’을 볼 수 없고, ‘스냅샷’만으로 그 ‘쓴맛’의 단서를 찾아야하는 와인메이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진다.

 

박재현 (주)인디펜던트리쿼코리아 전략기획팀 팀장
박재현 (주)인디펜던트리쿼코리아 전략기획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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